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심리학 #16

"가스라이팅과 양육"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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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불을 어둡게 한다. 자신을 잃게 한다. 가스라이팅이다.


등불을 밝게 한다. 자신을 잃게 한다. 양육이다.


가스라이팅과 양육은 한 끝 차이인 것이 아니다. 그 둘은 같은 것이다.


이 집에서는 양파를 갈릭이라고 부르기로 했고, 뜨거운 것을 시원하다고 말하기로 했으며, 어두운 불빛을 밝다고 하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임의적으로 구성한 이 집의 규칙에 따르면 친절한 보호 속에 생존과 번영을 보장해주겠다고 한 것이다. 하다못해 살려는 드릴게, 라고 한 것이다.


이것이 가스라이팅이고, 이것이 양육이다.


좋은 양육과 나쁜 양육이 있으며, 그 중에서 나쁜 양육이 가스라이팅이 되는 것이 아니다. 착한 일진은 양육하고, 나쁜 일진은 가스라이팅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양육은 가스라이팅이다. 피양육자를 지배해야만 성공적인 양육은 이루어질 수 있다. 고양이를 밖에 나가지 못하게 강제해야만 로드킬과 진드기로부터 고양이를 보호할 수 있다. 이것은 양육이라는 활동의 불가피한 속성이다.


그렇기에 자신이 어린 시절 좋은 양육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이가 좋은 양육자의 꿈을 품고 다른 이에게 좋은 양육을 해주려고 할 때, 그는 반드시 가스라이터가 된다. 누구보다도 '선의'로 완전한 지배력을 행사하려 하게 된다.


애초에 지배하지 않는 양육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 지배권을 포기한다는 것은 양육관계의 해체를 의미한다.


재미있는 점은 지배자뿐만 아니라 피지배자 또한 지배의 현실에 함께 동의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SM 관계에서 대표적으로 잘 드러난다.


피지배자는 지배자가 자신을 다 책임져주기를 바란다. 그럼으로써 피지배자는 스스로를 책임져야 하는 그 과업으로부터 놓여난 해방감을 경험한다.


지배자는 피지배자를 다 책임져주려고 한다. 그럼으로써 지배자는 남을 책임지려는 일을 하는 동안 스스로를 책임져야 하는 그 과업으로부터 놓여난 해방감을 경험한다.


자.신.을. 책.임.지.고. 싶.지. 않.은. 이.들.이. 이.처.럼. 지.배.관.계.를. 함.께. 구.성.하.는. 동.업.자.가. 된.다.


책임이라는 것으로부터 이처럼 다들 도망가고 싶어하는 이유는, 책임이 무엇인지에 대한 착각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책임을 옳고 그름의 도덕의 차원에서 생각한다. 자신을 책임진다는 것은 소위 말해 '똑바로 산다는 것'을 뜻한다고 가정된다.


이 일은 힘들다.


우리 모두는 한 번 이상씩은 다들 해보았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은 똑바로 사는 일이다.


도망가고 싶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진짜 책임이라는 것은 이러한 도덕의 무게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 등불은 지금 어두운가, 밝은가?


등불의 밝기를 똑바로 인식하는 일은 스스로를 책임지는 일과는 전적으로 무관하다.


어떠한 밝기가 올바른 것인지를 규정하는 것은 스스로에게 귀속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언제나 그 등불의 밝기가 올바른지를 우리에게 묻고 있는 임의적 주체에게 귀속된 것이다. 그가 자신의 권위를 증진시키기 위해 우리에게 밝기의 올바름에 대한 '답정너의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폭로한 니체는 진실로 마음의 천재였다.


올바른 등불의 밝기에 대한 정답은 우리 안에 결코 있을 수 없다. 그러니 그것을 제대로 모르는 일이 우리의 책임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스스로 선택하는 일이다.


이 등불의 밝기가 우리 자신에게 적합한지 아닌지를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아무리 어두워도 자신에게 좋다면 그것은 정말로 자신에게 좋은 것이다. 아무리 밝아도 자신에게 좋지 않다면 그것은 정말로 자신에게 좋지 않은 것이다.


좋은가, 싫은가?


이것은 삶의 기초적인 질문이다.


자신만이 대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 질문에 대답할 때 우리는 비로소 자신이 된다.


이것이 나로서 성숙해진다는 것이다.


나로 사는 이는 남들의 권위를 세워주기 위한 옳고 그름을 따라 살지 않고, 자신에게 적합한 좋고 싫음을 스스로 선택해서 산다.


가스라이팅과 양육에서 벗어난 이의 이름이 바로 나다.


나.는. 나.의. 좋.고. 싫.음.을. 책.임.지.는. 가.장. 멋.진. 일.을. 한.다.


훌륭한 양육자가 등불의 밝기에 대한 도덕적 문제를 출제할 때, 나에게는 "나는 이 밝기가 참 좋다."라고 말할 수 있는 힘이 있다.


유능한 가스라이터가 밝은 조명빛 아래 선 무대의 인기인이 되게 해준다며 몸을 지배하려 할 때, 나에게는 "나는 냄새나는 네 몸이 정말 싫어."라며 밀쳐낼 수 있는 힘이 있다.


더 멋진 일은, 나는 양육자와 가스라이터에게 역으로 되물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너는 어떤 밝기가 좋으냐?"


늘 양육자와 가스라이터로만 살던 이에게 이 질문은 낯선 것이다. 머리가 멍해진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또 무엇을 싫어하는지의 가장 기초적인 자기이해조차 그에게는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남들에게 올바름을 알려주려는 양육자가 되고 가스라이터가 되는 좀 코미디 같은 현실이다.


깨달음의 문제도 정확하게 이와 같다.


가장 높은 양육자가 되어 사람들을 빛으로 양육하는 일을 깨달음이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이 마음에도 빛을 비추어주고, 저 마음에도 빛을 비추어줌으로써 모든 마음이 다 동등하게 무대 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주인공이 되게 해주는 일을 깨달음의 일이라고 간주하는 이가 있을 때, 그는 반드시 가스라이터다.


한 노스님이 공양보살님에게 반찬투정을 한다.


"아 내 호박 진짜 싫어한다코 주지 말랬는데 왜 자꾸 호박을 주소!"


깨달은 이가 하는 말이다.


분별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깨달음이 아니라, 분별을 깨닫는 것이 깨달음이다.


깨달음은 자신이 싫어하는 모든 것을, 그것도 온전하다며 올바른 모든 것으로 바꾸는 일이 아니다. 이것은 통돌이 세탁기의 일이다.


깨달음은 자신이 어떤 것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그 경계를 이해하고 존중하며 사는 방식이다.


모든 것을 품어주는 가장 거대한 지배력의 행사가 아니라, 바로 이렇게 살 권리가 인간에게는 있다는 그 자유의 행사다.


나로서 성숙해지는 삶은 자신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만큼 자유가 증진되는 이 현실로 드러난다.


이것이 자신을 책임진다는 것의 진짜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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