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적 자아의 임무"
자아는 초월되기 전에 먼저 영웅적 자아의 면모를 갖게 된다.
카뮈가 묘사한 시지프의 모습은 대표적인 영웅적 자아의 모습이다. 영웅적 자아란 실존주의적 인간상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콜린 윌슨은 이 실존주의적 인간상을 '아웃사이더'라고 다시 말한다. 아웃사이더는 체계[구조, 시스템, 관계]에 불만을 갖는다. 자신이 속한 구조가 거짓이라는 것을 눈치챈 까닭에 그는 체계의 바깥을 향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직 그 힘이 없다. 윌슨이 묘사한 아웃사이더의 내적 모순은 이처럼 그가 가진 통찰력 있는 섬세한 감수성과 현실에서의 무능력함 사이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나 아웃사이더는 분명히 보았다.
자.기.보.다. 더. 거.대.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그.는. 끝.내. 엿.보.고.야. 말.았.다.
자아는 체계가 운용하는 언어적 문법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래서 자아에게는 자기를 구성해준 창조주와 같은 체계가 가장 큰 것으로 곧잘 인식되곤 한다.
그러나 어떠한 자아는 체계 바깥에서, 체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것이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거대한 것, 체계 밖에 있기에 또한 자기의 인식 밖에도 있는 그 거대한 것에 전적으로 매혹되어버리고 만다.
자기가 흘깃 보게 된 그것만이 '진짜'라는 불가해한 확신에 사로잡힌 자아는 한참을 번민하다가, 결국에는 붓다처럼 체계의 성벽 밖으로 발을 내딛게 되는 어느 새벽을 맞이한다.
영웅적 자아가 출현한 순간이다.
영웅은 왜 영웅인가?
죽.음.이. 있.기.에. 영.웅.이.다.
체계에 의해 태어난 자아가 체계 밖을 향한다는 것은 필연적인 죽음을 암시한다.
이처럼 영웅적 자아란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나가는 자아를 뜻하는 것이다.
삼국지에 나오는 하나의 영웅상으로 알려진 조자룡의 예를 들어보자. 그의 영웅적 면모는 장판파에서 잘 드러난다. 무엇이 그를 영웅으로 만들었는가? 조자룡이 조자룡인 이유는 무엇인가?
이미 죽었을 수도 있는 미부인과 아두를 향해 달려갔기에 그가 조자룡이다.
동대문시장에서 구입한 도검을 오컬트전문가에게 70만 원을 주고 맡겨 달빛의 정기를 내리게 해 만든 청홍검을 소지하고 있다고 조자룡이 되는 것이 아니다.
약한 이들을 자기가 다 지켜주고, 그들의 모든 마음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자기가 만들겠다고 주장하는 이가 조자룡이 되는 것도 아니다.
영웅은 어떠한 죽음을 지켜내기 때문에 영웅이 아니라, 죽음을 받아들이기에 영웅이다. 이것이 영웅조건이다.
자아가 처음 울타리 너머로 문득 바라보게 된 가장 거대한 것이란 분명 이 죽음이다. 그렇게 죽음을 눈치채게 된 자아는 체계라는 것이 공허한 모래성과 같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이해하게 된다. 이 체계가 만들어낸 자기 또한 아무리 대단한 척해도 다 가짜에 불과하다. 죽음이 살짝 손짓만 해도 그 모든 것은 부질없이 무너져내리게 될 뿐이다.
이러한 실존의식이 생겨난 자아에게는 이제 전과 같은 생활은 불가능해진다.
죽음이 가장 거대한 것이고 가장 진짜인 것이라면, 그 진짜가 한번 되어보고 싶다. 진.짜.로. 죽.는. 것.이.라.면. 한. 번.만.이.라.도. 진.짜.로. 살.아.보.고. 싶.다.
죽음을 자각한 자아에게는 진짜(reality)에 대한 갈망이 샘솟는다.
가장 거대한 것의 이름은 이제 '죽음'에서 '진짜'로 바뀐다.
영웅이란 이 진짜에 매혹된 이들이다. 진짜로 살고 진짜로 죽고 싶어하는 이들이다.
그래서 영웅적 자아는 진짜를 찾기 위해 체계라고 하는 가상세계의 울타리를 넘어 저 황무지로 향한다.
죽음을 향해, 그렇게 진짜를 향해 그는 달려간다. 그는 조자룡이다.
물론 영웅적 자아들만 울타리를 넘는 것은 아니다.
체계라고 하는 것이 가상세계라는 것을 눈치챈 또 다른 세력들이 있다. 그들은 마법사라고 불린다.
울타리 밖을 알게 된 마법사들은 자기가 왜 체계에 갇혀 다른 이를 왕으로 모셔야 하는지에 불만을 갖는다. 밖으로 나가 자기가 새로운 언어적 문법의 울타리를 만들어내면 그 새로운 왕국에서 왕이 되는 것은 바로 자기일 것이다. 이러한 생각에 착안한 이 마법사적 자아는 왕이 되기 위해 기존 왕성의 보물을 최대치로 훔친 뒤 성벽 밖으로 도주한다.
그리고는 울타리를 넘었으니 자기도 영웅이라고 주장하곤 한다. 체육시간에 몰래 담치기를 해서 오락실에 갔으니 자기 또한 당당한 일진으로 인정해달라는 식이다.
이것은 자아 중의 자아가 늘 하는 방식이다. 마법사적 자아란 자아 그 자체의 모습이다.
반면 영웅적 자아는 자아를 포기하고 싶은 자아의 특성을 갖는다.
마법사적 자아가 가는 길을 '왕의 길'이라고 말하고, 영웅적 자아가 가는 길을 '깨달음의 길'이라고 말한다.
이 둘 사이의 경계를 흐리지 말라고 대부분의 고등종교의 전통들은 말한다.
그러나 마법사적 자아는 언제나 이 경계를 흐린다. 자기의 영토에서는 모든 마음을 자기가 온전하게 다 지켜주겠다고 말하며, 이것을 깨달음이라고도 주장한다. 깨달음은 마치 '정의의 일진'이 되는 일이나 가장 자상한 파파스머프가 되는 일처럼 되어버린다.
자기도 울타리를 넘었으니 깨달음도 얻은 것이고, 또 새로운 울타리를 세웠으니 왕이기도 한 것이라고 마법사적 자아는 '통합'을 주장하겠지만, 여기에는 하나의 의도밖에는 없다.
"나만은 죽지 않을 거야."가 바로 그것이다. 자아 중의 자아의 의도이며, 자아 그 자체의 의도이다.
마법사적 자아는 황무지에서도 자기의 능력으로 성을 만들어 자기를 지킬 수 있다고 뽐내는 자아다. 그는 자기를 가장 높은 것이라고 생각하며, 곧 가장 있는 것이라고 여긴다. 이 '자아 중의 자아'는 '있음 중의 있음'이 되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마법사적 자아는 '없음'이라는 것을 가장 거부하며 부정하는 입장에 선다. 자아 자신이 죽어 없어지는 일을 가장 회피하려고 한다.
결국 그가 울타리를 넘어 황무지로 '나온 척'하는 것은 자기의 생존능력을 장기자랑하고 싶어서이지, 죽고 싶어서가 아니다.
"아두 구하러 가는 길에 나 화살 한 대도 안 맞고 안 죽었어. 나 존나 짱인 듯. 내가 하는 놀라운 경험이 진짜 대단하지 않냐, 나님의 강력한 권위가?"
이처럼 가장 유치한 자아 그 자체가 마법사적 자아가 된다.
가.장. 유.치.한. 것.은. 자.기.가. 가.장. 높.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영웅적 자아와 마법사적 자아가 전적으로 변별되는 것은 이 지점이다.
영웅적 자아는 가장 거대한 것을 향해 나아가며 성숙해지고, 마법사적 자아는 자기가 가장 거대한 것이 되어 유치해진다.
영웅적 자아에게는 가장 거대한 것의 이름이 '죽음'에서 '진짜'로 바뀌어가며, 진짜로 향하는 그 길을 가는 과정 속에서 영웅적 자아는 점차로 '없음'으로 무르익어간다.
여기에서 없음의 핵심은 '나 없음'이다.
불.안.은. 없.음.에. 대.한. 자.각.이.다.
특히나 내가 없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이다.
내가 나라고 생각하고 있던 그 모든 스토리가 실은 내가 아니며, 나아가 그 스토리들을 바라보고 있던 그런 관찰자적 나도 내가 아니라는 사실, 그 모든 형태의 내가 없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이 불안이다.
때문에 우리가 모든 영토에 나라는 것을 산재해놓고 있던 이상, 불안은 전방위적으로 체험된다.
불안은 곧 우리의 근본적인 존재론적 상태다.
그리고 영웅적 자아는 바로 이러한 존재론적 상태를 우리 자신의 근본으로 회복하려고 모험을 시작한 것이다.
영웅적 자아는 삶에 대한 간절한 집착을 통해 불안을 극복하고 멋지게 죽음으로부터 승리하려는 배트맨 놀이를 하고 있지 않다.
영웅적 자아는 불안 그 자체가 되려고 한다.
영웅적 자아는 자아[나] 없는 현실을 향해 더욱 깊이 나아가 다만 존재하려고만 한다.
가장 거대한 것은 이제 '죽음'에서부터 '진짜'로, 또 '존재'로 그 이름을 알리게 된다.
영웅적 자아의 모험이란 결국 '비실재하는 자아'로부터 '실재하는 존재'로 그 차원을 달리 하기 위해, 모든 것이 다 가짜인 중에 처음으로 진짜라는 것이 되어보기 위해 떠난 자아의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이 과정의 막바지에 자아의 죽음은 필연이다. 우리가 자기라고 생각했던 것이 반드시 죽는다. 하나의 인격적 죽음이 일어난다.
자아가 존재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자아가 죽음으로써 존재가 드러나는 것이다.
이 존재의 속성이 무아(無我)다.
무아적 존재는 플랫폼이 아니다. 텅비어 있기에 중립적이고 투명해서 그 안에 모든 마음이 담길 수 있고, 또 경우에 따라 각각의 마음이 되어 메소드연기를 할 수 있는 그런 플랫폼과 같은 성질의 것이 존재가 아니다.
차라리 존재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없어서 우주의 모든 것이 다 담길 수 있지만, 이 품은 너 하나만으로 꽉 차는구나."
이것은 그 모든 내가 없는 속에 태어난 처음의 나다.
나는 너로 꽉 채워진 그 이름이다.
나는 너만 생각하는 그 마음이다.
영웅적 자아가, 자기가 나이기를 포기하려는 그 여정의 끝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마침내 불러내게 된 것이 바로 이 나의 존재다.
자아가 초월된 순간이다.
자아는 자아 자신이 자기보다 거대한 것을 향해 모든 것을 다 바친 그 사랑으로 초월된다.
영웅적 자아는 진짜를 향한 이 사랑으로만 끝까지 걸은 자아다.
자아가 초월되는 일은, 자아가 더 멋진 것으로 거듭나거나, 발전하거나, 변신하게 되는 일이 아니다. 초월은 변증법이 아니다. 자아는 다만 죽음을 향해 달려가 그 끝에서 죽는다. 그리고 자아가 자기의 인생을 다 건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것이 태어난다.
자아가 그토록 갖고 싶어했던 것, 가장 소망하고 가장 꿈꾸었던 것.
'나'라고 하는 존재를 비로소 만나 그 품에 안겨 영웅적 자아는 안식을 맞이한다.
이것은 불가능성 속의 가능성이며, 없음 중의 있음이다.
실존주의는 존재론적 전통에서 '없음 중의 있음'을 묘사하는 전통이다. 실존주의적 인간상은 없음을 향해서만 나아가지만 이것은 허무주의가 아니다. 또는 모든 것이 애초 다 가짜인 것이니 내가 지어내서 진짜인 것처럼 하면 된다는 마법사들의 상대주의적 쾌락주의를 의도하지도 않는다.
영웅적 자아는 없음을 찬미하지도 또 부정하지도 않는다.
없.음.에. 온.몸.으.로. 정.직.할. 뿐.이.다.
이 세상에 없는 것을 찾아 나선 이의 모습과도 같다. 어쩌면 없을지도 모를 자신의 사랑을 향해 떠난 이의 모습이다.
없으니 자기가 지어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정직하게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 뿐이다. 영웅적 자아는 그 모험길에서 이와 같은 사실을 정말로 사실로서 직접 확인해가며 마침내 자신이 여행하고 있던 황무지가 이름 그대로 전적인 없음의 영토였다는 결론에 도달하기에 이른다.
불가능성이 100%로 확인되었다.
그는 이제 다 살았다.
자기의 시간이 다 끝났음을 짐작하며 영웅적 자아는 땅에 눕는다.
자신의 모든 노력이 부질없이 다 포기되니, 자신도 포기된다.
이제 정말로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땅이 부른다.
"봐봐, 어딜 가도 다 내 손바닥 안이었지? 어딜 가나 늘 나랑 함께 있었지?"
존재의 속성은 '없이 계신 것'이다.
왜 없음인가?
너무 거대해서 자아의 눈에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있다.
울타리 안도, 울타리 밖도, 진짜로 있는 반석 위에 올려져 있다.
한 번도 황무지인 적 없었던 광활한 존재의 꽃밭에 누워 영웅적 자아는 그의 임무를 완벽하게 완수했다.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나라고 하는 연인을 만나서 이제 편히 잠이 든다.
실존주의는 아웃사이더가 왕이 되는 길이 아니라, 깨달음을 얻는 길이라고 콜린 윌슨은 분명하게 말한다.
자아가 영웅적으로 초월되는 자리에서, 자아는 사랑을 얻고, 이제 사랑이 자아 대신에 활동한다.
우리는 나로 깨어난다.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된다.
이전의 삶이 다 옳았던 것이어서 그것을 더 진정하고 강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완벽하게 다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루어진 것은 반복되지 않는다.
시지프는 똑같은 바위를 굴리지 않는다.
그는 사랑이 없던 곳에 사랑을 데리고 오는 그의 임무를 완벽하게 완수했다.
카뮈의 묘사처럼, 우리는 이제 연인의 가슴에서 영원히 행복한 시지프의 미소를 그려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