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끝을 꿈꾸어본다"
고통이란 무엇일까?
절.대.적.인. 것.이. 상.대.적.인. 것. 안.에. 갇.힌. 것.이. 고.통.이.다.
이 고통을 끝내기 위해 지금껏 깨달은 이들은 일해왔다.
붓다는 상대적인 것으로부터 오는 모든 인간의 고통을 없앨 수 있는 법을 찾겠다고 집을 떠났고, 예수는 우리로부터 실종된 절대적인 것과의 다리를 다시 놓기 위해 광야로 들어섰다.
그래서 깨달음은 역설적이다.
고통을 통해 깨닫는 계기가 만들어지지만, 깨달은 이는 사람들이 고통받지 않을 길로 안내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 길이 맞다. 깨달음은 근육트레이닝이 아니다. 더 많이 자신을 고통스럽게 함으로써 더 높은 경지에 올라서는 일이 아니다.
"내가 쓸데없이 내 몸만 괴롭혔구나."라는 붓다의 탄식은 정말로 맞다. 애초 받지 않아도 되었던 고통이었다. 깨달음은 고통의 가치를 깨닫는 것이 아니라, 고통의 무의미성을 깨닫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학.대.의. 동.물.이.다.
자신을 학대하는 이는 반드시 타인도 학대하게 된다.
이 학대의 무대는 바로 '관계'라고 불린다.
오늘날 고통의 양상은 분명하게 이처럼 말할 수 있다.
'있는 그대로의 존재(being itself)'가 '관계' 안에 갇힌 것이 고통이다.
관계는 가장 상대적인 것이다. 가장 상대적인 것은 다른 상대적인 것들보다 우월한 입지를 점하기 위해 스스로를 절대적인 것으로 내세운다. 이것을 우상화라고 말한다.
관계는 오늘날 가장 우상화되어 있는 것이다. 신적인 소재처럼 우리에게 권위를 행사하며, 우리를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그 안에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종속시킨다.
우.스.꽝.스.러.워.진. 모.든. 것.은. 학.대.받.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장 신성하게 간주하고 있는 관계는 실은 학대의 장이었다.
이 한반도라는 땅에서 언제나 가장 학대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아이들이다. 그리고 아마도 너무나 듣기 싫은 말이겠지만, 아이들을 가장 학대해온 것은 그들의 엄마다.
엄.마.도. 그.렇.게. 학.대.받.으.며. 자.란. 아.이.였.기. 때.문.이.다.
선비정신의 고고함은 엄마들의 고통받음 위에 세워졌다.
무엇보다 서러운 것은 엄마들 스스로가 이 부조리한 구조에 자발적으로 동의해 학대의 역사를 이어갔다는 것이다.
이 또한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의 범주에 들어간다.
집단무의식이 만든 구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그 구조에 대한 책임은 한 개인이 짊어지기에는 너무나도 과중한 것이었다고 말하는 일은 가능하다. 그러나 그렇게 애써 말할 필요는 없다. 이것은 누군가에게 책임을 물리려는 일이 아니다.
또한 "그래. 모든 것은 다 구조가 나쁜 놈이지."라며 실체없는 구조를 비난한 뒤, 이제는 함께 노력해서 구조를 바꾸어야 한다는 방식으로 또 한 번 구.조.의. 중.요.성.을. 강.화.하.려.는. 것.이 아니다.
구조라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관계다.
나쁜 관계를 극복하고 좋은 관계를 만들어가자는 이 대안적 기획이야말로 관계가 인간을 종속시키는 대표적인 술책이다. 이러한 방식으로는 언제나 관계만이 더욱더 신격화되어갈 뿐이다.
관계를 잘 하려고 하는 우리의 모습을 떠올려보자.
늘 머릿속에서는 계산기가 돌아간다. 정말로 잔머리를 많이 굴리며 산다. 혼나지 않기 위해서다. 또한 감정이 메말라있다. 어떤 것을 잘 느끼지 못한다. 느끼면 안되기 때문이다. 자신이 의존하고 있는 관계의 애착대상이 자신에게 고통을 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느껴버리면' 모든 것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부모로부터 정신적 학대를 받아온 아이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이 정신적 학대로부터 잘 버텨내는 모습을 우리는 관계를 잘 하는 모습이라고 평가한다. 고작해야 이런 것이 관계의 해답이다.
구조를 뒤집으려고 시도하는 혁명의 전사들이라고 특별한 답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학대를 받은 아이는 구조를 뒤집어 이제는 자기가 부모보다 위에 서고자 한다. 그들은 이제 부모보다 힘과 권위를 가진 자로서 부모를 학대한다. 부모라고 가만히 앉아 당하지는 않는다. 구조는 또 뒤집힌다. 그 둘은 엎치락뒤치락하며 매일 싸운다. 수레바퀴는 계속 굴러간다. 에너지가 만들어진다.
구조는 바로 이 투쟁의 에너지를 먹으며 성장해간다.
구조만이 승자이며, 구조 내의 인간은 에너지가 착취되며 고통받는 노예일 뿐이다.
구조 속에서는 이처럼 답이 없다.
관계 안에는 원래 답이 없다.
그 밖으로 나가야 한다.
구조 밖을 향한, 관계 밖을 향한 움직임을 실존이라고 말한다.
깨.달.음.은. 실.존.의. 운.동.으.로.부.터. 시.작.된.다.
이것은 고통의 구조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존재의 프로젝트다.
곧. 존.재.회.복.운.동.이.다.
상대적인 관계 안에 갇혀 있던 인간이 자신의 절대적인 존재성을 다시 기억하고 또 발견하고자 하는 길이다.
그동안 절대적인 것이 상대적인 것 안에 억지로 꾸겨넣어져 그 모습이 우스꽝스럽게 축소되었다. 형편없이 비루한 형상이 되었다.
우리는 바로 이 일그러진 모습이 자신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을 아주 많이 미워해온 것이다.
이처럼 상대적인 것에 갇혀 몰락한 우리의 모습 때문에 자기학대는 생겨났다.
우리가 타인을 학대했던 이유도 동일하다. 그 '발로 차주고 싶은 등짝'은 우리 자신의 것이었다. 우리는 타인에게서 볼썽사납고 못나빠진 우리의 모습을 보며 타인을 학대해온 것이다.
인간을 학대하면 안된다고 말하던 이들이 있었다.
"인간은 어쩌면 이렇게 강한지요. 또 어쩌면 이렇게 약한지요. 그 둘이 다 있어서 온전한 인간인 겝니다."
신성함을 위장한 이들이 바로 인간에 대한 최고의 학대자들이다.
이.들.은. 인.간.이. 상.대.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 상대적인 면모들을 모두 품어줄 더 큰 구조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한 구조야말로 절대적이고 신적인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인간이 절대성을 얻기 위해서는 관계 및 구조를 통해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쉬운 비유로, 개인이 하나님을 만나려면 엄마를 통하거나 SNS 인플루언서를 통해야 한다는 것이다.
관계는 이처럼 우리가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것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창구인 것처럼 행세한다. 그리고 우리는 매우 자주 이 '관계의 유혹'에 넘어가 시험에 패배하곤 한다.
알다시피 예수는 승리했다.
붓다는 승리를 논할 여분의 필요도 없이 일찌감치 떠났다.
관계의 절대적 중요성을 강조하는 학대의 기술자들로부터, 깨달은 이들은 한시 바삐 멀어져갔다.
민족과, 국가와, 왕을 통해야만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가? 정보해설자와, 연예인과, 정치적 선동가를 통해야만 우리는 자신의 절대적 존재성을 발견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 자신이 직접 만나는 것이다.
깨달음은 아주 쉬운 비유로는, 그 어떤 매개없이 개인이 직접 하나님과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관계에 의해 자신이 가치있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관계와도 무관하게 이미 자신의 존재가 절대적이라는 것이다.
학대는 사람이 죽는 줄 몰라서 하게 된다.
우리의 이 삶이 한 번뿐이라는 사실의 자각 속에서 우리가 살아간다면, 우리에게는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들 시간이 없다. 그런 시간은 필요없다.
단 한 번뿐이라는 사실을 단 하나뿐이라는 사실로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된 우리는 이제 그 하나의 절대성을 향해서만 움직여갈 것이다.
끝내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된 존재가 날아오를 것이다.
고통의 새장 밖으로.
절대적인 것이 상대적인 것으로부터 풀려났다.
풀려나는 즉시 알게 된다.
절대적인 것이 상대적인 것에 스스로를 일부러 묶어주었던 그 멋진 존재의 사랑을.
사.랑.을. 망.각.한. 것.이. 고.통.이.다.
고통의 끝은, 이미 한참 전에 시작되었던 사랑이 스스로의 이름을 다시 찾은 사랑의 부활이다.
그래서 깨달은 이들은 고통이 계기가 되었을지라도, 고통의 가치를 말하지 않고 사랑의 감동을 노래한다.
그것이 우리가 기억해야 할 원래의 이름이기 때문이며, 우리의 영원한 꿈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