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똑(Knock at the Cabin, 2023)

문을 두드리니 얼굴이 대답한다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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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 샤말란의 영화는 우화의 구조를 갖고 있다.


누군가에게 우화는 단순해서 유치하게 경험되며, 또 누군가에게는 그 단순성의 공간이 담지하는 깊이를 갖는다.


우화를 스토리로 소비할 때와, 우화를 자신의 실존적 삶과 엮어내어 체험할 때의 그 차이다.


이 영화는 부조리함에 대한 우화다. 부조리함의 주제를 다루는 것뿐만이 아니라, 극의 구성 자체도 부조리하다. 흡사 카프카의 『심판』 같은 결말이다. 실존적 감각이 섬세한 이들이라면 이 영화의 결말 자체가 너무나 부조리하게 느껴져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다. 이 '부조리극'의 감상이 샤말란이 의도한 바라면 아주 반가울 것이다.


표면적으로 영화는 가족((family)인가, 인류(humanity)인가를 선택해야 하는 주제를 다룬다.


내 가족을 살리면 인류가 멸종하고, 인류를 살리려면 사랑하는 내 가족 중 한 명을 직접 내 손으로 죽여야 한다.


게이커플과 그들이 입양한 장애아 동양인 소녀에게 이 선택은 종용된다.


그래서 이것은 사실 '가족' 대 '인류'라는 선택이 아니다.


'내 가족'과 '더 많은 가족' 사이에서의 선택이다.


주인공들이 선택해야 하는 것은 이기적으로 너희 가족만 살 것이냐, 아니면 이타적인 희생을 통해 지구상의 더 많은 가족들을 살릴 것이냐에 대한 항목이다.


여기에는 '양적인 가치'에 대한 예찬이 전제되어 있다. 바로 이 요소가 부조리극의 핵심을 구성한다. 부조리함을 다루는 모든 실존주의 문학은 이 양적인 가치를 절대적으로 추구하는 현실이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폭력적인지를 묘사한다.


주인공들에게 요구되는 선택의 방식을 '인류'에 대해 똑같이 적용해보면 이제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있다.


"당신이 당신의 가족 중 한 명을 죽이면 저 게이커플과 그들의 입양아가 살 수 있고, 당신이 당신의 가족을 죽이지 않으면 (어쩌면 당신이 혐오할지도 모르는) 저 게이커플과 그들의 입양아가 죽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혐오하는 것들을 살리기 위해, 또 우리와 다르다고 생각되는 이들을 살리기 위해, 우리 가족을 대신 죽일 수 있는가?


그렇지 않고, 오히려 우리는 '혐오의 대상'을 희생양으로 삼아 생존해왔다.


희생양으로 삼는 가장 좋은 방식은 언제나 그것을 신성화하는 것이다.


그러면 희생양은 자발적으로 제단에 올라가게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우리와 다른 이들의 삶이 얼마나 아름답고 고결한지 등에 대한 스토리텔링을 통해 그들을 최고의 미덕을 지닌 존재들인 것처럼 대상화하여 제물로 만든다. 제물(goat)은 표현 그대로 최고의 것(GOAT: Greatest Of All Time)이다.


그런데 한번 살펴보자.


게이커플과 그들이 입양한 장애아 동양인 소녀는 정말로 표현 그대로의 가족일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그들은 혈족이 아니기 때문이다. 서로의 유전자가 공유되지 않는다.


그러니 '가족 대 인류'에서 '내 가족 대 더 많은 가족'으로 변주되어 온 선택의 양상은 이제 새롭게 드러난다.


'타자 대 가족'이 바로 그것이다.


타자를 타자로서 존중하는 것, 우리는 이를 바로 인간성(humanity)이라고 부른다.


이로써 '가족(family) 대 인류(humanity)'라고 하는 선택의 양상은 '인간성(humanity) 대 가족(family)'이라는 양상으로 새롭게 뒤집어진다. 이것은 단지 선택항의 선후만 바뀐 것이 아니다. 차원이 바뀌었다.


인간성을 희생해서 내 가족이 구원되었다.


오늘날 모두가 이렇게 산다. 내로남불의 본질적인 이유다.


희생양이 된 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지금 이 현실을 경쾌한 음악이 연주되는 희극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비탄의 침묵이 가로막는 비극으로 받아들여야 할지를 몰라 혼란스럽기만 하다.


아름다운 희생으로 인류(humanity)가 구원된 것이 아니라, 인간성(humanity)이 비참하게 희생되었다.


끝없이 타자를 희생시켜 내 가족이 전진해나가는 이 가족주의의 세상에서 계속 살고 싶은가? 또는 살아야 하는가?


『심판』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은 "개족같다."라고 단말마를 토해낸다. 가족같은 일이다.


샤말란은 이 영화를 이러한 부조리극의 감상으로 끌어나간다.


타자가 타자가 되는 이유는 소수이기 때문이다. '양적인 가치'에서 극도로 평가절하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성은 '질적인 차원'에서만 존재한다.


실존주의는 오직 이 얘기만을 한다.


개인의 질적인 무게는 인류 전체의 질적인 무게와 동등하다. 한 개인의 의미는 대체불가능한 의미다.


실존주의는 진실로 이 얘기만을 한다.


이것을 희생시켜서 우리는 대체 어디로 전진해가야만 하는가? 전진해야 하는 것이 맞기는 한 것인가?


실존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키르케고르에게는 영화 속에서 주어진 양상과 동일한 선택의 일이 더욱 명확했다. 키르케고르는 더는 이러한 세상에서는 살지 않기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는 아브라함의 예를 든다. 키르케고르의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선택하라고 말한다.


"네 가족을 위해 나를 버릴 것이냐, 나를 위해 네 가족을 버릴 것이냐?"


아브라함은 결단한다.


그는 가족 대신에 가장 미지의 타자를 선택한다. 가족주의가 아닌 인간성을 선택한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가족에게 칼을 들려는 그 순간, 키르케고르의 하나님은 외친다.


"그 칼을 멈춰라. 누구도 죽이지 말라. 어떤 인간(humanity)도 희생되지 말게 하라."


크리스트교가 가족종교[부족종교]에서 벗어나 세계종교가 된 순간이다.


"똑똑똑."


오두막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들어오려는 것이 아니다.


가족주의가 굳건히 지배하는 요새를 벗어나, 밖으로 나오라고 청하는 소리다.


타자의 숲으로 나와 친구가 되어 만나기를 청하는 꽃을 든 소녀의 소리다.


타자철학자 레비나스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 얼굴을 보라고.


그 얼굴이 당신에게 명령하고 있다고.


"정말로 죽일 수 있겠습니까?"


바로 그렇게 그 타자의 얼굴이 우리에게 묻고 있다고.


그리고 그 얼굴이 이미 대답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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