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심리학 #15

"생존을 넘어 우리는 갈 수 있을까"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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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들 오해하는 것이지만, 언어 자체에는 아무런 힘이 없다. 이 삶은 언어로 된 프로그램이 아니다.


그러나 프로그램이라고 말할 수는 있다.


이것은 생존프로그램이다. 유전자가 이 프로그램을 관장한다.


곤충들의 생태를 관찰해보면 그들이 AI처럼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무리 정교해보이는 행동이라도 그것은 유전자에 의해 프로그래밍되어 있는 것이다.


본능대로 산다는 것은 프로그램대로 산다는 것이다.


주(呪)라는 개념이 있다. 저주, 주술 등의 표현에 쓰이는 그 주다.


이것은 본능이 작동하는 '밑바닥'의 차원에서부터 언어가 작동하도록 획책해보려는 발상의 표현이다. 인위적인 언어로 DNA의 문법을 조작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본질적으로는 불가능한 발상이다. 인간에게 아무리 "날개를 가져라."라고 언어를 주입한다고 생물학적으로 날개가 돋아나지는 않는다.


그래서 대부분의 주는 다 판타지소설이지만, 그래도 우리의 현실에서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주가 있다.


그것은 바로 도덕이다.


도.덕.은. 우.리.에.게. 또. 하.나.의. 본.능.처.럼. 작.동.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도덕은 생존을 보장하거나 또는 위협하는 이야기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를 따라 살면 너는 더 돈을 많이 벌고 건강해질 것이며, 저 이야기를 따르면 너는 가난뱅이로 비참하게 병들어 죽게 될 것이야."


이것은 모든 도덕의 한줄요약이다.


결국 도덕이라고 하는 주(呪)는 생존을 관장하는 본능의 권세를 빌려와 자기에게 그 힘이 있는 것처럼 위장하고 있는 언어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프로이트의 방식으로 묘사하자면, 이것은 리비도의 힘을 자기의 것처럼 과시하고 있는 자아의 모습이다.


그래서 사실 최면이나 세뇌 등의 언어적 주술에는 그 자체로는 아무런 효과가 없다.


그것들이 돈을 더 많이 벌게 해주고 건강을 증진시켜 준다는 '생존의 약속'을 보장하고 있기에, 사람들은 그 내용에 동의해 최면과 세뇌에 걸린 척해주고 있는 것뿐이다.


또한, 그것들의 내용에 동의하지 않으면 어느 심야에 몰래 죽창으로 찔러 죽인다기에, 사람들은 일부러 모른 척 최면과 세뇌에 걸린 것 같은 그림을 만들어주고 있는 것이다.


"이 최면활동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나면, 이후 당신은 거지가 되어 서울역에서 빌어먹고 살다가 폐렴에 걸려 홀로 쓸쓸히 고통 속에서 죽게 될 것입니다."


이러면 이 세상의 누구도 절대로 최면에 걸리지 않는다.


돈을 많이 벌게 해준다니까 "어어... 선생님! 놀라워요! 제 손이 막 혼자 움직이고 있어요! 제 과거의 묵은 트라우마가 해결되었어요!"라고 해주고 있는 것뿐이다.


이야기는 도덕적 기능을 위해 만들어졌다. 일진들이 나와 치고받고 싸우는 유치한 웹툰조차도 이 도덕기능을 수행한다. 정의의 '착한 일진'을 통해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더 잘 생존할 수 있는지를 제시하고자 한다.


이처럼 모든 이야기는 그 자체로 주(呪)다.


생존을 관장하는 '근본있는 힘'인 것처럼 위장해 생존을 통제하고자 하는 것이 이 주가 활용되는 목적이다.


그리고 주에 걸린 우리는 정말로 이야기가 우리의 생존을 좌우할 수 있는 신적인 소재인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


생명의 근본에서 작동하는 본능의 권세를 일부 빌려왔을 뿐인 이야기가, 마치 그 힘의 주인인 것처럼 착각되는 역전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처럼 언어가 생명의 위에 서게 된 것이 인류의 비극이다.


이것은 '가짜 왕'이 지배하는 현실이다. 가짜 왕은 어리석은 본능의 생존프로그램을 지혜로운 언어적 프로그래밍을 통해 밑바닥부터 다시 바꿀 수 있다고 말하며, 언어와 그 언어의 주관자인 자기를 더욱 신격화하려고 한다.


이 경우, 삶은 언어에 의해 퇴락한다고 할 수 있다. 언어가 약속하는 먹이에 따라 침을 흘리는 파블로프의 개다.


놀랍게도 지성의 오용 내지 지성의 미발달이 이 퇴락을 촉진한다.


인간과 곤충이 다른 점을 들자면 단연 높은 지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지성의 가장 멋진 기능은 "왜?"라고 질문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우리는 지성을 질문하는 일에 쓰지 않고 오히려 본능을 통제하려는 일에 '하찮게' 활용한다.


앞서 살핀 것처럼, 지성으로 본능을 통제하려는 이 일은 결국 지성이 만든 언어적 프로그램 속에 인간 자신이 가두어지는 감옥의 현실을 출현시킨다. 본능이 아니라 지성을 따라야만 돈을 잘 벌고 건강해진다는 주(呪)는 바로 이러한 자기구속의 방식으로 작동한다.


본능을 따라 산다는 것은 후진 프로그램대로 사는 길이고, 지성을 따라 산다는 것은 그 프로그램을 언어로 해킹하여 더 좋은 프로그램으로 바꾸어 사는 길인 것처럼 곧잘 묘사되곤 한다.


이것이 도덕적 기획이며, 이 기획은 근본적으로 자유를 제약함으로써 개인의 잉여자원을 증대시키기 위한 목적만을 갖는다.


이러한 경우의 지성이란 고작해야 본능보다 더 유능한 '투자상담사'의 역할로만 남을 뿐이다.


우리는 개미를 내려다보며 본능적 프로그램으로만 살아가는 그 모습을 비웃거나 안쓰럽게 여기지만, 우리 자신도 스스로의 지성을 하찮게 오용한 결과, 또는 지성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한 결과, 동일한 운명 속에 있다는 점을 간과한다.


자신의 본능이 두려워 그것을 부정하고자 하는 이가 본능과 지성 사이에 위계를 세우려 한다. 그리고는 지성으로 본능을 통제함으로써 자신이 얼마나 우월한 존재인지를 증명하고자 한다.


본능의 힘이 너무 크게 느껴져 자신이 위험에 처하게 될 것 같이 경험하는 이들이, 그것을 누르고자 지성의 힘을 과잉되게 부풀리는 것이다.


이처럼 가장 본능의 세력이 강한 이들이 지성과 본능을 대립의 구조 속에 넣은 뒤 가장 지성적인 모습처럼 자기를 드러내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지성과 본능의 두 양상은 그저 똑같은 '생존기계'의 모습일 뿐이다.


지성으로 본능을 통제한다고 자신이 무슨 자유로운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다. 본능의 프로그램을 언어로 해킹한다고 매트릭스의 네오 같은 전능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다. 또 본능 대신에 도덕으로 산다고 더 고귀한 영혼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방식들은 다 동일한 생존기계로서의 모습에 불과하다.


지성이 잘 발달한 이들은 이 사실을 이해함으로써 오히려 본능의 도움을 받는다. 프로그래밍되어 잘 깔려진 안정감 있는 레일 위에서 그들은 "왜?"를 묻는다. "어떻게 하면 돈을 더 잘 벌 수 있지?"가 아니라 "왜 지금 돈을 벌어야 하는가?"를 묻는다.


그럼으로써 참된 지성은 주(呪)를 멈춘다. 본능뿐 아니라 잘못된 언어적 프로그램 또한 자신이 건강한 언어로 해주할 수 있다고 말하는 주 중의 주도 멈춘다.


그리고 생명의 자유로운 몸짓만을 그 시야에 드러낸다.


분명하다.


참.된. 지.성.은. 자.유.를. 증.진.하.는. 일.에. 이.바.지.한.다.


뿐만 아니다.


참.된. 본.능.도. 자.유.를. 증.진.하.는. 일.에. 이.바.지.한.다.


본능은 당위적 프로그램이고 지성은 그 프로그램을 해킹하는 자유의 열쇠라는 식의 생각은, 자기 안에 있는 지성과 본능이 분열되어 있을 때 갖는 생각이다.


지성도 본능도 생명의 기능일 뿐이다.


그리고 생명은 그 자체로 자유의 현상이다.


생존의 진짜 의미는 생명 스스로의 본성인 자유를 지속해가는 일이다.


고로 생존은 본질적으로 우리에게 기쁜 일일 수밖에 없으며, 기쁜 일에 다름아니다.


인간에게 높은 차원의 지성이 있기에, 인간은 자신에게 프로그래밍된 이 생존기계의 역사가 기쁜 일임을 파악할 수 있다.


이처럼 지성은 본능을 저열한 것으로 보며 통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본능을 대단히 멋진 것으로 이해하기 위해 쓰이는 것이다.


수행자들은 재미있는 체험을 하곤 한다.


어떠한 모임 중에 잠깐 1초 정도 의식이 끊긴 경험이 있다. 그런데 실제의 시간으로는 2시간이 지나 있다. 주위의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평소와 조금도 다르지 않게 자신이 잘 활동하고 있었다고 보고한다. 물어보면 대답도 잘 하고, 술잔도 잘 비우며, 또 농담도 잘 나누었다고 한다.


자신에게는 2시간 동안의 기억이 하나도 없다. 의식이 없었다. 그러나 너무나 일상적으로 잘 기능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생존기계의 힘이다. AI의 우수성이다.


이 생존기계의 힘을 신뢰하지 못하는 이들이, 언어를 통해 더욱 우수한 프로그램으로 바꾸어 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주장도 그들의 심폐가 위대한 생존기계로서 잘 작동하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생존을 넘어설 수 있는가?


이 말은 두 가지의 방식으로 대답될 수 있다.


첫 번째는 본능의 생존을 넘어 언어와 도덕과 지성의 힘으로 더 많은 잉여자원을 축적해야 한다고 믿는 주(呪)의 방식이다.


두 번째는 본능이 잘 주관하는 생존기계로서의 우리 자신의 모습을 향해 반갑게 웃는 방식이다.


웃.음.은. 웃.고. 있.는. 그. 대.상.을. 넘.어.선. 결.정.적. 증.거.다.


인간은 언제나 웃음을 통해 자기 자신을 초월한다.


초월한다는 것은 곧 초월한 그것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초.월.은. 사.랑.의. 재.귀.운.동.이.다.


인간이라는 생존프로그램은, 그 삶은, 자유를 향한 한결같은 방향성을 갖는다.


그러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알아볼 때, 우리 자신을 향한 사랑은 가득 밀려온다.


이 후자의 방식을 우리는 깨달아 사는 일이라고 말한다.


깨달아 사는 일은 생존을 넘어, 생존하고 있는 자신을 전적으로 사랑해가는 그 일이다.


주(呪)가 아닌 주(主)의 일이다.


내 생명(life)을 가장 사랑하는 내 삶(life)의 주인된 자가 사는 방식이다.


우리는 이 방식으로 계속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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