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런 것도 잘나가는데"
"우와, 대단하다."
우리가 사이비를 처음 보게 될 때의 감상은 이게 아닙니다. 이것입니다.
"병신같은 게 왜 잘난 척하지?"
물론 이 반응은 지금 이러한 글을 볼 때도 생겨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대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사이비는 그러한 병신같은 모습으로 돈을 벌고, 인기를 얻으며, 그것들을 과시합니다.
사이비는 못나고, 멍청하며, 어설픈 자신의 모습을 숨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들을 중요한 소재로 씁니다.
바로 '어그로의 소재'로 씁니다.
이를테면, 사이비를 본 어떤 이는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나보다 잘난 것도 없는데 왜 저게 돈을 벌고 인기를 얻고 있지?'
그러다가 이 생각은 다음과 같은 형태로 발전하게 됩니다.
'저런 병신도 돈을 벌고 인기를 얻는데 나는 대체 뭐냐?'
열등감이 가득 차오르고, 분노로 얼굴이 뜨거워집니다.
이러한 이가 사이비의 제자로 들어가게 되는 순간은 그리 멀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질투라는 감정이 크게 작용합니다. 사이비는 정확하게 이 질투의 감정을 자극해서 자기에게로 관심을 집중시킵니다.
이른바, 사이비가 뭔가 어설프게 보이는 것은 그의 전략입니다.
어그로에 낚여 사이비의 세력에 합류하게 되는 이들은 '나도 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쟤보다 잘났으니 내가 직접 하면 더 성공할 수 있을 거야.'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정확한 질투의 생각입니다. 이 생각에 빠져 있는 한, 끝없이 사이비에 착취되는 현실만이 생겨납니다.
사이비의 기질은 일종의 예능인과도 같습니다.
물론 외모나 기술이 발달해 있었더라면 그는 예능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없기에 그는 사이비로 예능인의 꿈을 이루려고 합니다.
그 핵심은 어그로가 끌릴 소재를 총동원해 자기를 끊임없이 전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런 자기가 이미 잘 나가는 인물인 것처럼 스스로를 계속 포장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모습은 분명 한없이 병신같아 보이나, 그렇기에 어그로로는 충분히 효과적입니다.
어떤 이들은 그 모습에 자기를 투영함으로써 못난 자기도 저 사람처럼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아 사이비를 찾게 되며, 또 어떤 이들은 전술한 것처럼 사이비에 대해 배알이 꼴려 사이비를 찾게 됩니다. 전자는 소극적인 질투이고, 후자는 적극적인 질투입니다. 어느 쪽이든 간에, 사람들의 질투심을 공략하고자 하는 사이비의 전략은 성공합니다.
사이비가 이러한 전략을 취할 수 있는 것은 당연히 그가 가장 질투심이 많은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역량도 없고, 노력도 하지 않았지만, 사이비는 좋아보이는 것은 자기가 다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보통 이러한 사이비의 생태는 그의 형제자매 역동에서 파생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들러는 이 지점에서 매우 정확하게 설명합니다.
자신의 형제자매가 자기보다 더 부모의 사랑을 받는 일을 용납하지 못하는 이는 이러한 질투심을 주된 역동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즉, 이 질투심은 부모의 관심을 독점하겠다는 욕망이 만든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역량으로 형제자매를 이기지 못할 것 같은 질투심의 주체는 열등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러다가 그는 언어적 술책을 통해 분열을 조장하는 일을 기획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이간질'입니다. 거짓된 말로 선동해서 자신을 제외한 형제자매 사이에, 또 형제자매와 부모 사이에 갈등을 낳는 일을 그는 꾀돌이처럼 꾀합니다.
나아가 그렇게 자기가 말로 분열시킨 대상들을 또 자기가 각기 말로서 풀어주는 역할마저도 하게 됩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는 가정의 모든 이에게서 자신이 마치 가장 중요한 존재인 것처럼 입지화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질투심이 향하던 그 정확한 목표입니다.
그는 이제 모든 이의 관심을 받는 일에 성공하여, 자기 자신을 위대한 권위를 가진 존재인 것처럼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우호적인 관심이든 비우호적인 관심이든 간에, 자기가 모든 이들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사람인 것처럼 상황이 만들어지면 그의 질투심은 충족됩니다.
이것이 사이비가 활동하는 모든 장면에 내재되어 있는 역동입니다.
사이비가 흥행하는 것도 이 역동 때문이고, 또 사이비가 무너지는 것 또한 이 역동 때문입니다.
모든 이의 애정과 증오를 동시에 빨아먹으며 버틸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신이 가장 많은 에너지를 흡혈하고자 하는 질투의 기생충은 빠르게 그 몸집을 키워가지만, 빠르게 그 몸체가 터집니다.
이것은 독재의 말로이기도 합니다.
모든 독재자는 질투심의 화신입니다. 자기가 가장 중요한 존재가 되어 모든 것을 알아줌으로써 모든 관심을 독차지해야 한다는 발상이 독재를 낳습니다.
"그치만 오니짱 이러지 않으면 나에게 관심도 없는 걸."
징그럽게도 독재자들의 가슴에는 이러한 뜨거운 영혼이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질투는 언제나 몸을 뜨겁게 만듭니다.
그래야 그 뜨거움이 실은 수치심에서 비롯한 것이라는 사실을 숨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녀를 화형시키던 장면을 떠올려볼 수 있습니다.
마을에서 가장 아리따운 여성들은 온갖 성적 추문의 모함을 받고 악마의 섹파라는 오명을 쓴 채 화형대에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질투가 만들어낸 이 뜨거운 불길 속으로 마을주민들은 자기가 저 여성만큼 매력적이지 않아 못났거나, 또는 저 여성을 취할 만큼 능력이 없어 못났다는 수치심을 함께 던져대 그것이 없는 것처럼 지워갔습니다.
사이비가 하는 일이 이러한 것입니다.
그는 자기의 질투심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대신 다른 이들을 수치스럽게 만듭니다. 영문도 모른 채 저 병신같은 사이비보다도 더 못나지게 된 것 같은 이들은 열등감에 끙끙 앓다가 결국 질투의 불길을 더욱 크게 만드는 행렬에 합류하곤 합니다.
질투의 메시지는 "내가 다 가져야 해."라서 이것은 마치 생산적인 일처럼 착각되지만, 그 실체는 "나는 못났어."라는 수치심일 뿐입니다. 근본적으로 못났으니 다 가져서 잘난 것처럼 만들려고 하는 일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전적인 부정의 의도가 여기에는 담겨 있습니다.
사이비가 광대처럼 수치스러운 장면을 만들어내 어그로를 끌고 있는 것은, 실은 자기 자신을 조롱하고 있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 조롱의 방식으로 그는 자신과 사람들을 부정합니다.
이 인간부정을 낳는 수치심은 아동기의 잔재입니다.
"부모에게서 효과적으로 관심을 받지 못하는 것은 내가 못났기 때문일 거야."와 같은 식의 유아적 인식이 만들어낸 산물일 뿐입니다.
이러한 명제가 정당한 인식인 것처럼 굴절된 이는, 이제 자기가 사람들로부터 관심을 받지 못할 때 수치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질투의 불길을 당겨 그 열기에 도취된 뒤 각종 광대짓을 펼치며 수치심을 다른 이들에게 전가시키려고 시도합니다. 다 인간을 포기한 채 자기와 똑같은 광대가 되게끔 획책하고자 합니다. 그래야 선배광대인 자신이 선배로서의 인기와 권위를 얻을 수 있어서입니다.
이처럼 사이비들이 인기와 권위에 집착하는 이유는, 더 많은 대상이 자기에게 관심을 갖고 필요로 해주어야 자기는 잘난 존재가 되며, 그렇지 않으면 자기가 못난 존재가 된다는 대상지향적 생각 때문입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대상에게 자신의 존재를 위탁하는 이 일을 하고 있기에, 사이비는 자신을 못난 존재로 경험하게 됩니다.
즉, 여전히 자신을 부모에게 위탁하는 아동기와 같은 양식으로 살아가고 있기에, 그에게는 아동기의 인식이 계속해서 작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이비 현상은 정확하게 심리적 미발달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아동이 자라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아동에게 집착하고 있는 것입니다.
피터팬이 원래 모기처럼 앵앵 잘 날아다니는 어그로의 제왕입니다.
잘난 것이 아니라 잘 나는 것입니다. 추락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