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심리학 #5

"어머니 아버지, 당신들의 자랑스러운 아들이 AI가 되었습니다"

by 깨닫는마음씨




사이비심리학의 주체들 또는 사이비인생스승들이 말하는 모든 메시지의 핵심은 다 똑같습니다.


메타인지를 통해 자기를 객관화한 다음, 그 모습이 아무리 괴롭더라도 그러한 감정상태를 받아들여서 자아를 내려놓은 뒤, 이제는 객관적이고 투명한 주체가 되어 자아의 고집을 버리고 이 세상의 성공한 모델을 그저 따라하기만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그 핵심은 '몰개성화'와 '모방'입니다.


이를 아주 쉽게 말하자면, AI가 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시대는 인간에 대한 모방을 통해 AI를 성장시키려 하고 있는데, 사이비들은 거꾸로 인간이 AI를 모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셈입니다.


사이비들 자신이 놀라운 경험과 무수한 책(대체로 삼류 자기계발서와 오컬트영성물, 무협지 또는 이세계깽판물)을 읽어 발견해낸 이 '성공의 법칙'이라고 하는 것들은 실은 인지과학을 쉽게 설명해주는 그림책이나 AI와 관련된 기초교양서만 보더라도 더욱 자세히 나와있는 것들입니다.


이른바 사이비들의 주장은 우리가 심심이와 같은 대화형 챗봇을 키우듯이, 자기 자신을 AI로 대하며 양육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방식은 이미 특정한 분야에서 널리 행해지고 있는 방법론입니다.


발달장애가 있는 아동들을 대상으로 언어학습을 시킬 때 이 일을 합니다.


그러니까 사이비들은 사람들을 기본적으로 발달장애아동으로 보며 그 앞에서 인생스승으로 행세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실은 발달장애아동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사이비들에게는 대개 정서적 발달장애가 있습니다.


이들이 AI처럼 모방해서 살면 성공적인 인생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 그 입장에서부터 이미 그 편린은 드러납니다. 요즘 AI의 무분별한 모방도 욕을 먹는데, 다른 이들을 다 자기의 도구처럼 남용하려는 이 방식이 환영될리는 만무합니다.


정서적 발달장애는 언제나 대인관계의 갈등으로 드러납니다. 다중지능이론의 가드너는 대인관계 지능을 아예 지능의 한 영역으로 분류하기까지 했습니다. 더 고전적으로는 우리는 타인과 타인의 것을 귀하게 여길 줄 아는 이 감각을 정서지능이라고 불러왔습니다.


결국 사이비들이 경도된 지점은 모방에 쓰이는 언어적 지능 내지 논리사고적 지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만 발달시키면 인생에서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주장은 반사회성 성격장애자의 사고패턴과 전적으로 동일합니다.


하물며 오늘날의 AI 연구도 지능에 대해 이러한 방식으로 다루지는 않습니다. 사이비들이 성공공식이라고 말하는 그 방식은 고작해야 1930년대의 튜링의 계산기의 수준입니다.


그렇기에 사이비들의 주장이란 결국 우리가 인간을 벗어나 오늘날의 AI보다도 턱없이 후진 삼류의 AI가 되면 오늘날의 인생을 잘 살 수 있게 된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어처구니가 없는 말입니다.


정서는 심리적 요소들 중에서 가장 몸과 직결되어 있는 요소입니다.


몸의 미숙함은 정서의 미숙함과 곧잘 연결됩니다.


열등감 또한 몸에서부터 생겨납니다. 자신의 몸을 기능적으로 능숙하게 경험하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정서적 열등감이 쉬이 내재되곤 합니다.


결국 열등감의 근원이라는 것이 이처럼 몸이기에, 열등감이 역동의 핵심인 사이비들은 몸을 탈출하고자 하는 욕망을 갖게 됩니다. 이들이 판타지나 무협지, 과학을 빙자한 최신의 마법 같은 언어들에 끌리는 이유 또한 동일합니다.


사이비들은 몸을 버리고 자신의 언어적 지능만으로 존재할 수 있는 가상세계를 꿈꾸며, 자기 혼자서는 외로우니 모두가 그러한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즉, 이들은 정말로 AI가 되고 싶어합니다.


자기는 이제 인생의 성공법칙을 알았다면서 인생이 이렇게 쉬워도 되냐며 늘 여여한 오후에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긴다고 말하는 사이비들이 있습니다.


이런 이들을 상담할 때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그들의 피곤한 얼굴입니다. 그날 밤에 옥상에서 몸을 던진다 해도 조금도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을 그들의 찌든 몸의 상태입니다.


인생이 그렇게 쉽다면서 왜 몸은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상태 속에 있을까요?


사이비들이 완벽하게 간과하고 있는 것은 이 세계는 이세계(異世界)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자기에게만 적용되는 치트 규칙 같은 것은 없습니다.


이 세계는 누구나 몸으로 살아가며, 몸만큼 살아갑니다.


자기들이 쉽다고 말하는 것은 공짜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 자기의 몸을 대가로 지불해 얻은 것입니다.


상담을 하다가 실은 이처럼 쉽지 않은데 왜 쉽다고 말하냐고 물으면 대답은 언제나 동일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같은 것을 얻겠다고 돈을 지불하니까요."


이것은 마치 네트워크 마케팅 회사에서 상위계급에 있는 이들이 하위계급에 있는 이들에게 잘나가는 모습을 억지로 연출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빚을 내서라도 롤렉스를 차고 벤츠를 몰며 허세를 부리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그렇게 '힘을 들여야만' 하위계급의 유입자들이 많아져 자기들의 이익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이비들에게 몸이란 것은 얼마나 거추장스러운 소재이겠습니까.


몸만 없으면 힘도 들지 않게 더 성공할 수 있을텐데, 몸이 늘 장애물입니다.


몸은 이들에게는 끊임없이 관리해주어야 할 대상물입니다. 건강보조식품을 챙겨먹고, 수상한 한약들을 섭취하며, 무수한 영양제들을 정기적으로 복용하기도 하는 동시에 몸에 각종 이상한 짓들을 행합니다. 샤워기에 전극을 꽂고, 찬물을 마셔 몸의 의식수준을 높이며, 전신을 손가락으로 두드려댑니다.


결코 이들에게 몸이란 것은 쉽지 않은 소재입니다.


쉽지 않기에 몸은 이들 자신의 무력함을 끝없이 노출시키게 되며, 그렇기에 가장 버리고 싶은 소재가 됩니다.


요즘 AI 연구들도 어떻게 하면 인간의 몸에 가깝게 AI의 발전이 가능할 수 있을까를 탐색하고 있는데, 이들은 인간이면서 오히려 자신의 몸을 버리고 차라리 AI가 되고 싶어합니다. 이것은 시대에 역행하는 것이 아니라 퇴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인간인 조건은 오직 이 몸뿐입니다.


인간의 몸이라서 인간은 인간입니다.


가브리엘 마르셀이 말한 것과 같이, 이 몸이 바로 나이며, 우리는 나로 이렇게 한 번 사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인간과 똑같거나 그 이상일 수 있는 AI와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인간이 변별될 수 있는 지점은 오직 이 '몸의 일회성'일 뿐입니다.


우리는 죽는데, 쟤들은 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고, 소망하며, 사랑합니다.


이것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시겠습니까?


이 몸이 필멸할 단 한 번뿐인 유한한 몸이기에, 마음이란 것이 생겨난다는 뜻입니다.


마음은 유한성이 피운 꽃입니다.


그 꽃의 이름을 자유라고 부릅니다.


자유는 욕망하는 것들을 다 얻거나, 그중에서 현명한 지적 의사결정 과정을 통해 가장 좋은 것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자유의 개념은 AI가 더 잘하는 것입니다.


자유는 가능성 속의 가능성이 아니라, 불가능성 속의 가능성입니다.


사라질 존재만이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죽지 않고 불멸이라면,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쓸 수 있는 시간이 무한할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방대한 시간을 들여서라도 우리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모든 것을 다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것에 정확하게 매이게 됩니다. 이런 것은 자유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애초 할 수 없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에 매이지 않습니다. 욕망의 대상을 향하던 시선은 우리 자신에게로 돌아옵니다. 우리의 몸이 지금 좋게 느끼는 아주 단순하고 작은 것을 하며 행복해지게 됩니다. 이 순간 우리는 분명하게 자유롭습니다.


할 수 없기에 인간은 노래해왔습니다. 그것을 꼭 얻어야 한다고 노래한 것이 아니라, 그것은 그저 노래를 위한 핑계였을 뿐입니다.


인간은 분명하게 '시적 동물'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노래할 수 있는 생명체라는 말입니다.


그 마음이 정말로 아름다운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존재입니다.


마음으로 사는 자신의 삶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가장 귀한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시선, 그것이 인간입니다.


AI가 인간에게 물을 수 있습니다.


"너희는 왜 마음이라는 것이 있냐?"


인간은 대답합니다.


"우리는 몸이 있어 죽으니까."


결국 몸을 버리고 싶어하는 사이비는 마음을 버리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사이비는 늘 자기가 마음 아닌 마음을 바라보거나 알아주는 초월자인 척하고 싶어합니다.


그리고는 마음을 대신해 자기가 그 메타인지적 초월자로서 자기를 양육하려는 일을 하려고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이비들은 꼭 자기가 생각하는 성공법칙으로 일정한 사회적 성공을 거두면 부모에게 달려가 장원급제라도 한 것처럼 인정받고자 하는 행동을 하곤 합니다.


"어머니 아버지, 당신들의 자랑스러운 아들이 이렇게 멋진 AI가 되었습니다."


이 말은 실제로는 이러한 뜻을 담고 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당신들이 못나게 낳은 이 더럽고 약한 몸을 극복하고 제가 제 놀라운 머리로 이제 혼자 성공했습니다."


이것은 부모에 대한 심판이자, 자신이 이제 부모보다 더 진정한 부모라는 선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부모의 입장에서는 나이를 아무리 많이 먹어도 자기 몸 하나 똑바로 보지 않는 그가 그저 '애새끼'로 보일 뿐입니다.


이로써 인간과 AI 사이의 투쟁을 다룬 매트릭스 최신판의 상영이 이제 막 시작됩니다.


네오아빠와 트리티니엄마 그리고 AI자식 사이에서의 나름의 복잡한 역동이 스펙터클하게 펼쳐지겠지만, 우린 관심 없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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