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심리학 #43

"종교체험의 허와 실에 대해"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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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체험은 기본적으로 다 환상이다.


깨어서 꾸는 꿈 또는 절반 정도 잠든 채로 꾸는 꿈과 같다.


우리가 무의식이라는 개념을 가정해서 채용한다면, 종교체험은 무의식의 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대개 종교체험을 경험하게 하는 여러 방편들은 '집중'과 '반복'의 활동을 통해 의식의 힘을 약하게 함으로써 무의식적 내용들이 표출되기에 좋은 조건을 만드는 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 무의식이라는 것 또한 심오한 소재가 아니다.


전생을 보았으니 내면의 참나를 만났느니 하지만, 다 게임과 같은 구조일 뿐이다.


이를테면, 우리가 미로를 만들어 가장 깊은 방에 보물을 숨겨둔 뒤 그 지도를 일부러 망각했다. 이런 것이 무의식이다. 그리고는 그 미로에 들어가 열심히 고난을 경험한 뒤 보물을 찾아내고는 이것이야말로 놀라운 무의식의 지혜라는 식으로 우리는 말하곤 한다.


짜고 치는 고스톱 같은 것이다.


종교체험의 사례들을 연구하다보면 흥미로운 사실이 드러난다.


체.험.자.는. 반.드.시. 체.험. 속.에.서. 자.기.가. 의.도.하.던. 것.을. 만.나.게. 된.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자기를 늘 비루한 죄인으로 설정하고 있는 이는 꼭 자기의 모든 것을 다 용서해주는 미리엘 주교 같은 심상을 만나게 된다. 약한 아들이 되어 강한 아버지를 꿈꾸던 이는 그러한 신적 아버지와 같은 세력을 만나게 되며, 전방위적으로 세상을 무서워하던 이는 우주가 거대한 요람이 되어 자기를 완벽하게 보호해주는 듯한 체험을 하게 된다.


종교체험이 신경증적인 이들에게 자주 체험된다는 사실을 윌리엄 제임스는 일찌감치 보고한 바 있다.


그래서 종교체험은 일종의 '보상작용'과도 같다.


심리적인 취약성을 갖고 있는 이들이 그 취약성을 보상하기 위해 만들어낸 거대한 환상을 스스로 체험하는 것이다.


제임스는 이러한 환상에 대해서도 OK라고 말한다.


단, 여기에는 전제가 붙는다.


그. 환.상.의. 체.험.이. 그.의. 삶.에. 실.제.적.인. 도.움.이. 되.는. 한.


종교심리학의 대부이자 미국 실용주의 철학의 대가이기도 하던 제임스에게 있어 종교체험의 가치란 이 실용성에 있다. "그 뿌리를 보고서가 아니라 그 열매를 보고 알게 될 것이다."라는 말은 제임스의 견해를 대표하는 말이다.


그러나 종교체험을 했거나 또는 원하고 있는 다수는 이 실용성에 주목하지 않는다.


이들은 오히려 종교체험을 일종의 훈장처럼 생각하곤 한다.


종교체험을 자기가 남들과 다른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는 그 증표로 간주한다.


'실용성'이 아니라 자기가 '특별성'을 얻을 소재로 종교체험을 소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종교체험의 문제는 부각된다.


이것은 결국 자기가 만든 '환상게임'이다. 자기가 꾼 꿈속에서 '우주의 왕'이라는 훈장을 받았다고 한들, 그것이 실제의 현실에서 동일한 영향력을 가져야 할 그 어떤 당위도 없다.


누구나 자기 집에 환상의 금두꺼비 100마리는 갖고 있는 법이다.


그러나 종교체험을 오용하는 이들은 자기의 환상으로 만들어낸 가치를 객관적 가치로 전환하려고 곧잘 시도한다. 꿈에서 자기에게 100점을 준 뒤 현실에서도 자기는 100점으로 대접받아야 한다며, 환상을 자신의 특별한 권위로 환산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는 결국 어떠한 이들이 종교체험을 하게 되는가를 시사한다.


현실의 자기를 비루하게 느끼는 이들이 '특별한 자기'를 얻고자 종교체험이라는 가상의 게임을 만들어낸다.


그리고는 환상속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자기가 정말로 '특별한 자기'가 된 것처럼 이제 그 모습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채택하곤 한다.


이러할 때 펼쳐지는 것이 바로 망상의 삶이다. 우리는 '리플리 증후군'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다. 현실을 부정하며 허구를 사실이라 믿고 거짓의 언행을 일삼게 되는 증세를 가리킨다. 종교체험의 오용은 반드시 이러한 증세를 야기하게 된다.


특히나 그 환상의 체험이 정동적으로 강렬한 까닭에, 체험자는 그것이 다만 자기의 의식세계에서만 일어난 허구라는 사실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자신이 정말로 우주와 합일했거나, 위대한 신을 만났거나, 또는 모든 것을 알아주는 초월적 참나가 되었다고 믿고 싶어한다.


허구라는 사실을 인정하면 자기는 또 다시 받아들이기 싫은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까닭이다.


이런 것을 '영적 우회(spiritual bypass)'라고 부른다. 존 웰우드가 제안한 개념이다. 종교체험이 현실에 건강하게 쓰이게 되는 방향성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의 삶을 회피하고 자기의 특별한 정체성을 강화시키는 방향성으로 남용되는 현상을 지시하는 개념이다.


어떤 이에게는 종교체험이 그의 삶을 건강하게 해주는 실용성을 갖게 되고, 또 다른 이에게는 오히려 그의 삶을 병들게 하는 특별성에 고착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 차이는 왜 생겨나는가?


여기에는 발달심리학의 문제가 있다.


자아가 충분히 성숙해진 정도와, 종교체험을 건강하게 받아들이는 정도는 정확하게 비례한다.


쉽게 말해, 아직 자아가 충분히 발달하지 못한 아동상태에 있는 이들이 종교체험을 하게 되면 이는 오히려 파괴적인 결과를 낳게 된다는 것이다. 자기가 만들어낸 환상의 힘에 자기가 휘둘리며 잡아먹히는 것과 같다.


자아의 성숙정도를 평정할 수 있는 기준은, 다른 장에서 묘사한 것처럼, 자아가 실존의식을 갖게 되었는가다.


틸리히는 꿈꾸듯 몽롱한 낙원에서 벗어나 개인이 되려는 운동을 실존이라고 묘사한다. 이는 나이브한 아동상태를 벗어나 성숙을 향하려는 상태다. 자기의 죽음을 직면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가려는 '영웅적 자아'의 모습이기도 하다. 틸리히는 이 운동의 동력을 용기라고 말한다.


이것은 자신이 특별성을 가지려는 운동이 아니라, 자신이 아닌 특별성을 향해 나아가려는 운동이다.


여기에서 '특별성'의 정확한 이름은 '절대성'이다. 다른 말로는 '대체불가능성'이라고도 부를 것이다.


이러할 때 경험하게 되는 종교체험은 절대성을 향한 삶의 여정에서 아주 유용한 실용성을 드러낸다.


쉬운 예를 들어보자.


어떠한 종교체험자는 미리엘 주교를 왜 체험하게 되었는가? 장발장을 치우기 위해서다. 그럼으로써 장발장과 미리엘 주교라는 상대성들을 다 해체하기 위해서다.


이와 같은 실존적 종교체험자는 그래서 종교체험 후에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은 다 해도 되는 장발장으로 살지 않게 된다. 또는 무엇이라도 다 수용하고 온전하게 품어내는 미리엘 주교로도 살지 않게 된다.


그 둘이 다 꿈이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됨으로써 둘은 동시에 사라진다.


"너 하고 싶은대로 다해."라는 부모의 말을 들으려 했던 아동이 거룩한 환상의 부모를 만들어내 그 말을 듣게 된 일일 뿐이다. 그게 종교체험의 내용이었다는 것을 실존적 종교체험자는 이해한다.


이것은 객관적 현실에서 이제 너는 왕이라는 증명 내지 인가도 아니며, 다만 환상의 목마름이 환상의 물로 채워진 것에 다름아니다.


하나의 환상이 그에 상응하는 또 하나의 환상으로 깨어질 때, 실은 이것이 종교체험의 의미다.


우리가 깨달음과 종교체험들을 구분해서 묘사하려고 할 때 분명한 특징이 있다.


깨.달.음.은. 신.기.하.지. 않.다.


오히려 깨달음의 현상은 너무나 당연한 근본적 사실로 체험된다.


반면 종교체험들은 테마파크처럼 신기한 일 투성이다. 전생도 보고, 회전 유체이탈도 하며, 가만히 있으면 마음도 보이는 것 같은 등의 일들이 재미있게 펼쳐진다.


그래서 종교체험은 중독의 소재로 쉬이 작용한다.


체험하면 할수록 자신이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만 같아 더욱더 반복적으로 체험하고 싶어하게 된다.


이에 반해, 깨달음은 반복하지 않고 영원히 그것을 갖는다.


그.게. 이.제. 자.신.에.게.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깨달음은 깨달음이라는 환상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진다.


그러나 종교체험은 더욱더 그 체험들을 자신에게 있게 하려고만 몰두한다. 그게 지금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기보다는, 그게 있었다고 고집을 부리거나, 그걸 다시 있게 할 거라고 집착을 한다.


깨달음의 현상에서 자신에게 그게 없어도 되는 이유는 명백하다.


자신이 그것에 대한 소유권을 유지하려고 하지 않아도, 그것은 알아서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게 거기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것이 다 완벽하고 안심이 된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없고 전적으로 다 맡길 수 있어서, 자신은 자유롭다.


쉽게 비유하자면, 하늘을 알게 된 이는 하늘을 잃을까봐 노심초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는 아직 하늘을 모르는 것이다.


종교체험자들은 자신이 깨달았다고 자주 생각하곤 한다. 그렇게 그들은 '깨달은 나'가 되어 있으며, 그러한 '나'를 잃을까봐 늘 염려한다. 아무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그러한 '나'는 처음부터 있지도 않았다. 다행히도 깨닫지 않았으니 아무 염려할 필요가 없다.


깨달아 사는 이들이 공통적으로 보이는 생활양식은 거대한 존재에게 다 맡기고 산다는 점이다.


존재를 신뢰하는 만큼, 그들은 무르익어간다.


진실로, 열매를 보고 알게 된다.


이제 우리는 여기에서 해석의 가치를 논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해석은 의미를 발견하기 위한 활동이다.


의.미.란. 곧. 쓰.임.새.다.


"종교체험이 내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 말은 다음과 같다.


"종교체험이 내 삶의 어디에 갖다 쓰여야 할 것인가?"


모든 종교체험은 쓰이라고 일어난 것이다. 환상의 목마름일지언정, 그 목마름에 고통받고 있던 하나의 현실에 쓰이라고 일어난 또 하나의 유용한 환상이다.


꿈만 꾸면 늘 엄청난 갈증을 느끼던 이가, 어느날 꿈에서 바닷물을 다 들이키는 경험을 하고는 갈증이 해소되었다.


꿈에서 깬 그는 이제 특별한 권위를 가진 훈장을 손에 넣게 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이제 더는 그런 꿈을 꾸지 않아도 될 뿐이다.


그리고 더는 세상과 사람들이 자기의 끝없는 갈증을 엄마처럼 채워주지 않는다고 원망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일을 이제 그만해도 될 따름이다.


자신이 대체 어떠한 것을 체험한 것인지를 자기의 실존적 삶과 연결지어 잘 해석해낸 이는, 이처럼 환상으로 이루어진 가상의 삶을 끝내게 된다. 과거의 것을 반복하지 않는다.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그러나 자기의 체험을 잘 해석하지 못한 이는, 환상의 체험을 자기가 특별한 증거처럼 냉큼 받아먹고는 꿈속에서 자신이 한 '놀라운 경험'과 자신이 가진 '강력한 권위'를 현실에서 주장하기 시작한다. 자신이 우주의 대장이 되는 꿈을 꾸었으니, 모두가 자기를 대장으로 섬겨야 한다는 식이다.


이것은 마약중독자보다도 나쁜 상태인데, 마약중독자는 환상에 탐닉할 뿐이지, 환상의 권위를 현실화하려고 시도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대개 종교체험과 자신의 권위를 연결짓는 이들은 그래서 사이비가 된다.


체험을 정확하게 해석하지 못해 그 체험에 잡아먹힌 결과다.


이상심리학적 증세를 보이는 이들에게 종교체험은 발생할 가능성이 높으며, 누군가는 체험의 결과로 자신의 증세를 더욱 강화하게 되는 한편, 다른 누군가는 증세가 해소되어 이제 다른 건강한 이들과 같은 원점에 선다.


종교체험의 의의는 이처럼 어떤 이에게 특별함의 훈장을 하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잃어 표류하던 이를 인간의 원점에 서게 한다는 데 있다.


그러니 건강한 체험자는 다시 태어난 것처럼도 느끼게 되며, 처음으로 삶을 얻은 것처럼도 경험하게 된다. 과거는 까마득하며, 답습되지 않는다. 그는 한번 인격적 죽음을 경험하고 다시 인간을 얻은 까닭이다.


이러한 변별은 체험자가 실존적으로 살고 있는 정도와, 그렇기에 자신의 실존과 체험을 연결할 수 있는 해석의 역량에 근거해서 가능할 수 있다.


통속적으로는 몸으로 깨닫는 일과 지혜로 깨닫는 일이 다르다고 말하는데, 해석이란 물론 후자를 의미한다.


깨달음은 보편적인 메뉴얼을 통해 가능한 숏컷이 아니며, 자신이 정직하게 살아온 구체적인 삶을 통해서만, 그 눈물을 통해서만 깨닫게 되는 것인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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