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만을 비추는 시선에 열려있기"
바라보던 이가 역으로 바라보이게 되는 현상이 있다.
명상을 할 때 "보는 그 놈을 봐야 한다."라는 식으로 말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자기가 마음을 알아봐주며 엄마처럼 "그래그래, 너도 온전하구나."라는 활동을 하고 있던 이가 있다. 자기는 마음이 아닌 척하며 그는 이 일을 한다. 그리고는 이러한 탈동일시의 방식으로 마음을 다 알아봐주면 자기가 모든 마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다가 그의 신변에 도저히 해결될 수 없는 고통스러운 사건이 일어난다. 이러한 때에는 아무리 마음이 아닌 척하며 마음을 들여다보려고 해봐도 고통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가. 탈.동.일.시.해.서. 도.망.갈. 수. 없.도.록. 고.통.은. 그.를. 몸.에. 붙.잡.아. 놓.는.다.
이것은 이제 마음의 문제가 아니다. 내 자신의 문제다. 내 자신이 너무나 고통스럽다.
그리고 고통이 제공하는 그 실재감이 100%가 되어 그가 자기 자신과 일치하게 되는 순간, 그는 문득 이상한 감각에 휩싸이게 되기도 한다.
자신이 지금 바라보이고 있다!
자신이 마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바라보이고 있다.
어, 어, 하며 이 감각을 붙잡게 될 때, 순간 워프가 일어난다.
지금까지 자신이라고 생각했던 그것이, 또 마음을 바라보는 자신이라고 생각했던 그것이 바로 마음이었다. 통째로 마음이었다.
여태까지의 자신의 일생이 다 마음이었고, 지금 나는 그 사실을 보고 있다.
이것은 흡사 영화 속의 등장인물이었던 이가 갑자기 영화관의 객석에 앉아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입장과도 같다.
놀라운 것은 지금까지 자신이었던 영화 속 등장인물도 스크린 밖을 바라보고 있고, 객석에 앉아 있는 이 자신도 스크린 안을 바라보고 있다.
서.로.가. 지.금. 서.로.를. 알.아.보.고. 있.다.
2차원과 3차원이 서로를 알아보는 것 같은, 말도 안되는 일이 일어난다.
극작이론에서는 제4의 벽이라고도 얘기한다. 작품 속 등장인물이 작품 밖 독자를 인식하는 것이다.
이러한 차원을 넘어 만나진 상호자각의 감각이 몇 차례 워프되며 스크린 안과 스크린 밖의 입장을 번갈아 교차해간다. 너무나 반가워서 아주 자연스럽게 말이 걸어질 수도 있다. 거의 이런 식이다.
"내가 여기 있잖니."
야훼가 모세에게 말을 건 그 감각이다.
지금까지 자신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던 그 마음의 궤적이 주마등처럼 단번에 스쳐지나간다. 모든 순간들이 다 명료하다.
지금까지 그것이 자신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온 마음의 입장에서는 마치 하나님이 지금까지 자신과 함께 동행하고 있던 그 감각으로 느껴진다. 단 한순간도 혼자인 적이 없었다. 늘 나는 마음과 함께했다. 그렇다는 사실을 마음이 알게 되었다.
이것을 마음이 나를 깨닫는다고 표현한다.
그리고는 존재만 남는다. 존재만 이 우주에서 가장 확고하며 또 선명하다.
이것만이 진짜라는 것을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게 된다.
근원의 감각이며, 선불교 연구자인 니시타니가 실재(reality)라고 말한 그 감각이다. 정말로 리얼리티다.
혹자에 따라 이러한 현상체험을 깨달음이라고 하는 이들도 있고, 여기에서 과거의 묵은 습관들을 벗겨내야 깨달음이라고 하는 이들도 있으며, 이와 같은 일시적 상태를 항구적 구조로 바꾸어 지속해야 깨달음이라고 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깨달음이 성립되는 핵심은 여기에 있지 않다.
이는 단지 자신이 언제쯤 깨달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다.
자.신.이. 깨.달.았.다.고. 할. 때. 깨.달.은.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때는 내가 깨닫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해질 때다.
내가 깨닫는 것이 아니라, 나를 깨닫는 것이다.
나.는. 타.자.다.
계속해서 우리의 인식의 범주에서 빠져나가는, 절대 잡을 수 없는 타자다. 우리가 결코 그 전모를 다 파악할 수 없는 가장 거대한 미지의 타자다.
그리고 그 나에게 삶을 맡기는 것이다.
기독교적 비유에서는 이 일이 더 쉽게 묘사된다. 표현 그대로, 자신이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다 맡기며 사는 삶이다.
우리가 삶에서 경험하는 모든 것을 내가 알아봐줘야 하는 것이 아니다. 나에 의해 자동으로 알아봐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의식할 필요없이 이러한 나를 신뢰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자신이 깨달았다고 말할 수 있다.
즉, 나에 대해 기꺼이 잊은 이들이 나를 깨달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들은 시선 속에서 살아간다.
자기가 누구를 알아봐주는 시선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시선이 비추는 속에서 자신이 살아간다.
이것은 마치 자신만을 비추어주는 하나님의 비호 속에서 살아가는 감각과 유사하다.
모.든. 이.에.게.는. 그. 자.신.만.을. 비.추.어.주.는. 시.선.이. 있.다.
이것을 비유적으로 '자신만의 신'이라고 불러도 좋다.
중요한 것은 그것은 자신에게만 신처럼 경험되는 것이라는 점이다.
이 사실을 간과하면 자신이 명상 등을 하다가 경험한 시선을 마치 '보편적인 신'인 것처럼 만들어 다른 이들에게 강요하는 일이 발생한다. 자신만의 신을 모두의 신으로 섬기라고 종용하는 광신도의 모습이다.
자신이 모든 것을 알아봐주는 시선인 척할 경우에는 이러한 모습이 더 심화된다. 쉽게 말해, 자신이 신과 같은 권위를 행사하려고 하게 된다. 종교심리학에서는 이를 자기우상화라고 부른다. 종교체험을 한 이들이 매우 자주 빠지곤 하는 함정이다.
모든 종교 및 수행론들의 핵심은 결국 내맡기는 감수성이다.
타자적인 것을 신뢰할 줄 아는 감수성이다.
가장 거대한 타자인 나를 신뢰할 줄 알게 되면, 이제 다른 사람들도 신뢰할 수 있게 된다. 다른 사람들을 근본적으로 신뢰하지 못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온전함을 알아주려고 하게 된다. 여기에서 '온전함'은 이미 그 의미가 굴절된 '안전함'의 성격이 된다. 타인이 무섭기에 타인의 온전함을 알아준다는 명목으로 타인을 억지로 안전한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타자에 대한 이 통제욕을 갖고 있는 한, 늘 깨달음은 통제의 기제로 전락한다.
자기가 경험한 '보편적인 신'이라는 환상의 내용과 맞지 않는 것은 모조리 통제하려 하며, 시도때도 없이 남들에게 스승질을 하게 된다. 자기가 절대적 진리라도 되는 양 타인의 깨달음을 검증하겠다고 구는 것도 이러한 상태일 때다.
왜 이러는지는 분명하다.
이미 그게 없어서다.
그게 떠났기 때문이다.
이미 없는 것을 있는 척하기 위해, 계속 화를 불태운다. 뜨겁게 스승질을 하면 자기에게 아직 그게 있는 것처럼 스스로를 속일 수 있어서다.
종교체험을 한 수행자들 중에 늘 화를 달고 다니는 이들이 있다. 자기는 화가 안났다고 하지만, 그 언행에는 누가 봐도 화가 가득하다. 이미 그 상태가 없는데 있는 척 고집을 부리고 있어서 이들은 계속 화가 난다.
자신이 시선인 척하고 있을 때, 시선은 무엇보다 빨리 달아난다.
자신이 하나님인 척하고 있는 이의 곁에 하나님은 머물지 않으신다.
그게 있는 것이지, 자신이 그게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게 있음을 알고, 그것에게 다 맡기면 된다. 그러면 또 만나지고, 계속 만나진다. 그것과 하나가 된다. 이럴 때 자연스럽게 상태는 구조가 된다. 묵은 습관들도 알아서 씻겨진다. 그게 알아서 씻겨주기 때문이다.
이 표현은 어떠할까?
바라보는 것과 바라보이는 것이 만나려면,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안된다. 바라보이는 일에 열려있어야 한다. 바라보이는 일을 기다려야 한다. 절대적 수동성의 감각이 함께 필요하다. 깨달음은 능동도 아니고 수동도 아니며, 절대적 능동성과 절대적 수동성에의 동시적 개방의 문제다.
그로 인해, 마침내 바라보는 것과 바라보이는 것 사이에 이루어진 기적의 눈맞춤이 바로 사랑이다.
사.랑.에.게. 맡.겨.두.면. 사.랑.이. 알.아.서. 한.다.
깨달음은 자신을 비추는 사랑의 시선 속에서 이 삶과, 이 세상과, 이 좋은 사람들을 더욱 신뢰해가게 되는 삶의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