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NMS #4

"사람들을 가장 힘들게 하는 스토리텔링"

by 깨닫는마음씨


photography-meg-loeks-02-805x554.jpg?type=w1600



"우리 XX 하고 싶은 거 다 해."라는 밈이 있다.


이 표현은 오늘날 가장 집단의식의 근간에 작용하고 있으며 그렇게 사람들을 가장 힘들게 만드는 스토리텔링이 무엇인지를 시사한다.


양육지상주의.


이 스토리텔링에 입각해 부모는 다 큰 자식을 구하기 위해 빔을 쏘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초능력자가 되어야 하며, 다른 부모처럼 아이언맨이 아니라 호크아이라는 이유로 죄책감의 밤을 밝혀야 한다.


실제의 아이가 없는 이들에게도 이 스토리텔링은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아이라고 하는 소재는 내면으로 들어와 심리적 소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내면아이, 소인격체, 분아 등의 개념들은 이 심리적 아이를 묘사한다.


우리는 자신의 인생이 막히고 갈등을 경험할 때마다 자기 안의 심리적 아이를 찾곤 한다. 그 아이가 충분히 사랑받지 못했고 차가운 곳에 홀로 방치되어 있었기에 현재의 문제들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인과관계를 구성하곤 한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인과관계다.


내면아이에게 문제가 있기에 현재의 문제가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문제가 있기에 내면아이를 문제삼는 것이다.


이 스토리텔링은 지극히 과거퇴행적이다.


퇴행은 과거에 대한 집착이다.


과거를 치유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실은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다.


왜인가?


과거에는 아이가 경험할 법한 작은 문제밖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에는 감히 다루지도 못할 커다란 문제들로 가득하다.


특히나 오늘날에는 가상현실의 범람으로 인해 생활의 기준점이 과잉되게 높아졌다. 단순히 행복의 기대치가 높아졌다는 정도가 아니다. 사람처럼 보일 수 있을 만한 최소한도의 체면유지를 위한 기준이 높아졌다는 의미다.


게임이라고 하는 가상현실의 문법에 익숙한 아이들은 현실에서의 자기의 행복도 게임의 획득물처럼 쉬이 간주한다. 그러나 삶은 게임이 아니며, 시간과 노력을 기울인다고 성공이 보장되는 알고리즘은 없다.


아이들은 번번히 삶에 좌절하며, 자신이 왜 남들처럼 행복하지 못한지에 대한 상대적인 비교가 낳은 열등감에 사로잡힌다. 부모와 사회는 '약속된 낙원'을 만들어주지 못한 무능한 게임마스터다. 이러한 게임마스터를 의지하느니 차라리 자신이 숏컷을 만들겠다고 아이들은 다짐하다가, 결국에는 인실좆을 경험한다.


어마무시하게 커진 이 가상현실의 행복을 이루지 못해 절망하는 아이들을 보며 부모도 똑같이 절망한다. '하고 싶은 것'을 얘기하는 대신에 '할 수 없는 것'을 얘기해야 하는 일은 이들에게는 차마 불가능한 일이다. 미디어에 나오는 다른 부모들은 아이들이 하고 싶은 것을 충족시켜주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아이뿐만 아니라 부모도 이 '환상통'에 시름한다.


그러다가 이 모두는 내면아이로 눈을 돌리게 된다.


이것은 퇴행이며, 분명한 현실회피다.


자기의 내면에 가상의 아이를 만들어내, 그 아이를 다마고치처럼 처음부터 건강하게 양육하는 게임을 모두가 시작한다.


흡사 주술과도 같이, 내면의 아이를 성공적으로 키워내면 외부의 현실도 마법적으로 바뀔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강남 5성 호텔에 트위터에서 만난 성향자와 함께 호캉스를 가서 비키니를 입고 장미잎이 뿌려진 욕조에서 돔페리뇽을 따지 못해 내면아이는 과거에 "이 바보야."라고 엄마에게 들은 말을 끝없이 고통의 소재로 반추하며, 엄마도 내가 그 착하고 약한 아이에게 어찌 그런 심한 말을 했을까를 끝없이 고통 속에서 반성한다.


엄마가 할머니에게 사랑을 받지 못해서 사랑하는 법을 모르게 되었기에 너한테도 그만 잘못을 저질렀어, 라며 엄마의 내면아이도 호소된다. 내면아이들이 만나 서로를 끌어안고 울며 무대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이 내면아이들이 충분히 행복할 수 있도록, 연봉 3억을 넘기지 못한 아빠가 전적으로 문제가 크다.


결국 내면아이가 지구촌의 문제로 확장되는 데는 순식간이다.


누구도 갖지 못한 가상현실의 행복 앞에서 모두의 내면아이는 한없이 불쌍한 존재가 되며, 지구촌은 죄책감 속에 침묵한다.


대체로 이것은 이 정도로 정신나간 스토리텔링이다.


외로우면 인간은 조금 이상해지는데, 이 말을 다시 이해할 수 있다.


먹고 살만해지면 인간은 조금 이상해진다.


생존에 정말로 쫓기고 있을 때는 이상해질 겨를이 없다. 정신건강은 튼튼하다.


영양이 충분히 공급되어 개체가 건강하고 그 생활에 여유라는 것이 생겨나면, 인간에게는 여백의 시간을 사용해야 하는 과업이 조우된다. 이것이 오늘날의 인간에게는 아직 낯설다.


여백의 시간이라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는 외로움 또는 지루함의 시간으로 곧잘 인식될 뿐이다. 이 시간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몰라 정신없이 분주한 이들에게는 ADHD라는 이름이 붙기도 한다.


그런데 이 여백의 시간은 실은 자기 자신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이다.


이 시간이 낯선 이유는 우리가 자기 자신을 만나볼 기회가 많이 없었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어색하고 낯선 것이다.


낯선 것과 처음 만날 때는 늘 긴장이 수반된다.


특히나 가상현실의 기준에 따라 만들어낸 가상의 정체성을 자기라고 믿고 있던 이들에게는, 이 실제의 자신을 만나는 경험은 심지어 두렵기까지 한 것이다.


그러니 이 여백의 시간을 다른 소재들로 끊임없이 채워넣어서 어떻게든 자기 자신을 만나지 않으려는 시도들이 생겨난다. 멍하니 유튜브나 게임방송 등을 보고 있는 현실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내면아이는 다시금 이 지점에서도 활약한다.


우리는 실제의 자신을 만나기보다는, 가상으로 만들어낸 내면아이를 만나려고 한다.


자기가 자기이기보다, 자기가 자기에 대한 양육자이려고 한다.


이것은 아무 교묘한 분열이다.


자기를 사랑해야 한다는 말 등으로, 이 자기에 대한 양육행위는 쉬이 정당화되곤 한다. 그러나 이것은 피양육자로서의 자기를 대상화한 분열일 뿐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드높은 가상의 정체성을 현실화하지 못해 생겨난 무력감 및 수치심 등은 흡사 내면아이의 것처럼 형상화되며, 또 실체화된다.


가상의 기준이 낳은 비실재적 고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피해자'가 정말로 있는 것처럼 내면아이의 모습으로 실체화함으로써, 그 고통은 더욱 공고화되는 것이다.


있지도 않은 아이의 울음소리를 매일 환청으로 들으며 고통받게 되는 상태와도 같다.


실제의 자신을 만나는 것이 고통스러운 일이라고 착각해버린 결과, 우리는 이처럼 더 큰 고통을 만들어내게 되고, 또 그 고통을 해결하고자 더 큰 힘을 소비함으로써 더욱 고통스러워지는 악순환을 이루게 된다.


이것은 게임중독의 양상이다.


실제의 자신으로부터 도망가기 위해 게임을 하며, 그러다보니 실제의 자신이 더 초라하게 느껴져 더욱 게임에 사로잡히게 되고, 결국 실제의 자신에게 가야 할 힘과 자원을 게임에 대신 쏟아붓게 되는 모습이다.


이 고된 게임의 이름이 바로 양육이다.


그리고 육성시뮬레이션게임처럼 모든 것을 키우며, 나아가 자기 자신조차도 키우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바로 양육지상주의의 스토리텔링이다.


이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유익하다.


자신을 똑바로 보려 하지 않는 이가 자신을 키우려고 하게 된다.


자신을 만날 수 있는 기회인 여백의 시간을 정확하게 활용하여 자신을 보게 된 이는 알게 된다.


이미 잘 자라서 키울 것이 없음을.


이것은 다분히 역설적이다.


자신을 보고 싶지 않아서 자신으로부터 늘 도망치는 이에게는, 자신이라는 것이 늘 키워져야 할 아이처럼만 생각된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 자신을 한번 봐보려고 하는 이에게 자신은 언제나 대견하고 듬직한 것으로 비친다.


자신을 똑바로 보려고 하는 그 의도, 바로 그것이 발달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게임속에서 레벨을 높게 올린다 해도 다 의미없는 일이다. 내면아이를 충족시켜주기 위해 아무리 하고 싶은 걸 다 하게 해준다 해도 전적으로 무용한 일이다.


나이 40이 넘은 아저씨가, 자기의 내면에 있는 아이가 교복입은 여고생과 사귀고 싶어한다고, 그 소망을 이루게 되면 어른이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는 장면을 떠올려보라.


이 장면은 충분히 끔찍한 공포영화로 우리에게 인식되는데, 왜 우리는 "당당하게 당신 내면의 이야기를 하세요!"라는 말은 동일한 끔찍함으로 받아들이지 않는가?


SNS 등지에서 펼쳐지는 각종 아재들의 그로테스크한 내면아이 파티들에는 왜 동조하고 있는가?


내면아이가 불쌍한 것이 아니라, 내면아이들에게 테러를 당하고 있는 우리의 처지가 불쌍한 것이다.


이처럼 이 양육지상주의의 스토리텔링은, 불쌍한 것들이 꿈을 펼칠 수 있게 하는 스토리텔링이 아니라, 우리를 불쌍하게 만드는 스토리텔링이다.


우리가 여기에 동조해있을 때, 우리는 자기망각의 의도를 다분히 내포한다.


턱없이 높아져버린 행복의 기준을 달성할 능력이 없는 초라한 자기 자신을 망각하고 싶은 의도가 내면아이의 게임에 우리를 쉬이 빠지게 한다.


그러나 딱 한 번이다.


실제의 자기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데는 딱 한 번의 정직한 시선만 요해진다.


아무리 거대한 스토리텔링이 지배하더라도, 단 하나의 정직한 시선은 그 모든 지배력을 붕괴시킨다.


단 하나의 문제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우리가 더 큰 형태의 무수한 문제들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심리학의 국룰이다.


심지어 그 하나의 문제는 문제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신비라고 불리는 종류의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환상의 게임 속에서 잘 양육하는 척하면서 행복을 위장할 것인가, 아니면 실제의 우리 자신으로서 신비롭게도 그냥 행복해버릴 것인가, 이것이 우리의 선택이다.




nms.JPG?type=w1600


keyword
작가의 이전글깨달음의 심리학 #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