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이지 않아도 괜찮을까?"
마스다 미리의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의 질문을 바꿔서 이렇게 물어보자.
"주인공이지 않아도 괜찮을까?"
오늘날 우리가 가장 심리적 압박을 받는 것이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것은 일종의 강박이 되어 있다. 이를 '주인공강박'이라고 표현해볼 수 있다.
이 주인공강박에 따라, 주인공이 되는 일이 진정한 내가 되는 길이라고 착각되기도 하면서, 주인공으로 살지 못하면 줏대가 없고 무능한 인생으로 간주되는 인식도 팽배하다.
때문에 적지 않은 이들은 주인공이 되고자 편법을 동원하고 타인을 약탈하는 일도 서슴치 않게 된다.
이러한 상황들이 자주 펼쳐지는 무대는 바로 '관계'다.
우리는 관계를 통해 서로 자기가 주인공이 될 수 있기를 꿈꾼다. 아니, 관계를 맺고 있는 각자는 이미 자신이 바로 관계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한다.
그로 인해, 자기가 주인공이 될 '권리'를 실현하기 위해 관계를 맺어 타인을 착취하고 남용하며, 또 자신을 주인공으로 만들어주어야 할 '의무'를 똑바로 수행하지 못한 타인을 원망하고 배신하는 일이 관계에서는 늘 펼쳐진다.
주인공강박에 빠진 주인공의식에서는 이것이 당연하게 생각된다. 자기만이 중요한 존재이고, 나머지는 자기를 위해 봉사해야 할 엑스트라들이기 때문이다.
조금 더 교묘한 주인공들은 엑스트라들에게 '파티'나 '동료'라는 이름을 붙인다. 우리 모두가 평등한 주인공이라는 식으로 말한다. 그럼으로써 엑스트라들이 그들의 가치를 알아주는 자기에게 자발적으로 봉사하게 되는 현실을 기획한다.
그러나 '모두가 다 주인공'이라는 말만큼 공허하며 전적으로 거짓인 말이 달리 없다.
주인공이라는 것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입장이다. 빛과 관심의 열기가 그에게 집중적으로 조명된다. 그럴 때만이 주인공은 자기를 주인공으로서 경험한다.
이것은 인위적인 빛의 작용을 전제한다. 자연스럽지 않다.
태.양.빛.은. 모.두.에.게. 이.미. 똑.같.이. 내.리.쬐.고. 있.다.
그러니 모두가 다 주인공이라는 말은 애초에 할 필요도 없는 말이며, 모두가 다 주인공이니 결국 누구도 특별한 주인공이지 않다는 말과 동일한 것이다.
그러한 말을 발화하는 이는 결국 자기만이 진주인공이 되고자 하는 의도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모두가 다 주인공이라는 스토리를 사람들에게 열렬히 보급하는 이가 있다. 그는 그 스토리의 작가로서 자신이 제일 큰 관심을 얻고 싶어하는 것이다. 사람들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은 그 환상을 통해 사람들로부터 인기와 권위를 얻어 자기가 가장 특별해지기를 꿈꾸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모두가 다 주인공'이라는 스토리의 보급자들은 더 많은 사람들을 착취해나간다. 사람들에게 약탈한 힘을 통해 자기는 주인공처럼 행세할 수 있게 된다.
주인공이라는 것이 바로 이와 같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한 개인에게 주인공이 된 듯한 특별함을 제공해주는 소재가 있다고 할 때, 그것은 모두가 똑같이 다 가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이미 그것은 특별해지지 않게 된다.
따라서 한 개인이 주인공의 특별함을 얻었다는 것은, 그 대신 다른 누군가가 그것을 얻지 못했다는 사실을 뜻한다.
타.인.에.게.는. 상.실.인. 것.이. 주.인.공.에.게.는. 획.득.이. 된.다.
그렇게 보자면 주인공이라는 것은 타인의 실패와 좌절 그리고 불행에 빌붙어 사는 기생충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유명한 단편 「거미줄」에서 자기만 특별한 구원을 얻기 위해 다른 이들을 내치고 짓밟는 이의 모습을 목격한다.
정확하게 이것이 주인공의 모습이다.
주인공의 다른 이름은 심리학적으로 '자아'라고 명명된다.
자아는 강박적이다. 다음과 같은 자기명령에 강박적으로 몰두하는 것이 바로 자아다.
"나는 특별해야 해."
자아는 오직 이 원리로만 행위한다.
자아가 생존과 관계된 현실원리로 작동한다고 정신역동적 관점에서는 말하곤 한다. 이 말과도 상응한다.
다른 형제자매들보다 특별해서 눈에 띄면 그 개체는 더욱 효과적인 생존이 담보된다. 여기저기 '눈치를 보며' 조율해서 자기와 관계된 모든 이에게 '좋은 사람'으로서 특별하게 인식되면 생존은 보다 성공적이다. 특히나 오늘날 자기의 특별함이 공공에게 노출되는 일이 자원의 획득여부로 직결되는 미디어문화 속에서는 자아는 더욱 이 생존의 원리를 정당화해나갈 수 있게 된다.
관계라고 하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때 문제가 되는지를 떠올려보자.
자.아. 대. 자.아.가. 충.돌.할. 때.다. 관계는 이 자아들의 전쟁터가 되어 있다. 자기는 상대에게 힘을 뺏겨 엑스트라로 전락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하면 상대에게서 힘을 약탈해 주인공이 될 수 있을지를 겨루는 암투와 모략의 장이 오늘날의 관계다.
자아는 이처럼 관계를 남용해야 특별함을 얻을 수 있기에 그만큼 관계에 의존하고 집착한다.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예.찬.하.는. 것.은. 언.제.나. 자.아.다.
그래서 '주인공강박'은 반드시 '관계중독'으로 연결된다.
아주 쉬운 예가 있다. 자기가 주인공이 되고자 하는 자아는 예의바르게 SNS 순례를 하며 기존 팔로워들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더 많은 팔로워들을 만들고자 하는 일에 신경증적으로 매진한다. 자기의 이웃들을 예찬하는 방식으로 실은 자신이 얼마나 특별한 존재인지를 교묘하게 선전하는 일을 하루라도 멈추게 되면 초조감이 밀려와 견딜 수가 없다. 이것은 전형적인 관계중독의 증세다.
근본적인 얘기를 잠깐 해볼 수 있다.
마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말할 수 있다.
마.음.은. 가.능.성.이.다.
이것은 마음은 소망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다.
그리고 관계는 그 가능성이 꽃필 수 있는 하나의 터전이다.
마음이라는 씨가 관계라는 밭에 뿌려져 꽃이 피어난다. 가능성이 실현된다.
관계라고 하는 것의 근본은 이처럼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었다.
그러나 혼자서는 실현이 불가능했던 가능성들을 관계를 통해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꾀돌이들이 출현해 이제 관계를 자기들의 도구로 남용하게 되는 일이 펼쳐졌다. 이것이 관계의 몰락이다.
몰락한 관계는 '게임'이라고 불린다. 교류분석의 에릭 번은 이 게임의 속성을 가진 관계에 대해 잘 묘사한다. 게임은 결국 자기가 승리하기 위해 하는 것이다. 승리의 조건은 바로 '특별함의 획득'이다. 자기를 비극적으로 만들거나 피해자로 만드는 역기능적이고 자기파괴적인 행위를 '적극적으로' 이루면서까지도 특별함만 얻으면 승리의 조건이 달성된다.
이러한 게임은 마치 삼류연극판과도 같다.
저마다 자기가 주인공이라며 과잉된 연기를 펼치고 진부한 대사들을 읊어댐으로써 스포트라이트가 어떻게든 자기에게 향하도록 하려는 그 의도로만 가득하다.
어그로꾼들의 파티현장이다.
인간에게 있어 생애 최초의 어그로는 어떻게 시작되는 것일까?
그것은 엄마를 향한 유아의 몸짓으로 출현한다.
어그로를 잘 끌어 엄마의 관심을 자기에게 지속시켜야 유아의 생존은 보장된다. 생물의 유체들은 생김새부터가 어그로다.
자아는 이러한 양육관계로부터 만들어진다. 그래서 초기의 자아는 자기가 우주에서 가장 특별한 존재라는 환상을 품게 된다. 그러다가 유년기를 통과해 청소년기로 접어들면서 자아는 자연스럽게 이 '유아적 전능감'의 해체를 경험한다. 결국 자아의 특별성이란 엄마의 품안에서만 성립되는 기제라는 것을 자아가 현실적으로 이해하게 되는 까닭이다.
자아가 이처럼 자기의 특별성을 포기하지 않을 때 이는 발달장애가 되며 심리적 문제를 야기한다.
아예 정신분석의 목표는 나이가 들어서도 해체되지 않고 지속되고 있는 내담자의 유아적 전능감을 성공적으로 좌절시키는 일이기까지 하다.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재양육'은 자상한 부모처럼 우쭈쭈 해준다는 것이 아니라, 발달과업을 완수하지 못해 미발달된 자아에 대해 이 좌절의 과정을 제공함으로써 성장시킨다는 개념이다.
그러나 오늘날 자아의 좌절은 더욱 어려워졌고, 많은 수의 사람들이 머리만 발달한 심리적 아동으로 남게 되는 일은 빈번해졌다.
"나는 특별해야 해."
이 자아의 선언에 대해 늘 다음과 같은 말이 자상하게 화답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XX 하고 싶은 거 다 해."
엄마가 유아를 계속 신(神)이게끔 지키고 있다.
물론 실제의 엄마는 다 큰 어른이 된 자식에게 이러지 않는다. 대개 엄마들은 자식이 여전히 우쭈쭈를 바라는 눈망울로 어그로를 시동하려는 모습이 아주 어글어글해서 꼴보기 싫다.
그래서 특별한 주인공이 되고자 하는 이는 가상의 심리적 요소들을 분열적으로 만들어낸다. 자기의 내면에 엄마와 유아를 창조해, 그 둘이 서로를 알아주는 구조를 조형한다.
그럼으로써 자기가 특별한 주인공이 되는 일이 신성한 권위로부터 허락받은 정당한 운명이라도 되는 것 같은 날조를 통해 심리적 이득을 취한다.
"미리엘 감독님... 저... 농구가 하고 싶어요..."
"홋홋홋. 그래요, 장발만 군. 자네는 은촛대를 태우는 불꽃남자가 되세요."
이러한 방식으로 자기의 내면에 민족대화합 연극판을 작동시키는 것이다. 그 목적은 당연히 자기가 특별한 주인공이라는 고집을 지속하기 위해서다.
이 심리적 요소들의 야합으로 인해 이제 독재는 완성된다.
관계는 자기의 특별함을 위해 남의 것을 약탈하는 독재자의 왕국으로 변질되며, 마음이라고 하는 가능성은 독재의 당위성에 막혀 폐색된다.
이것이 주인공강박이 만들어내는 최종현실의 모습이다.
"주인공이지 않아도 괜찮을까?"
이제 이렇게 여러 차례 바꾸어 읽어보자.
"유아적 전능감을 고집하지 않아도 괜찮을까?"
"남의 것을 약탈하지 않아도 괜찮을까?"
"타인의 아픔에 기생하지 않아도 괜찮을까?"
"정신장애를 앓지 않아도 괜찮을까?"
"독재하지 않아도 괜찮을까?"
그렇다면 우리의 대답은 어떻게 알려지는가?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나는 이 세상의 주인공이 아니다.
나.는. 내. 시.간.을. 사.는. 존.재.다.
삶은 시간이다. 우리가 시간을 빼앗길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을 빼앗기고 있는 것과 같다.
무수한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또 우리 역시도 하나의 당당한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는 식의 이야기가 우리의 시간을 얼마나 많이 빼앗고 있는지를 한번 생각해보라.
삶이라고 하는 이 시간은 우리에게 한 번뿐인 특별한 시간이다.
우리 자신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이 시간이 특별한 것이다.
가.질. 수. 없.기.에. 그.것.은. 특.별.하.다.
꺾어서 가질 수 없는 꽃이 있다. 우리는 가지는 일 대신에 무엇을 하는가?
그 꽃에게로 가지는 일을 한다.
우리가 그것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곳으로 가지는 것이다.
만나기 위해.
만남이 있는 곳으로.
마음은 가능성이고, 바로 '만남의 가능성'이다.
관계는 원래 소유의 터전이 아니라 이 만남의 터전이었다.
자아는 주인공이 되기 위해 살고, 나는 만나고 싶어 산다.
가질 수 없는 시간을 향해 그 몸이 가진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이 특별한 시간 속으로 풍덩, 몸을 던진다.
벚꽃잎 속으로, 빗방울 속으로, 부드러운 고양이의 눈동자 속으로, 한정없이 나를 드린다.
그 순간 나는 내 자신을 비추는 스포트라이트를 느끼지 않는다.
내 가슴에 사랑이 비칠 뿐이다.
닿았고, 따듯했고, 좋았다.
이것은 주인공의 시간이 아니라, 세상에서 제일 괜찮았던 나의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