"깨달은 사람들은 서로를 알아볼까"
대체로 알아본다.
냄새로.
깨.달.아. 사.는. 이.에.게.는. 특.유.의. 냄.새.가. 있.다.
아무리 영적 지식에 통달했다거나 몇 번의 종교체험을 했다고 해서 그 냄새는 나지 않는다.
그것은 이형기 시인의 노래처럼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이 내는 '삶의 향기'이기 때문이다.
향기는 앞으로 나아가는 이의 뒤편으로 흐르는 것이다.
눈을 떠서 문을 살짝 열었지만, 그 문턱에 앉아 문의 주인처럼 행세하고 있는 이에게는 향기가 나지 않는다.
문을 연 것은 문의 너머로 나가 자신이 새로운 현실을 살기 위해서다.
남들에게 문을 잘 따는 열쇠공으로서의 권위를 주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열쇠기술자들끼리는 서로 반목한다.
누군가가 문을 열었다고 하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검증하려고 한다. 보통 열쇠공들이 검증의 수단으로 삼는 것은 고루한 열쇠제작 메뉴얼과 같은 경전이다. 이 경전을 보고 이해할 수 있어야 진짜 문을 연 증거라고 그들은 말한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이들은 동일한 검증행위를 이룬다. 어떠한 종교체험이 있은 뒤에 이제 그 전까지는 이해되지 않던 경전의 내용들이 이해되기 시작했으니, 자기가 깨달은 사람이라고 믿고 싶어한다.
결국 이들에게는 자신에게 유능한 열쇠기술자로서의 권위가 승인될 수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우리 아들 깨달았네."라며 엄마의 인정을 바라고 있는 아이와 다를 바가 없다.
그렇게 자신이 가장 사랑받는 자식이기 위해, 이 열쇠공들은 자신이 문의 독점적인 주인임을 내세우고 싶어한다.
이때 일어나는 것이 바로 '스승종합격투대전'이다.
소년잡지 별책부록으로 들어 있는 탐정도구 같은 것을 통해 문을 딴 뒤, 이들은 문가에 앉아 자기가 더 권위있는 열쇠기술자로 인정받기 위해 뜨거운 경쟁을 펼치곤 한다.
이처럼 이들이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깨달음이 아니라 자신의 스승될 권위다. 이들에게 있어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최고의 권위'의 소재다. 그것은 자신이 가장 높은 스승이 될 자격을 주는 것처럼 생각된다.
열등감이 큰 만큼 더 높은 스승이 되고자 하는 욕망도 크다.
이것이 이미 깨달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사실은, 심지어 모종의 종교체험이 없는 이들도 이 전쟁에 참여하고 있는 모습을 통해 분명하게 밝혀진다.
깨닫지 못한 이들도 누군가가 깨달았다고 하면 자신이 검증하려고 든다.
이것은 장님이 내는 문제와 같다.
"이건 뭐죠?"
"말입니다."
"말 같지도 않은 말 하지 마시고, 지금 이건 길다란 기둥 같은 것이 네 개 있고, 그 끝에 또 하나를 쪼물딱거리면 다른 기둥만큼 주욱 커지는 신비로운 마법의 물질 같은 거잖아요."
"그러니까 그게 말이라니까요. 말이 싫어하니 거기는 이제 그만 만지는 게 좋아요."
"하 나 참, 어이가 없네. 나처럼 이렇게 설명도 잘 못하면서 뭘 안다고 감히 나한테 하라 말라인지."
늘 이런 시험시간은 좀 답답한 대화가 된다.
결국 이들은 깨달음을 검증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물론 이런 방식으로는 검증할 수도 없다.)
이들은 자신이 최고의 스승이라는 것을 인정하거나, 아니면 자기보다 더 높은 스승의 자격을 증명해서 역으로 자기의 스승이 되어달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문 밖으로는 결코 나가려 하지 않는 이들이 문가에 모여 이처럼 '스승찾아 삼만리'만을 반복상연한다.
이들이 구하고 있던 것은 깨달음이 아니라 스승이었던 셈이다.
왜 스승을 찾고 있었을까?
스승이 있으면 자신의 인생이 재미있어질 것이라고 기대한 것이다.
스.승.은. 아.빠.의. 다.른. 이.름.이.다.
아빠가 같이 놀아주어야 자기가 재미있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던 아이의 모습과 같다.
그래서 여기에도 냄새가 있다.
지.루.한. 권.태.의. 냄.새.다.
열쇠기술자들이 늘 싸우는 생태에는 지루하다는 이유가 더 본질적이다.
자신은 문을 열고 스승이 되어 이제 인생에서 다 이룬 것만 같다.
스승[아빠]을 얻는 것만이 인생의 유일한 목적이었던 까닭이다. 그리고 이제 자기 자신이 스승[아빠]이 되었으니 가장 완벽하게 인생이 충족된 듯한 상황이다.
더 갈 곳이 없다. 갈 필요도 없다. 스승[아빠]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니 지루하다.
아빠가 있으면 재미있을 줄 알았는데, 직접 아빠가 되고 나니 아빠를 찾는 다른 아이들과 놀아주는 일이 여간 지루하지가 않다.
그럼에도 인생의 유일한 목적이었던 아빠를 놓을 수는 없이 계속해서 붙잡고만 있으니 상황은 더욱 지루하다.
이 지루함은 매우 자주 완성의 여여함으로 착각되곤 한다.
하지만 숨길 수가 없는 것이 결국 냄새다.
조금 있으면 이 권태의 냄새는 노골적인 똥냄새로 바뀐다. 고여서 썩어가는 늪에서 나는 퇴폐의 냄새다.
여기에는 근본적으로 허무주의의 정조가 있다. 이 허무주의 또한 "모든 것이 공(空)하다."라는 포장지로 자주 은폐된다. 그러나 이것은 공한 것이 아니라 허무주의일 뿐이다.
그 구분은 엄청나게 단순하다.
공함은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허무주의는 지루한 것을 반복한다.
선불교 연구자인 니시타니 게이지는 공함과 허무주의 사이에 분명한 경계를 긋고 그 혼동을 없애고자 부단히 성실했던 학자다.
허무주의가 문턱에 앉아 마법처럼 문을 따는 최고의 열쇠기술자 아빠처럼 권태에 썩어가는 동안, 공(空)을 사는 이는 아이처럼 공놀이를 하러 문 밖으로 나간다.
공놀이를 하는 이에게는 땀과 배움과 설렘이 어우러진 사람냄새가 난다.
깨달은 사람들은 분명 서로에게서 이 냄새를 맡고 서로를 알아본다.
"와, 정말 재미있게 말하는 사람이다. 요런 식으로 요렇게도 말하는구나."
메시의 발재간을 서로에게서 본다.
그러나 그 발재간을 단지 자기를 드높이기 위한 유랑극단의 잡기가 아니라, 골을 넣기 위해 얼마나 더 실천적으로 탐구하고 연습한 그 결과인지로 알아본다.
깨달은 이에게는 골과 같은 분명한 황금의 목표가 있다.
그것은 만남이다.
이들은 삶에서 더 만나고 싶어한다.
만남을 통해 사랑을 배워가는 즐거움을 더 누리고 싶어한다.
『갈매기 조나단』에는 이 즐거움이 잘 묘사되어 있다.
그래서 깨달은 이들은 공부 다 마친 사람처럼 굴지 않는다. 세계의 끝으로 공을 차며 달려가 문을 열고, 또 다른 세계의 끝에서 또 다른 문을 열며, 만남의 드리블을 이어간다. 자신의 시간이 다 되면,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가장 멋진 대지를 가르는 패스로 또 하나의 배워가는 이에게 공을 연결한다.
그렇게 삶은 계속된다.
말들은 끝없이 만남을 향해 달려나간다.
마치 끊어진 것처럼 보이지 않아 막막했던 공(空)의 길을 어느 틈에 이어서 또 드리블을 치며 나아가고 있는 이들이 있다. 그 냄새를, 같이 공을 드리블하며 달려가고 있는 이들은 모두 알아본다. 모를 수가 없다.
이 길을 잇기까지 얼마나 고생했을지, 쓰고 버려질 임시적인 말(言)의 다리를 놓아서라도 말(馬)들이 자신의 다리로 자유롭게 만남을 향해 달려가게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마음을 쓰고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렸을지, 그 '감동의 냄새'를 정말로 모를 수가 없다.
누군가는 '시선'이라고도 얘기하고, 누군가는 '느낌'이라고도 얘기하는데, 그것은 우리에게 모든 정성을 담아 패스해준 공이다.
낭떠러지처럼 끊어진 길을 다시 이어 꼭 만나고자 힘차게 달려와준 마음이다.
그렇게 전해진 사랑이다.
이것을 전하고 싶어 우리도 문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그 뒷모습에 삶의 향기가 그윽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