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심리학 #13

"창조의 원리: 남성성과 여성성"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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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남자와 여자에 대한 것이 아니다.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한 것이다. 그의 생물학적 성별과 관계없이 인간에게는 누구나 남성성과 여성성이 다 갖추어져 있다.


그렇기에 인간은 창조할 수 있다.


남.성.성.과. 여.성.성.이. 조.화.를. 이.룰. 때. 생.겨.나.는. 것.이. 창.조.다.


지금의 시대는 이 조화가 깨져 있다. 가부장제에 대한 얘기나 남녀갈등에 대한 얘기가 아니다.


우리 자신 안에서 무엇이 소외되어 있는가에 대한 얘기다. 지금 분명하게 소외되어 있는 것은 남성성이다. 그렇다고 여성성이 발달해 있는 것도 아니다. 여성성은 과잉되어 있으며, 과잉은 결핍의 다른 말이다. 남성성과 여성성은 이처럼 둘 다 우리에게 그 섬세한 발현의 감각이 실종되어 있다.


남성성과 여성성을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치환하면 더 분명하게 이해된다.


'내용'과 '형식'이 그것이다.


남.성.성.은. 내.용.이.고. 여.성.성.은. 형.식.이.다.


형식이 없는 내용은 살려고 해도 살 수가 없다.


내용이 없는 형식은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다.


내용은 나아간다. 경계를 넘어 자꾸만 나아가려는 독자적인 고유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성질을 갖는다.


형식은 품어낸다. 경계를 만들어 더 오래 보존하려는 안정적인 수용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성질을 갖는다.


때문에 형식의 도움이 없으면 내용은 객사할 팔자다.


반대로 내용의 도움이 없으면 형식은 공허한 화석으로 풍화된다.


형식으로 말미암아 내용은 새로운 발상들을 비로소 새로운 현실로 실현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새로운 현실은 형식에게도 좋은 것이다. 내용이 경계를 넘어 새로운 지평을 펼쳐내왔기에, 형식도 그에 맞춰 커질 수 있다. 그 전까지의 한계를 넘어 더 자유롭고 멋진 형식으로 변화할 수 있게 된다.


예술에서 매체의 발전사를 떠올려보면 분명하다. 담고자 하는 새로운 내용을 소중히 여기는 만큼 그 형식 또한 새롭게 발전해왔다.


더 쉬운 비유로는, 식물이 자라는 만큼, 식물을 지키고자 하는 화분도 더 크고 좋은 것으로 탈바꿈된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화분이 없으면 식물은 살려고 해도 살 수가 없는 가련한 운명에 처하며, 식물이 없으면 화분은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공허한 운명에 처한다.


그런데 오늘날의 우리가 경험하는 보편적인 운명은 후자의 것이다.


화.분.이. 식.물.을. 통.제.하.에. 두.고.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분재를 육성하는 논리다.


내용은 형식을 위협해서는 안 되며, 또한 형식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형식주의의 억압이다.


이 형식주의를 우리는 권위적 모성이라고 부른다.


이 권위적 모성은 여성성의 과잉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여성성이 남성성을 부정한 채 자신이 남성성의 기능까지도 대체하려고 할 때 이러한 과잉은 발생한다. (반대로 남성성의 결핍이 남성성을 대체하기 위해 작위적으로 만들어낸 결과물을 마초라고 한다. 권위적 모성과 마초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그것들은 남성성의 거짓대체물에 불과하다.)


이것은 가장 권위적인 독재자의 양상을 띤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모든 것을 허용하고 품어주는 자비의 화신처럼 위장된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오히려 권위적인 독재자를 비판하는 입장에 선다.


대체로 한 가정 내에서, 아빠를 독재자의 모습처럼 그려낸 뒤 비판하며, 아빠처럼 살면 안된다는 명분을 대의로 삼아 자식을 자기 뜻대로 통제하려는 엄마의 모습이 이와 같다.


형식주의의 폭력성은 이처럼 내용을 형식 안에 가두어 내용이 독자적인 고유성을 상실하도록 만든다.


형식의 울타리 안에서 그 안에 담긴 내용을 키워주는 것 같지만 결코 형식 자신만은 넘을 수 없도록 제약한다.


장르문법의 폭력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러한 형식주의 속에서는 누구도 새로운 내용을 만들려 하지 않게 된다.


그. 생.존.이. 위.협.받.는. 까.닭.이.다.


그러니 늘 동일한 형식만이 반복된다. 그 안에 담긴 내용이란 언제나 형식이 권장하는 '착한 아이' 같은 모방품일 뿐이다.


모방의 모방만이 이루어지는 현실은 권위적 모성의 형식주의가 지배함으로써 창조의 힘이 퇴락한 징후다.


인간의 퇴행이다.


내용을 '실존'이라고 다시 말할 수 있고, 형식을 '관계'라고 다시 말할 수 있다.


실존이 없다는 것은 '씨'가 없다는 것이다.


관계가 없다는 것은 '땅'이 없다는 것이다.


옛날 중국의 홍인선사는 이러한 게송을 노래했다.


"정이 있어 씨를 뿌리니 땅이 있어 열매가 맺네. 정이 없으면 씨도 없으니 깨달음도 삶도 없네."


자기 자신이라고 하는 씨는 땅이 없으면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시작하지도 못한다. 그러니 자기 자신을 깨닫고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일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땅은 이 귀한 씨를 키우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라는 씨가 세상과 연결되고 소통될 수 있도록 씨를 수육한다. 그럼으로써 땅은 자기 자신을 깨달음의 삶으로 이끈다.


이로 말미암아 이제 땅은 꽃밭이라고도 또는 포도밭이라고도 불리게 된다. 가장 멋진 꽃을 피우고 가장 훌륭한 열매를 맺어낸 옥토로 새롭게 알려진다.


여성성[형식-관계-땅] 속에서 남성성[내용-실존-씨]은 비로소 무르익을 수 있고, 남성성[내용-실존-씨]을 담음으로써 여성성[형식-관계-땅]은 더욱 커질 수 있다.


이것이 창조의 원리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다.


그러나 이 당연한 얘기가 오늘날에는 당연하게 이루어지지 못한다.


어느 정도 뻔하게 예상가능하고 그에 따른 효과도 예측가능한 형식주의를 정말로 벗어나고자 하는 내용은 자동으로 검열되기 때문이다.


형식을 깨는 내용은 철저하게 소외된다. 대중은 권위적 모성의 기능을 잘 수행한다. 땅에 심어져야 할 씨를 임의적으로 선별해 통제하고자 한다. 관계를 잘 하고 형식을 잘 지키는 윤리적인 씨만이 이 땅에서 사랑받으며 자라날 자격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니 씨들은 우울하다.


민들레씨앗은 자유로운 바람에 날려 더는 흩뿌려지고 싶지 않다.


마음씨가 아름답게 써지는 일은 갈수록 어렵다.


출산율은 나날이 감소하며, 창조의 의욕은 하루가 다르게 감퇴한다.


그렇게 창조의 원리가 힘을 발휘하지 못하니, 인생이 재미가 없다. 마릴린 맨슨이 노래한 것처럼, 이 인생들은 모방품의 복제품들일 뿐이다. 그렇게 경험된다.


분명 총체적인 난국이지만 답은 의외로 쉽게 드러나 있다.


문제는 내용과 형식의 조화이며, 지금은 형식의 중요성만이 지나치게 과잉되어 있는 때다.


이제는 내용에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


"누구나 다 자기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라는 그 형식의 평등이 아니라, 그만이 말할 수 있는 결코 모방되거나 대체될 수 없는 그 '내용의 독자성'이 우리에게 정당히 평가될 자유가 필요하다.


내용을 다시 한 번 '존재'라고, 또 형식을 '언어'라고 묘사해볼 수 있다.


존재는 반드시 자기 자신의 '대체불가능성'을 알리고자 언어를 깨고 나아가려 한다. 존재가 그러지 못하도록 언어를 존재보다 중요한 것으로 세워 존재를 억압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독재다.


모방은 현재 어떠한 독재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방증이다.


언어의 독재에 의해 우리 자신의 존재가 임의적으로 통제되기에, 그렇게 우리 자신이 한낱 모방품으로 몰락되어버리기에, 우리는 마음의 고통을 경험한다. 이것은 심리학적 사실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존.재.의. 자.유.다.


그러나 이 존재의 자유가 현실사회에서 실현되기 위해서는 언어의 정성스러운 도움이 필요하다.


우리는 지금 언어를 비하하며 "껍데기는 가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하고 있다.


"껍데기여, 존재를 칭칭 동여맨 압박붕대가 아니라, 존재를 감싸줄 따듯하고 어여쁜 홑이불이 되어주어라."


그러면 언어를 넘어서고자 하는 존재가 자유롭게 커져가는 만큼, 그것을 감싸고 있던 언어 또한 자연스럽게 함께 커져간다.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 바로 시(詩)다.


남성성과 여성성의 조화는 그 자체로 시다.


이 우주에서 가장 거룩하고 아름다운 기적의 선물이다.


인.간.은. 이. 우.주.의. 시.가. 되.기. 위.해. 태.어.났.다.


그러기 위해 그 한몸에 남성성과 여성성을 다 갖추었다.


이미 가장 멋진 것으로 창조된 것이, 더욱 멋진 것으로 자기 자신을 창조해갈 모든 조건을 이미 다 가졌다.


시작(詩作)만 하면 된다.


자신만의 내용인, 자신만의 실존이, 자신만의 씨로, 그 자유로운 존재가 바람을 타고 무엇보다 앞서 날아가게 하면 된다.


형식주의가 좋아할 인기있는 것만이 땅에 안착해 열매를 맺을 자격이 있지 않다.


이 우주는 인기투표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 우주는 여성성을 위한 단 하나의 남성성과, 남성성을 위한 단 하나의 여성성이 서로를 좋아하는 그 하나의 사랑으로 만들어졌다.


자신이 단 하나뿐인 자신을 좋아해볼 이 창조의 기적이 우리에게는 정말로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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