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비들은 왜 찐따처럼 생겼을까?"
사이비들은 일단 외관에서부터 분명한 특징을 갖습니다.
뭔 짓을 해도 귀티가 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물론 돈을 비비크림처럼 덕지덕지 발라 부티가 나는 것처럼 위장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귀티와 부티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사이비들은 아무리 비싼 수트를 걸쳐도 노량진시장 좌판에 놓인 은갈치 같습니다. 화려한 색상의 아이템들을 활용해도 유치하고 조잡한 광대처럼 보입니다. 킨포크에 나오는 화보를 따라해 세련된 감성처럼 꾸며도 청국장집 아줌마가 이케아 전시장을 흉내낸 촌티가 흐릅니다.
여기서의 핵심은 '그런 척'하려다보니 더 이상해지고 '찐따냄새'를 풍기게 된다는 점입니다.
옷을 못입는 이가, 자기 몸에 맞지도 않는 옷을 단지 색상이 튀는 원색이라는 이유만으로 마치 옷 잘입는 사람인 것처럼 뽐내듯 걸치고 다닐 때의 그 특유한 찐따냄새가 있습니다.
사이비들에게서는 다 이 냄새가 납니다.
조금 능숙한 사이비는 단정하고 선량한 모습을 연출해 이 냄새를 없애려고도 합니다.
이는 무X사에서 보편적으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트렌디한 아이템을 소비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찐따 냄새는 겨드랑이 암내처럼 그 어떤 사회적 방호복이라도 끝내 돌파해내고야 맙니다. 자신이 거기에 있다며, 자신이 도대체 누구인지를 한사코 주장해내고야 맙니다.
그것은 이들이 무X사에서 구매한 아이템들로 자기가 놀라운 패셔니스타라도 되는 것처럼 마침내는 선전해내고야 말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이런 말도 서슴치 않게 하곤 합니다.
"제가 입은 이 샛노랑 병아리색 티셔츠는 샤넬과 에르메스와 베트멍과 슈프림의 장점들만을 선별해서 가장 좋은 것만을 통합한 패션의 결정체입니다. 동서고금의 위대한 디자이너들이 고심하며 지혜를 짜내 이루어낸 그 최신의 성과와 놀라운 경험이 이 티셔츠 안에는 담겨 있습니다."
무X사는 영문도 모른 채 무척이나 당황스럽겠지만, 이러한 말을 듣고는 그 티셔츠를 주문하려는 이들이 적지 않아 이익은 생겨날지도 모릅니다.
인플루언서, 커뮤니케이터 등과 같은 별종의 것들이 오늘날 직업활동처럼 가능할 수 있는 그 이유입니다.
찐따 마음은 찐따가 잘 안다고, 사이비들은 자기와 같은 찐따들을 상대로 한 사업에 익숙합니다.
이 지점이 바로 사이비가 사람들을 가장 수치스러운 분노에 떨게 하는 지점입니다.
길을 걷다가 기나 도에 관심있으시냐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기분이 아주 언짢아집니다.
자신이 얼마나 만만하고 호구처럼 보였으면 자기에게 말을 걸었겠나 싶기 때문입니다.
사이비들에게서 찐따냄새가 나듯이, 사이비들은 찐따냄새를 잘 맡습니다. 자기 몸에서 나는 찐따냄새는 못맡아도 밖에서 나는 냄새를 포착하는 것은 아주 기가 막힙니다.
때문에 사이비들이 자신에게 자꾸 접촉을 해온다거나, 아니면 그 반대로 자신이 사이비들의 SNS나 강의 등을 자주 찾아 다니고 있다면, 자신에게서 지금 자기도 모르는 찐따냄새가 나는지를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점검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한 냄새가 난다는 것을 알면 반드시 그 냄새를 없앨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공정하게 말하건대, 이 세상에서 찐따로 태어나는 사람은 결코 없습니다.
그러나 살아가는 과정 동안 찐따처럼 생겨가게 됩니다.
얼굴은 '얼'과 '꼴'이 합쳐진 단어입니다. 얼(정신)이 꼴(형태)로 드러난 것을 얼굴이라고 합니다.
찐따의 얼이 찐따의 꼴을 만들어 찐따처럼 생긴 모습이 됩니다. 찐따냄새라는 것은 결국 '찐따의 얼(정신)'이 새어나온 그 냄새를 의미합니다.
이 찐따냄새는 그래서 다분히 후천적인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든지 후천적으로 없앨 수도 있습니다.
놀랍게도 찐따냄새는 철학적 탐구의 주제이기도 하였습니다.
니체는 찐따의 철학자였습니다.
그 자신이 찐따이기도 했기에, 그런 자신을 초극하고 인간이 찐따로 살지 않을 수 있는 길을 찾아 그는 평생을 탐구했습니다.
이러한 니체에게서 찐따냄새라는 것은 '원한감정'이라는 표현으로 명명됩니다.
니체는 사람이 이 원한감정을 품고 살 때 찐따로 살게 된다고 말합니다.
원한감정의 핵심은 열등감입니다.
1차적으로 그것은 '자기 몸에 대한 열등감'이며, 2차적으로는 '자기보다 강한 남의 몸에 대한 열등감'으로 드러납니다.
찐따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이러합니다.
엄마의 치마품에 싸여 지내거나 신경증적으로 냉랭한 엄마에게 늘 긴장하며 살던 아이가 있습니다. 사실 그 두 양상은 동시에 일어나곤 합니다.
이와 같은 아이는 결국 자신의 몸에 대해 자신감이 사라집니다. 자기 몸이 늘 미숙하고 열등한 소재로 경험됩니다.
그리고 그 열등한 몸에 대한 수치심을 잊고자 아이는 자동적으로 자기는 몸이 약한 대신에 머리가 좋다는 환상을 발달시키게 됩니다. '몸의 소외'를 '머리의 숭배'로 이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 삶은 게임이 아닙니다. 몸의 스탯이 낮게 찍힌다고 그 대신 머리의 스탯이 높게 찍히는 규칙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아이는 그러한 망상을 믿고는 자기의 정체성을 위해 그 망상을 채택하게 됩니다. 일종의 자기최면 같은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이러한 아이는 몸이 좋은 것보다 머리가 좋은 것이 더 우월한 것이라는 '병적 우월감'을 발달시키게 됩니다.
그러다가 아이가 학교와 같은 사회적 환경에 놓이게 되었을 때, 아이는 자신의 병적 우월감이 초래한 관계에서의 갈등을 경험하게 됩니다. 자기보다 몸집이 크거나 몸이 예쁜 다른 아이들을 자기의 머리로 조롱하고 무시하려고 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일입니다.
이러한 병적 우월감의 게임이 계속되면 결국 아이는 왕따를 당하거나 물리적으로 호되게 얻어맞게 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생기게 되는 것이 원한감정입니다.
몸이 강한 이들보다 당연히 더 우월해야 하는 머리가 좋은 자신이, 이처럼 오히려 더 낮은 위상의 이들에게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에 아이는 분노하게 됩니다. 세상은 공정하지 않다고 여기게 됩니다. 우주의 법칙은 일그러져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이 '머리가 좋은 이들이 승리하는 것이 당연한' 제대로 된 세상을 만들어야겠다고 이를 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사이비입니다.
사이비의 동력은 언제나 원한감정으로 인해 작동하는 복수심입니다.
물론 이 복수심은 도덕과 윤리로 위장됩니다.
자신의 몸에 대한 열등감으로 인해 타인과 세상에 대한 원한감정을 갖게 된 이들이 그 복수심을 어떻게 도덕적 의도로 기만해서 사기를 치는지에 대해 니체는 매우 잘 묘사한 바 있습니다.
"내가 이 좋은 머리로 돈을 많이 벌어서 당신들보다 위라는 것을 보여주겠어."
"내가 천재적인 지성으로 방송에 출연해서 무식한 아버지 당신보다 높다는 것을 증명해주겠어."
"내가 가장 똑똑한 모습으로 인기를 얻어 이 세상 누구보다 진정한 스승이라는 것을 알려주겠어."
사이비들은 다 이러한 찐따의 모습을 갖습니다.
그러나 이 의도는 도덕 및 윤리로 위장해 있는 까닭에 대체로 다음과 같은 언술들로 표현됩니다.
"아무 것도 없는 제가 돈을 번 만큼 당신들도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법을 알려드려서 당신들을 제가 구원하겠습니다."
"아버지 덕분에 제가 이렇게 방송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그동안 잘 키워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모든 마음이 참 온전합니다. 우리가 이제 소외된 국민들의 마음을 알아주러 나가는 독수리오형제가 되어야지요."
이것은 찐따가 꿈꾸던 초등학교 반장의 모습입니다.
초등학교 시절에 똑똑하고 모범적인 반장을 동경하고 질투하거나, 또는 초등학교 때 해봤던 반장이 인생의 유일한 영광이던 이가, 이러한 찐따의 꿈을 갖습니다.
이 유치한 꿈은, 나이가 들어서도 방구석에서 무협지나 읽으며 '무림을 다스리는 반장의 꿈'을 망상하는 모습으로 지속되곤 합니다.
그래서 찐따의 유치함은 실은 대단히 음침한 속성을 갖습니다.
사이비들의 얼굴을 보면 분명 음습한 기운이 흐릅니다. 화장이나 눈웃음, 그리고 한껏 밝게 꾸민 표정으로도 결코 지울 수 없는 그 비틀리고 어두운 음지생물 같은 분위기가 있습니다.
똑똑한 자기가 가장 우월한 존재여야 하며, 자기를 우습게 본 사람들과 세상의 위에 올라서는 방식으로 복수하겠다는 원한감정이 그 핵심으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원한감정은 엄청난 착각으로 생겨난 것입니다.
전술했듯이, 이 삶은 게임이 아닙니다. 사이비들 자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남들은 육체적 스탯에 몰빵한 반면, 자기는 대신 지성적 스탯이 높은 것이 아닙니다.
사이비들은 대체로 몸도 안좋고 머리도 안좋습니다.
이것이 진실입니다.
똑똑한 자기가 똑똑하기 때문에, 무식한데 몸의 힘만 센 이들에게 얻어맞았다는 그런 현실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것은 단순하게, 자기가 얻어맞았기 때문에, 그 대신에 자기는 머리가 좋다는 식으로 믿으려 했던 그 망상의 결과일 뿐입니다.
즉, 망상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해 그 망상의 필터로 이 세상을 일그러지게 보게 되어 생겨난 것이 바로 원한감정이며, 곧 찐따냄새입니다.
그렇다면 분명해집니다.
찐따냄새를 없애는 방법은, 망상으로 더렵혀진 몸을 씻는 것입니다.
우리가 몸도 약한데 머리도 안좋아서 찐따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아닌데 그런 척하려 해서' 우리는 찐따가 됩니다.
한번 그렇게 머리가 좋은 척 자기에게 사기를 치면, 이제는 삶이 대단히 힘들어집니다. 자기는 머리가 좋다는 그 망상의 정체성이 계속해서 자기를 압박해오며, 사람들에게도 늘 머리가 좋은 인물인 척 끝없이 연출을 쥐어짜내야 합니다.
여러 글들에서도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지만, AI의 발전은 우리에게 있어 대단히 희망적입니다.
머리가 좋아야 하는 그 모든 일은 이제 인간보다 똑똑한 AI에게 다 맡기면 됩니다. 굳이 인간이 머리가 좋아야 할 이유가 없으며, 지능이 높다는 것이 절대적인 가치로 예찬되어야 할 일이 이제 없습니다.
'머리의 숭배'에 대한 오랜 악습의 전통은 이제 막을 내릴 때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우리 자신의 몸을 소중히 하는 일입니다.
몸이 약하고 머리가 안좋은 이가 있는데, 그렇기에 그는 자기의 몸을 섬세하게 대하며, 자기의 몸을 귀하게 여기는 그만큼 그는 남의 몸도 귀하게 여깁니다.
이러한 이의 몸에서는 찐따냄새를 맡을래야 맡을 수가 없습니다.
그의 얼굴은 찐따처럼 생길래야 생길 수가 없습니다.
그는 머리가 좋지 않기에 애초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똑똑한 척하기 위해 자기가 이 세상의 비밀을 알고 있다며 뻥을 쳐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한 그는 늘 정직합니다.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가장 믿을 수 있는 이가 됩니다.
자기 자신과 사람들의 몸을 귀하게 대하고, 거짓으로 살아가지 않는 신뢰감을 그 삶에 가득 채우고 있는 이.
바로 이러한 이를 가리켜 우리는 귀티가 난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다 처음 태어났을 때 이렇게 귀티를 풍기며 태어납니다.
원래 가진 가장 좋은 이 진짜를 두고서, 왜 굳이 찐따냄새를 풍기는 사이비로 살아야 하는지는 늘 의문입니다. 니체에게도 그것이 의문이었어서 그는 철학을 했고, 이 글도 그 의문에 답하고자 쓰이고 있는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