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에 대한 오해들과 정직성들"
1. 영성이란 것이 있는가?
이것은 "마음이란 것이 있는가?"와 같은 질문이다. 그런 실체는 없지만 '그렇게 보이는 작용'은 있다고 말하는 것이 정직하다.
2. 영성은 발달하는가?
이것은 아주 섬세한 접근을 요하는 질문이다. 티라노사우루스보다 인간은 발달한 생명체인가? 아메바보다 인간은 높은 영성을 가진 존재인가? 우리가 영성을 더 복잡하고 분화된 고등개념들을 내포한 개체적 특성으로 정의한다면 그렇게도 말할 수 있지만, 영성을 '생명성 그 자체'로 이해한다면 그렇게 말하기만은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전자의 많은 경우 영성이란 '더 상위의 지성'을 뜻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이러한 발달의 용법은 의심되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근대적 이성'에 대한 찬미의 잔재가 있다.
3. 특정한 개인적 노력을 통해 영성을 높일 수 있는가?
혼자 열심히 하면 성장한다는 도식은 지극히 근대적이다. 이것은 심지어 자연계의 사실과도 맞지 않는다. 생명체는 환경과의 '상호작용' 속에서만 변화되어 간다. 모든 노력은 적응을 위해서만 그 정당성을 가질 뿐이다. 우리는 '상호관계성'이라는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자신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저쪽'에서도 움직이고 있다. 아무리 크게 잡아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50%에 불과하다. 그 50%의 운동 또한 자신의 성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저쪽'과 만나기 위해 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움직인 결과는 '조화로움'이다. 영성은 이 '조화로움'과 관련된 성질이다.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어울려지는 것'이다. 혼자 하는 연애는 불가능하며, 애초 성립조차 되지 않는다.
4. 의식수준이 높아지는 것이 영성의 발달을 의미하는가?
의식수준이 높아진다는 말이 갖는 전제는 '의식은 실체적 소유물'이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의식은 환경과의 상호작용에 따라 늘 변동한다. 심전도 그래프와 같다. 그리고 심박동수가 높아지는 것이 건강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듯이, 의식수준이 높다는 것이 항구적인 '좋은 상태'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자율신경계로 비유하면 분명하다. 필요에 따라 자율적으로 이루어지는 높은 의식수준과 낮은 의식수준이 있는 것이지, 그 둘 사이에 우열이 있는 것이 아니다.
5. 몸에 기억된 트라우마들을 해소해갈수록 영성이 높아지는가?
이것은 영성이라고 하는 것을 '관찰자적 주체'의 기능과 동일시한 이해의 결과다. 이러한 주체는 자기는 몸이 아닌 것처럼, 몸을 대상으로 삼아 내러티브화한다. 곧, 몸은 무수한 이야기들의 소재이고, 자기는 그러한 이야기들을 참되게 읽어내려가는 신성한 독자인 것처럼 가정하는 것이다. 이 또한 아주 근대적인 방식이다. 정신이 육체를 알아줌으로써 통합한다는 발상이다. 오늘날의 이해는 그렇지 않다. 몸은 스스로 활동하고, 스스로 치유한다. 친절한 정신이 가엾은 육체의 이야기를 알아주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몸이 스스로 친절하다. 이 '스스로'의 감수성을 신뢰하는 만큼 우리는 '영성적'이다.
6. 영성은 메타인지인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메타인지를 발달시키는 방법론들이 그 방식으로 발달하게 되는 것이 영성이라고 주장한다 하더라도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발달되는 것은 단지 메타인지일 뿐이다. 영성이 '앎'이 아니라 '삶'의 차원에서 활동하는 그 무엇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일은 중요하다.
7. 영성은 통합적인가?
영성의 덜 수상해보이는 좋은 대체어는 분명 '전인성'이다. 이 전인성이라는 표현은 마치 통합주의를 의미하는 것처럼도 생각된다. 이를테면, 지성, 감정, 의지, 육체, 또는 소마, 그림자, 아스트랄한 소재들을 포함해, 인간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를 하나도 소외시키지 않고 다 포괄해서 이해하는 것이 인간에 대한 전인적 이해라고 대개 주장되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실은 전인성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다. 전인성의 정확한 뜻은 '분리불가능성'이며 '대체불가능성'이다. 이것은 딱딱 나누어 떨어지는 요소들의 통합을 뜻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아주 두루뭉술하고 애매한 통째를 뜻한다. 전인성은 차라리 모호성(ambiguity)이라고 표현되는 것이 타당하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듯, 이것은 바로 우리 삶의 속성이다. 영성은 개인의 자신의 삶과 일치한 그 정도에 대한 묘사다.
8. 영성은 삶을 초월하는가?
이 또한 절대로 그렇지 않다. 영성은 삶 그 자체다. 구체적인 자신의 삶에 대한 긍정, 긍정, 또 긍정의 감각이, 아마도 우리가 영성이라는 것을 지표화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준일 것이다. 적어도 니체에게는 그러했다. 대단히 높은 영성을 갖고 있다고 주장되는 이가 그 삶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가? 불가능하다. 누군가가 윤리적이고 미학적으로 발화하는 고급언어가 그의 영성수준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이 말해주는 것이다.
9. 진보적 정치성향을 갖고 있으면 더 영성적인가?
그렇지 않고, 한 개인의 정치성향은 다만 그가 무엇을 더욱 실체적인 정답으로 가정하여 그것에 집착하고 있는지의 정도만을 보여줄 뿐이다. 마찬가지로 진보적 정치성향의 인물들을 좋아한다고 그가 영성이 높은 사람이거나 깨달은 사람인 것은 아니다. 정치성향과 영성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10. 그런데 진보적 성향을 가진 이들은 더 영성지향적 활동을 많이 하지 않는가?
우리는 여기에서 '영성의 담론화'라는 중요한 주제를 만나게 된다. 이것은 영성이 일종의 권력게임의 소재로 활용되는 현상을 뜻하는 것이다. 아주 많은 경우 권력게임에의 의도를 지속하고 그러한만큼 게임의 패배를 거듭해온 이들이 최후의 카드로 꺼내는 것이 영성이라는 조커패다. 이것은 흡사 돈과 권력에 관심이 없는 투명하고 맑은 선비와 같은 정체성을 연출하는 일에도 유용하게 기능한다. 자신이 가장 높은 권위를 얻고자 하는 목적을 가진 이에게 영성은 일발역전을 꿈꿔볼 수 있는 패다.
11. 그렇다면 보수적 수구꼴통의 정치성향을 가진 이들이 영성적이라는 말인가?
대한민국의 유일한 문제는 정치병원이 없다는 것이다. 수구꼴통들과 같이 내원하며 꾸준히 약 먹으면 좋아질 수 있다. 모든 심리적 증세는 경계의 뒤섞음에서 온다. 정치성향과 영성은 경계가 분명한 것이며, 이 경계를 존중할 수 있으면 영성적이다.
12. 영성은 세상의 문제를 무시하고 산에 들어가 혼자 도사처럼 여여하게 사는 것인가?
선비들이 그러했다. 자기 뜻대로 세상이 안될 때마다 화가 많이 나서 산속에들 많이 틀어박혔다. 우리는 한 개인이 세상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 실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하이데거의 도움을 통해 발견한다. 자기를 문제로 보고 통제하려 하는 이가 세상도 문제로 보며 통제하려 하게 된다. 이들이 산속으로 들어가는 이유는, 속세는 복잡한데 산속은 단순해서 그편이 더욱 자기를 통제하기에 수월하다고 생각한 까닭이다. 반면, 영성은 세상 속에 있다.
13. 영성은 이 악하고 못난 세상도 넓은 자비심으로 수용하는 것인가?
세상이 영성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성이 세상 속에 있다. 가장 권위를 얻고 싶어하는 이가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는 자로서 자기를 설정하곤 한다. 그러나 틸리히는 수용의 개념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말한다. '수용할 수 없다는 사실을 수용하는 것'이 진짜 수용이다. 영성은 '할 수 있음'이 아니라 '할 수 없음'으로 신장된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없음을 수용할 때 비로소 자신에게로 돌아오게 된다. 영성은 악하고 못난 세상에 자비심을 내는 것이 아니라, 악하고 못난 세상에 살고 있는 그러한 우리 자신에게 자비로운 것이다.
14. 재미있는데 다 거짓말일 수 있지 않은가?
영성은 <인생은 아름다워>의 귀도 같은 것이다.
15. 영성은 거북이가 자는 토끼를 깨워 어깨동무를 하고 함께 가는 것인가?
자신이 도덕적 우위를 점해 하늘로부터 받은 토끼의 재능인 빠른 발을 억지로 봉쇄하여 역평등의 현실과 정신승리를 실현하려는 거북이의 의도가 중지되면 영성적이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토끼와 거북이 사이에 서로의 경계가 존중되면, 그래서 서로 남의 것을 탐내며 비교하지 않으면 이는 영성수준이 높다고도 말할 수 있다.
16. 거북이가 자기의 한계를 초월해서 토끼를 달리기에서 이길 수도 있는 자유가 영성이지 않은가?
우리는 인간이다. 땅에서는 토끼에게 지고, 바다에서는 거북이에게 진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100%로 인정하고 그것들과 싸우지 않을 수도 있는 자유가 있다.
17. 영성이 높아지면 깨닫게 되는가?
영성이라는 것이 임의적인 발달지수로 평정되는 소재로 가정된다면 이러한 영성의 수준과 깨달음에는 아무 상관이 없다. 학습력의 수준에 따라 서울대에 가는 문제와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는 것이 좋다. 깨달음은 발달이 아니다. 그러나 깨달음은 발달 속에 늘 있다. 발달은 깨달음으로 안내되어 간다. 그러나 발달의 끝이 깨달음인 것은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삶을 언제 완성되었는가라고 느끼는 그 문제와 동일한 성질의 것이다. 높아져서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니라, 깨달으니 높은 것이다. 그 삶이 정직하게 일치된 정도가 아주 높다.
18. 종교체험 내지 신비체험의 여부가 누군가의 영성수준을 말해주는가?
체험이 있는 만큼 자신의 영성수준이 높아졌다고 생각하는 경우는 빈번하다. 재미있는 점은 자신이 획득하는 수준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다만 자신의 삶을 사랑하며 사는 이에게는 체험이 더 쉽게 그리고 더 많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어떤 이가 자신의 체험에 집착하지 않는 정도가 그의 영성수준을 말해준다.
19. 영성이란 대체 무엇인가?
삶을, 자신만의 고유한 시간을 느끼고, 아끼고, 사랑할 줄 아는 그 감수성이다. 삶이라고 하는 자신에게 단 한 번뿐인 것을 단 하나만의 것으로, 그렇게 가장 거대한 것으로 환대할 줄 아는 그 감수성이다. 삶을 통제하거나, 게임처럼 조종하거나, 자기의 액세서리로 삼으려 하지 않고 귀한 그대로 귀하게 여길 줄 아는 그 감수성이다. 자기가 가장 큰 것이 되어 있는 왕좌에서 내려와 언제나 자기라고 하는 왕국 밖에 있는 가장 큰 것을 향할 줄 아는 그 감수성이며, 그 가장 큰 것만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그 감수성이다. 매일매일 사랑을 배워가는 그 감수성이다.
20. 영성을 한 마디로 한다면 무엇인가?
영성은 타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