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심리학 #17

"스토리텔링 호신술"

by 깨닫는마음씨


art-toon-joosen-11-805x805.jpg?type=w1600



스토리 때문에 깨닫지 못한다는 말은 여러 층위에서 성립되는 말인데, 일차적으로는 스토리를 통해 우리가 자신을 숨기기 때문에 그러하다.


야훼가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부를 때, 아담이 나뭇잎 대신에 자신의 알몸을 가리고 나온 소재가 바로 스토리다.


니시카와 미와 감독의 영화제목처럼 심리학적으로 스토리는 대개 '아주 긴 변명'에 가깝다.


어떤 맥락에서는 자신을 변명하기 위해 발달시킨 것이 스토리텔링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아이였을 때나 어른이 되었을 때나, 엄마 앞에서나 직장 상사 앞에서나, 스토리텔링이 가진 이 '호신술'로서의 기능은 크게 기대된다.


우리가 혼나지 않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인과관계를 잘 조직해서 자기는 그 상황에 관련되지 않았다는 논리적인 스토리를 조리있게 설명하면 된다. 알리바이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인생에서 자기의 책임은 없고 다 남들이 잘못했다며 도망만 다니던 아이들이 이러한 스토리텔링의 기능을 자주 발달시키게 된다.


이것은 화분을 깨트린 자기 대신에 동생이 혼나고, 자기는 오히려 모범적이고 착한 아들로 엄마에게 칭찬도 받게끔 만들어준, 그야말로 마법이었던 까닭이다.


특히나 정죄하고 심판하는 신경증적 엄마가 만드는 도덕강박적 분위기 속에서 늘 가슴이 쫄리는 죄책감을 자주 경험해온 불우한 아이들에게 스토리텔링 능력의 발달은 두드러진다.


그래서 이것은 하늘로부터 받은 천재적인 재능 같은 것이 전혀 아니다.


자기만은 혼나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었던 그 노력의 산물이다.


어떠한 이들이 스토리텔링에 집착하는 이유는 그것이 자연스러운 재능이 아니어서다. 붙잡지 않으면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자기를 지켜줄 호신의 수단이 사라진다.


이들에게는 스토리텔링이라는 것이 재미의 소재가 아니다. 혹독한 겨울의 생존을 위해 악으로 버티는 군고구마통이다.


늘 스토리텔링의 재미를 예찬하지만, 정작 자기는 재미있지 않다. 재미있게 살고 있는 척 속이려 해봐도 몸은 알 수 없이 무겁다.


재미를 느낄리가 없다.


엄마에게 늘 거짓말을 해서 엄마를 속이고, 자기의 형제자매를 고통받게 하는 일에 재미를 느끼는 이는 없다.


인간의 몸은 이렇게 만들어지지 않았다.


인간의 몸은 억지로 공감하려 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공감되도록 만들어졌다.


남에게 고통을 전가하고는 자기의 몸만 편하게 살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스.토.리.텔.링.을. 아.무.리. 해.도. 몸.은. 속.일. 수. 없.다.


몸은 그 자체로 인과응보이며 권선징악의 원리로 작동한다. 이것은 도덕법칙이 아니라 자연법칙이다. 자연스러운 사이클이다. 자기가 버린 것이 자기의 입으로 들어오는 당연한 원리다.


이처럼 스토리텔링이라는 것을 자기를 변명하는 일에만 오용할 때 핵심적으로 드러나는 증상이 있다.


남.에. 대.해.서.는. 스.토.리.텔.링.하.지. 못.한.다.


정당화하고, 변명하고, 과대포장하는 방식으로 자기 자아를 위한 스토리만을 쓸 수 있지, 남을 위한 스토리를 쓰는 일은 불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스.토.리.텔.링.의. 진.가.는. 남.의. 인.생.을. 이.야.기.할. 때. 생.기.는. 것.이.다.


자기 자아가 아닌 남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곧 인간을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인간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의미있는 스토리텔링이 된다. 의미가 담겨 있으니 그 의미를 발견하는 재미가 함께 생겨난다.


이 재미와 의미는 독자가 인간을 탐구해가는 깨달음의 길을 향해 시선을 돌릴 수 있도록 스토리텔링이 조력할 수 있는 가장 멋진 소재다.


그러나 반대로, 머릿속에서 계산기를 두들겨 낱말들을 조합해내고 내러티브를 구성함으로써 기대하고자 하는 모든 결과가 "나는 잘못하지 않았어요."로 수렴될 때, 이것은 영영 깨달음과 멀어지는 일이 된다.


스토리의 오용으로 인해 깨달음과 멀어진 이들이 대신 채택하는 것은 '깨달음의 스토리'다.


이것은 "나는 잘못하지 않았어요."의 스토리에 응답하기 위해 쓰인 "그런 너도 온전하단다."의 스토리다.


이 '깨달음의 스토리'를 소비함으로써, 깨달음과 멀어진 이들은 스토리의 힘으로 자신이 깨달은 척하는 일을 자주 한다.


'스토리텔링 자위'라고 말할 수 있다. 호신술의 변종이다.


자위 후에는 현자타임이 찾아오며, 그 순간에는 지혜로운 척도 해볼 수 있고, 엄마에게 칭찬받은 아이처럼 세상 무서운 것 없이 활개쳐볼 수도 있다.


버프의 효과가 풀리면 쿨타임을 기다렸다가 다시 자위를 시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또 좋은 상태가 찾아오는 것 같다.


하지만 몸은 속일 수가 없다.


자위중독이 되면 몸이 피로하다.


내 꼬츄를 지켜달라며 시작한 호신의 일이, 역으로 꼬츄를 아프게 만든다.


스토리텔링이 만들어낸 강렬한 자아도취감 속에, 자기의 고간에서 발기차게 우뚝 솟아있는 것이 핵폭탄처럼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핵폭탄은 호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


특히 분열을 통해 자아가 에너지를 얻는 방식은 모두의 몸이 피로해진다.


핵융합 발전은 가능한가?


서로를 반목하는 타자들이 만나 하나로 사랑하는 기적을 이루는 일은 가능한가?


이것은 꿈의 에너지이며, 꿈의 스토리텔링이다.


우리가 자기 자아에 대한 긴 변명이 아니라, 어설퍼도 남을 말해야 하는 이유다.


인류사에서 가장 멋진 스토리텔링들을 기억해보자.


그.것.들.은. 다. 남.을. 위.해. 쓴. 것.이.다.


타자의 삶을 지켜주고, 증언하며, 그 삶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기 위해 쓰인 것들이다.


스토리텔링은 자아를 위한 태극 1장 호신술이 아니라, 타자를 위한 가장 깊은 축복의 기도다.


우리가 가장 숨기고 싶었던 것 또한 타자를 향한 이 지향성이다.


절대적 타자 앞에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영 수줍기만 했던 아담의 심정이다.


그러나 거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은 명령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운명이라고 바꿔 말해보자.


타.자.는. 나.의. 운.명.이.다.


나는 운명적으로 너에게 끌리고 있었던 것이고, 그렇게 너를 만나고 싶었던 것이다.


기나긴 자기변명의 스토리 속에 아무리 자신을 숨기려 해왔어도 더는 이 운명을 숨길 수가 없다.


나는 너에게로 나아가고 싶고, 너에게 나이고 싶다.


말한다.


"엄마, 화분 실은 현래가 깬 게 아니라 제가 깼어요."


깨진 것은 화분이 아니다.


깨진 것은 스토리다.


스토리를 '깨고' 너에게 '닿았다.'


그런 나를 깨달았다.


핵융합이 시작되고 그 빛이 찬란하다.


이런 고귀한 인간의 역사를 증언하는 이가 있어, 그를 스토리텔러라고 말한다.


자아의 스토리가 깨진 자리에서, 타자를 위한 진짜 스토리텔링은 시작된다. 이것은 깨달음에 좋은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깨달음의 심리학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