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하지 않는 깨달음"
우리 사이에 시비가 붙는 것은 서로가 다르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시비를 가리게 되는 것은 분별심 때문이 아니다.
오.늘.날.의. 우.리.는. 통.합.심. 때.문.에. 시.비.가. 생.긴.다.
남의 것을 자꾸 자기의 것과 통합하려고 한다. 이것은 우리가 시비를 거는 방식이다. 이렇게 시비를 거니 자기도 계속 시비에 걸리게 된다.
그러나 통합을 추구하는 이들은 자기가 시비를 걸고 있다는 자각이 없다. 오히려 모든 이는 통합을 원하고 있으며, 자기는 그 인류의 소망에 이바지하는 좋은 사람인 것처럼 스스로를 간주한다.
통합의 첫 번째 문제는 이처럼 그것이 사실 폭력이라는 사실에 대한 자각이 또는 병식이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 문제는 통합의 근본적 불가능성은 차치하고서라도, 통합할 깜냥도 되지 않는 이들이 통합하려고 하는 것이다.
남의 것을 통합한다는 것은 정말로 무슨 의미일까?
그. 사.람.의. 구.체.적.인. 인.생.을. 그. 사.람.보.다. 더. 잘. 안.다.는. 말.이.다.
이런 깜냥을 가진 이는 애초 그 누구도 없다.
이것은 나쁜 짓이다. 우리가 인간을 무시하는 데 가용할 수 있는 거의 최고로 나쁜 짓이다.
이 세상에 근본적인 나쁜 놈은 없다고 말할 수 있지만, 나쁜 짓을 하면 나쁜 놈이 된다.
서로 다른 것들이 똑같이 평등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통합의 울타리가 필요하다며, 나쁜 놈은 가장 선량한 목자의 흉내를 낸다.
그러나 이들이 정말로 말하고 있는 것은 지배다.
남의 것이 가장 정당한 자리에 있을 수 있도록 통합하려는 것이라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 이들이 만든 통합의 구조 속에서는 언제나 남의 것은 자기의 것보다 밑에 놓이게 된다.
가령, 언어가 존재보다 위에 있다느니, 이야기로 존재를 보충한다느니 등과 같은 말들은 자기의 것이 더 '상위의 원리'임을 획책하고 있는 말들이다.
자기의 것으로 남의 것에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며, 남의 것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나쁜 짓 속에, 멀쩡한 언어와 이야기 같은 중립적 개념들만 나쁜 것이 된다.
나쁜 놈이 독재의 도구로 써서 나쁜 것이 된 것이다.
나쁜 놈에게 시비가 걸리는 이유는 나쁜 놈이 시비를 걸고 있어서다. 그러나 자기는 시비를 건 적이 없는 것처럼 시치미를 뚝 떼는 것이 또한 이 통합적 주체의 보편적인 모습이다.
히틀러도 주변 국가들에 시비를 건 적이 없다. 정당한 '진리의 일'을 했을 뿐인데 오히려 시비가 걸린 것이다. 지하철에서 뜨겁게 천국과 지옥을 외치는 이들도 결코 시비를 건 적이 없다. 자신은 단지 '진리의 집행자'였을 뿐이다.
통합적 주체들은 2차대전 이전의 감각으로 살아간다.
이것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통합할 수 있는 최고의 객관적 진리가 있다는 망상에 근거한다.
근대적 사유라고도 말한다.
근대적 사유로 살아가는 통합적 주체들은 전근대성을 곧잘 비판하곤 한다.
사람들이 얼마나 초딩처럼 자기만 아는 1차원적인 방식으로 살아가는지를 지적하며, 자기와 상대의 양극성을 함께 알아봐주고 그것들을 통합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역설한다.
이렇게 말하는 통합적 주체들은 자기가 대단히 똑똑한 줄 안다.
물론 초딩에 비해 그럴 수 있다. 그들은 중딩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저 악명높은 '중학교 2학년'이다.
인류는 지금 대학생이 되어 있는데, 이 중학생들은 대학생들 앞에서 똑똑한 척을 하며 고루하고 촌스러운 이야기들로 인생을 가르치려 든다.
우리의 실제적인 성장사를 떠올려보자.
고등학생만 되어도 통합하려고 하지 않는다. 심리학적으로도 이 시기의 발달과업은 '개별화'이다. 가정 내에서 자기를 통합하려는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것이 당연한 생리다.
대학생이 되고, 이제 본격적인 성인기에 접어든 이는 나로 산다. 이것은 실존주의적 현실이다.
나는 대체불가능한 것이다. 대체불가능하다는 것은 통합될 수 없다는 단순한 의미다.
그러면 이제 중년기와 노년기에 접어들었을 때 통합을 이루는 것인가? 나로 잘 성장했으니, 이제 '나들'이 모여 무적의 합체로봇을 이루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인간이 나로 성숙되어 가면 이제 '하나'를 깨닫는다. 이 '하나'는 통합적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선불교의 연구자인 니시타니는 아주 탁월한 표현을 쓴다.
하.나.는. 자.체.다.
'자체'는 일종의 프렉탈 구조와 같은 것이다.
작은 개인인데, 그 안에 우주가 다 있다. 개인이 이미 우주와 동일하다. 자신에게 다 갖추어져 있고, 그러한 자신이 우주로 작동하고 있다.
그러니 더욱더 통합되어야 할 필요가 없으며, 통합되어야 할 것이 없다.
개.인.은. 하.나.의. 신.성.한. 우.주.다.
이 우주를 통합하고자 시비를 거는 일은 우주전쟁을 벌이자고 하는 것이다.
물론 중2병에 걸려 있으면 자신이 우주의 민주적 제왕이 되어 은하영웅전설을 쓰려는 야심을 품기도 한다. 표현 그대로, 중학생이나 하는 일이다.
중학생은 초등학생만을 돌아보며 자기가 잘난 줄 알고, 근대성은 전근대성만을 돌아보며 자기가 잘난 줄 안다.
이렇게 과거만을 붙잡고 있는 일이 바로 미발달이다.
미발달 자체는 아무 잘못이 아니지만, 미발달의 상태를 드높은 권위처럼 상대에게 강요할 때 그것은 나쁜 짓이 된다.
무식한 것은 죄가 아니지만, 무식함으로 남에게 시비를 걸면 그것은 폭력이다.
오늘날 근대성은 후기근대성의 용어들을 빌려와, 자기가 최신인 척한다. (물론 후기근대적 용어들도 결코 최신이 아니다.)
보편적인 진리는 폭력이었고, 이제는 사람들 각자에게 상대적인 진리가 있으며 그 진리들은 다 고유하게 동격의 진리로서 존중되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을 곡해하면 이렇게 된다.
이것은 그냥 "아빠 말만 진리가 아니고, 나에게도 나만의 진리가 있다구욧!"이라는 중학생의 발화다. 눈앞에 있는 것을 열심히 해야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아빠에 대해, 자기는 유튜브를 통해 백만장자가 되어 미녀들을 거느리고 살 거라고 말하고 있는 중학생의 모습이다.
더 핵심적인 문제로는, 여기에는 여전히 근대적 주체가 있다.
저.마.다.의. 진.리.들.을. 공.정.하.게. 다. 알.아.봐.주.어.야. 한.다.는. 그. 주.체.가. 있.다.
자기가 다 알아봐주는 일, 그럼으로써 진리가 진리성을 용인받게 되는 일, 이것이 바로 근대적 주체의 핵심내용이다.
이 기제를 근대적 인식론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자기가 다 보고 있는 주인공을 묘사한다.
결국 이는 이러하다.
사람들 각자를 다 주인공이라고 인정해주는 척하지만, 그들이 다 주인공임을 알아봐주는 자기는 그 중에서도 좀 더 진정한 주인공의 격을 가진 진주인공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통합의 실체다.
통합을 주장함으로써 통합적 주체는 그러한 주장을 한 자기가 가장 주인공이 될 수 있기를 꿈꾼다.
머리를 많이 굴린 중학생의 일이다. 그리고 아무리 머리를 굴려봤자 중학생인 일이다.
좀머씨는 중학생들에게 말한다.
"제발 날 좀 그냥 내버려 두시오."
다른 것을 그냥 좀 내버려 둘 수는 없는가?
다른 것도 진리라며, 자기가 그 진리성을 알아봐주려는 일을 그만 할 수는 없는가?
이해하고 수용한다는 이름의 폭력을 관둘 수는 없는가?
다른 것은 존중 속에서 통합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존중한다는 그 건방진 행위가 그 앞에서 포기되어야 하는 것이다.
타.자.는. 존.중.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경.외.되.어.야. 한.다.
중학생들은 타자를 만나 인실좆을 경험하며 발달의 과업을 이루게 된다.
인생이 정말로 실전이라는 것을 좆만이들에게 깨닫게 해 준 것이 2차대전의 사건이고, 얼마 지나지 않았다.
인류는 빠르게 대학생이 되어 갔지만, 그때 중학교 시절 일진일 때가 좋았다는 의도적 미발달의 고집은 어디에나 남아 있는 법이다.
이 시대착오적 정신이 지구촌의 전쟁으로도 모자라, 우주전쟁을 벌이기 위해 타자라는 우주에 시비를 건다.
이처럼 시비는 통합심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다.
시비를 일으키는 분별심을 극복하는 것이 통합이 아니라, 통합 자체가 가장 큰 분별심이다.
우리에게 어떠한 것이 정말로 분별할 수 없으며 곧 대체할 수 없는 경외감으로 다가온다면, 우리는 감히 그것을 통합하려는 엄두도 내지 못한다.
우리는 다만 이렇게 감격할 뿐이다.
"와, 대단하다!"
인간이라는 타자의 우주는 이처럼 대단한 것이다.
깨달음은 이 인간을 향한 경외감을 회복하는 감수성 속에 있다.
통합하지 않는 것이 깨달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