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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깨닫는마음씨 Apr 14. 2023

깨달음의 심리학 #46

"힘의 주인이 되는 길"





  여우를 타고 힘차게 들판을 달리는 어린왕자를 상상할 수 있는가?


  곰을 타고 아무 걱정없이 산등성이를 넘어가는 골디락스를 상상할 수 있는가?


  상상할 수 있다면 그것은 깨달은 삶이며, 삶을 깨달은 것이다.


  우.리.의. 삶.에. 대.한. 모.든. 것.이. 힘.의. 문.제.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일은 아주 중요하며, 실은 전부다.


  우리가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삶.에. 대.한. 직.접.체.험.의. 그. 느.낌.이다.


  고로, "마음은 힘이다."


  그것은 힘과만 관계된다.


  오늘날의 우리는 이 힘을 잘 다룰 줄 모른다. 오히려 자신이 힘에 치이고 휘둘린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차라리 마음이 없기를 소망하며, 마음이 고통의 이유라고도 말한다.


  이제 이 착각을 깨보자. 그리고 보란듯이 당신이어라.


  니체는 삶이 전적으로 힘의 문제라는 사실을 밝힌 철학자이다. 그에게 힘은 좋은 것이다. 우리에게도 무척 좋은 것이다.


  니체가 보는 자유는 다양한 선택지 속에서 최선을 선택하는 두뇌게임이 아니다. 서로 모순되는 선택들을 바라보는 제3의 주체가 되어 각각의 선택의 온전성을 '알아줌으로써' 그 모든 선택지를 가장 좋게 선별적으로 통합해내는 주술놀이는 더더욱 아니다.


  자유는 힘의 집행이며, 힘이 집행되는 방식으론 그것은 명령이다.


  니체는 우리가 똑똑한 이성으로 선택하고 그 선택에 책임지는 의무를 다하면, 모든 것이 우리에게 다 이루어지고, 우리가 하고 싶은대로 다 할 수 있는 '그런 자유'는 없다고 말한다.


  자신이 자신에게 명령한 그 내용을 무수한 개인들은 자유라고 착각한다고 니체는 지적한다.


  명령을 따르고 있는 것일 뿐이지,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니체는 분명하게 프로이트적이다. 정확히는 프로이트가 니체적이다.


  니체가 한심하게 보는 것은 다른 이들을 프로그램의 명령을 따르는 NPC로 보며, 자기는 깨어 있어서 그 NPC들에게 친절하고 상냥할 수 있는 자유를 행사함으로써 그들 역시도 사람으로 깨어나게 할 수 있다고 믿는 '근대적 주체들'이다. 이것이 근대에 자행되었던 '계몽'이라는 활동이다.


  자기는 메타인지와 같은 이성 작용의 '놀라운 경험'을 통해 이제 프로그램에서 벗어나 매트릭스의 네오처럼 자유로워졌다고 착각하는 이들이야말로, 니체가 보기에는 가장 부자유한 이들이다. 자기가 사슬에 매여 있다는 것을 모르는 노예의 상태와도 같다.


  니체는 왜 '운명에 대한 사랑(amor fati)'을 말했는가?


  중학생들이 읽는 무협지나 이세계 깽판물에서 나오는 것과 같은 '그런 자유'는 있을 수 없고, 우리에게는 운명이 놓여 있을 뿐이라고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니체를 위시한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자유의 철학자들'이라고 불린다. 그들이 '운명의 철학자들'이기 때문이다.


  운명은 명령이다.


  키르케고르는 단적으로 실존주의가 갖는 자유와 운명에 대한 이해를 보여준다.


  '신 앞에 선 단독자'의 비유로서 묘사되는 아브라함은 그의 신으로부터 "네 아들을 죽여라."라는 명령을 받는다.


  이처럼 개인의 자유는 명령에서 출발해서 발견된다.


  카뮈는 명령의 부조리함에 반항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냈다. 그러나 반항은 명령을 거부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기 좀 그만 치고 살라는 아버지의 말에 자기는 노벨심리학상을 받을 거라고 대드는 무협지 소년의 청춘생활이 아니다.


  카뮈의 반항은 도저히 수용불가능한 명령을 가장 고귀하게 수용하기 위한 것이다. 즉,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위한 것이다.


  사르트르는 우리 앞에 하얀 캔버스를 깔아 놓은 것처럼도 오해된다. 무(無)에서부터 자기 자신을 창조해나가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르트르를 '일부러' 오독하면 "아싸! 나는 멋진 내 자신을 이야기로 만들 수 있어!"라며 쉬이 착각의 이득을 얻기에 좋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자유를 우리에게 내려진 사형판결문 같은 '선고'의 개념으로 말했다. 자유는 우리의 장난감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자유가 선고된 것이다. 고로, 사르트르에게도 역시 자유는 운명적 명령이다.


  하이데거?


  해석학을 말한 이다. 투명한 선택의 장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앞에 '지저분하게' 깔린 것이 있다. 방청소도 하지 않고 진정한 자신의 길을 가겠다고 외치며 뛰쳐 나가는 무협지 소년을 하이데거는 다시 그의 방으로 데려온다. 소년은 '그의 방'이라고 하는 '세계'로부터 임의대로 벗어날 수 없다. 세계는 필연이며, 그는 세계 속에서만 산다.


  나아가 하이데거는 방에 지저분하게 놓여 있던 그것들을 우리가 발견하도록 돕는다. 그것들은 실은 지저분한 쓰레기가 아니라, 우리가 삶에서 사랑했던 흔적들이다. 이 사랑을 망각하고 팽개친 채, 그는 어디에서도 살 수 없다. 하이데거에게 '명령'은 정말로 상냥한 것이다.  


  베르쟈예프에게서는 노예의 상태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그림으로 묘사되는 흡사 '근대적인 자유 개념처럼 보이는 것'이 성립될 수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은 겉보기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실은 이것이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에 근접해 있다.


  베르쟈예프는 거의 장자다. 도(道) 대신에 우주적인 초인격성을 말할 뿐이다. 그것과 하나되었을 때, 우리는 자유롭다. "하나님의 품안에서만 우리는 자유롭다."라는 말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렇게 베르쟈예프는 키르케고르의 적자로서 마지막 실존주의의 빛을 밝힌다.


  칼릴 지브란의 시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은 실존주의적 핵심을 그대로 노래하고 있다.


  "사랑이 그대를 손짓하여 부르면 그를 따르라. 비록 그 길이 어렵고 험할지라도. 사랑의 날개가 그대를 안을 때면 온몸을 맡기라. 비록 사랑의 날개 속에 숨은 날이 그대를 상처입힐지라도. 사랑이 그대에게 말하면 그를 믿으라. 비록 사랑의 목소리가 그대의 환상을 모조리 깨뜨려놓을지라도."


  이것은 가스라이팅을 옹호하는 시가 아니다.


  실존주의에서 가스라이팅은 성립되지 않는데, 실존주의는 사람들 사이에서의 상대적인 관계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관계성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관계성이라는 말이 어렵게 들린다면, 이를 이해하기에 가장 분명하고 실제적인 예가 있다.


  우.리.와. 우.리.의. 삶. 사.이.가. 바.로. 절.대.적. 관.계.성.이.다.


  이것은 불가분하다.


  우리가 있는 곳에 우리의 삶이 있고, 우리의 삶이 있는 곳에 우리가 있다.


  실존주의가 '삶의 회복운동'인 이유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빅터 프랭클에게 도착한다.


  홀로코스트로부터 생환하여 실존상담의 한 분파인 로고테라피를 창시한 프랭클은 강제수용소에서의 생활을 회고한다.


  인간이 가장 비참하게 죽어가는 환경 속에 놓여, 자신들은 함께 노래를 부르곤 했다고 그는 말한다. 그 노래의 내용은 이러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삶에 대해 'YES'라고 말하리라."


  이해하겠는가?


  이.것.이. 힘.이.다.


  인간이 '유치하고 찌질한 힘'에 의해 죽어가는 속에서도, 인간을 살리고자 하는 '더 큰 힘'이 있다는 것을 신뢰하는 이것이야말로 힘이다.


  무협지 소년들은 자신들이 깨달은 척을 하며 이 세상에 선악과 같은 이분법은 없고 그것을 통합해줄 온전한 자기만 있을 뿐이며, 권선징악의 개념은 다만 산타클로스와 같은 유치한 아동들의 생각이라고 말하곤 한다.


  그렇지 않고, 이것이 선이다.


  니체는 분명히 말했다.


  힘.은. 선.이.다.


  악이 창궐하는 속에서도 선의 힘을 믿고 희망하는 이들이 있었고, 그 명령은 집행되었다.


  삶이 명령했다.


  "너는 반드시 살아도 된다는 이 명령을 따르겠는가?"


  그들은 대답했다.


  "YES!"


  명령은 신성했다.


  그 명령의 이름은 생명(生命)이라고 불린다.


  생명은, 살아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명령이다. '삶의 명령'이다. 종교철학자 정재현은 그렇게 말한다.


  우리가 자유로울 수 있는 방식은, 이 운명적 명령에 따르는 일을 통해서다.


  "자기가 자기에게 명령한다."라는 니체의 말을 다시 기억해보자. 이 말은 이렇게 바꾸어 표현될 수 있다.


  "자기의 삶이 자기에게 명령한다."


  그러나 이 명령은 물음의 형태로 온다.


  "살고 싶다는 거지?"


  때문에 프랭클은 삶이 우리에게 물어올 때 그에 대해 YES라고 대답하는 것만이 우리의 임무라고 말한다.


  자기가 자기에게 명령해서 동작하는 이 기제를 무엇이라고 부르는가?


  바로 '자율'이라고 부른다.


  우리의 살아있는 몸은 자율적으로 동작한다. 생명의 속성은 자율적이다.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이 필요에 따라 그 역할을 다하는 자율신경계처럼, 자율은 필요한 일을 하는 것이다.


  달리고 싶어하는 이가 있다. 심장과 폐는 그 소망에 응답해 필요한 일을 한다. 그럼으로써 달.리.며. 사.는. 일.을 가능하게 한다.


  자유는 운명이 되었다.


  실존주의자들은 틀린 말을 한 것이 없다.


  우리는 자유롭도록 운명지어진 것이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자유인 것이, 우리의 삶의 입장에서는 자율이다.


  자.율.은. 자.유.의. 운.명.화.다.


  삶.이. 자.율.적.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삶은 오직 이 힘일 뿐이다.


  우리의 삶이기에, 우리를 위해 쓰이고자 하는 그 힘의 총체다.


  이것은 삶의 힘이 자신의 편이니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다 하면 되겠구나, 라는 무협지 소년을 위한 의미가 아니다.


  '그런 자유'를 꿈꾸니 유치하고 찌질한 '그런 힘'으로밖에 힘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자기만 살아있는 주인공이고, 남들은 NPC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이런 발상이 생겨난다.


  자신에게 자신의 삶이 있듯, 타인에게는 타인의 삶이 있다.


  자.신.이. 가.진. 것.과. 똑.같.은. 힘.이. 타.인.에.게.도. 있.다.


  비유하자면, 자기 뒤에만 자기 엄마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뒤에도 그의 엄마가 있다. 자신의 하나님만큼이나 그의 하나님도 그의 뒤편에 자리잡고 서있다.


  그러면 이것은 '신들의 전쟁'을 의미하는가?


  그렇지 않다. 전쟁은 끝난다.


  자신에게 정말로 힘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싸우지 않는다.


  자신에게 힘이 있다는 사실을 근본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만이 자기의 힘을 증명하려고 가열차다.


  이러한 이들은 늘 자기의 힘을 과대포장해서 선전한다. 어디에 가든 늘 자기 잘난 척만 하는 모습과 같다. 이것은 힘의 남용이다. 여기저기에 정욕을 흩뿌리듯 자신의 힘을 낭비하는 것이다.


  힘을 남용하게 되는 방향성은 언제나 자기를 칭찬해주고 인정해주며 자기에게 권위를 제공해주리라 가정되는 대상들을 향해서다.


  이들은 자기의 힘에 확신이 없기 때문에 대상들에게 자기의 힘을 과시하고 집행함으로써 힘의 주인인 척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대상이 없으면 힘을 쓸 수 없기에, 이들은 필연적으로 대상에게 집착하게 된다. 대상으로부터 얻는 인기에 집착하고, 대상이 높게 우러러볼 권위에 집착한다.


  이런 것은 힘의 주인의 모습이 아니다.


  주.인.공.이. 되.려.고. 하.면. 주.인.이. 되.지. 못.한.다.


  주인공은 무엇인가?


  '힘의 소유자'다. 자기가 힘을 갖고 있다고 그 소유권을 주장하는 이다.


  힘은 여기에서 일종의 사유재산이 된다. 때문에 서로 누가 더 많은 '힘의 재물'을 곳간에 축적하고 있는지에 대한 비교의 장에 놓이며, 그 비교 속에서 늘 힘에 치이고 휘둘리게 된다.  


  그렇다면 주인은 무엇인가?


  그 자신이 힘을 갖지 않은 자다. 다만 자신을 위한 힘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자다. 그 신성한 힘을 가진 자신의 삶에 다 맡긴 자다.


  그.리.고. 그. 삶.만.을. 다. 가.진. 자.다.


  "내 삶은 나의 것이다."


  이것이 실존주의 선언이다.


  "나 가질래?"


  삶이 물어왔다.


  "YES!"


  아낌없이 대답했다.


  원래부터 그 누구의 것도 아니었던 오직 그 자신만의 것을 그는 지금 되찾았다.


  그는 삶을 깨달은 것이고, 이제 깨달아 살 준비가 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지상 최대의 거짓말이 무엇이었던가를 알아보자.


  "네 삶은 너만의 것이 아니야."


  누가 이 거짓말을 세상에 널리 뿌려왔던가?


  자기가 주인공이 되고 싶었던 이들이다. 자기는 '자기만의 길'을 당당하게 간다고 부르짖던 무협지 소년들이다. 이제 내가 멋지게 나를 연주할 차례야. 바이크를 타고 저 거친 황야로 끝없이 달려가자 부릉부릉, 세계의 여기저기에 중2병의 정욕을 흩뿌리던 근대적 주체들이다.


  이들은 다른 이들의 삶을 자기가 주인공으로 '놀라운 경험'을 하며 누비고 다닐 '게임판'으로 만들고자 했다. RPG에서 주인공이 남의 집에 들어가 서랍을 뒤져 돈을 획득하듯이, 이 게임소년들은 남의 것을 약탈해 자기의 것으로 삼아 영광을 누리려고 했다. 심지어는 남의 인생까지도 도둑질해 그게 자기의 인생인 것처럼 선전하는 일도 서슴치 않았다.


  유치하고 찌질한 힘을 행사하는 일에 중독된 이, 그것이 바로 주인공이다.


  그러나 주인공이 아닌 우리는 '자기만의 길' 같은 것은 가지 않는다. 그러한 길은 단지 '자기기만의 길'일 뿐이다.


  우리는 주인이다.


  우리는 우리가 다 가진 우리의 삶이 시키는 대로만 하는 성실한 주인이다.


  여우는 어린 왕자를 알아서 가장 좋은 곳으로 데려가 줄 것이고, 곰아저씨는 골디락스를 알아서 가장 그립던 고향으로 데려가 줄 것이다.  


  삶이 인도하는 그 위에 올라타 그 주인들은 행복하고 든든할 뿐이다.


  분명하게 이렇게 느낀다.


  '자유롭다!'


  스스로 알아서 가장 좋은 것을 하는 자율적인 삶에 다 맡겼기에, 그들은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힘을 가졌는가?


  NO.


  우리의 절대짝꿍인 삶에는 힘이 있는가?


  YES.


  그 힘이 이제 우리 자신을 위해 쓰여도 되겠는가?


  YES!


  제발 부탁이다.


  YES라고만 해라.


  당신 앞에 다가온 삶에 대해, 당신이 지.금. 느.끼.고. 있.는. 그. 마.음.에. 대.해. YES라고만 해라.


  눈물이 나고 덜덜 떨릴지라도, 무서워 죽겠더라도, 어쩌면 조금 아플지라도, 당신의 삶에 대해 YES라고만 해라. 이 세상의 그 어느 누구에게도 YES라고 하지 말고, 오직 당신의 삶에 대해서만 YES라고 대답해라.


  이 글에 대해서도 NO라고 말해라. 당신의 삶이 혹시라도 이 글을 이용해 당신에게 말을 걸고 있다고 느껴질 때만 YES라고 말해라. 당.신.은. 분.명.히. 느.낄. 수. 있.다.


  당신의 마음이 움직인다면, 거기에 감동이 있다면, 당신의 삶은 지금 주변에서 활용할 수 있는 모든 소재를 활용해 당신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이다. 당신에게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거지?"


  그리고 이것만이 우리에게 명령된 길(道)이다.


  마음은 이정표.


  가끔 명령을 잊어버린 우리에게 거부할 수 없는 힘으로 상기시킨다.


  '자기만의 길'이 아니라 '자기만의 삶'이 명령하는 그 길이 어디인지를 우리에게 다시 알린다. 이 길은 모든 생명이 가고 있는 생명의 길이고, 깨달아 사는 길이며, '되는 길'이다.


  지금 힘을 '가졌'냐고 묻고 있지 않다.


  지금 힘이 '있는'가?


  이 물음은 다음의 물음이다.


  지금 느끼고 있는 마음이 분명하게 지금 있는가? 아무리 싫고 불편해도, 부정할 수 없이, 거부할 수 없이 그 마음이 있는가?


  있는 것을 있다고 긍정하는 일.


  존재함을 긍정하는 일.


  그것은 살아있는 당신 자신에 대해 YES라고 말하는 일과 같다.


  당신의 삶에 대한, 당신의 마음에 대한 YES는 결국 당신 자신의 존재에 대한 YES다.


  삶이 그동안 흐릿했던 당신의 좌표를 이제 포착했다.


  살아 뭣하냐는 이 비참하고 힘겨운 죽음의 골짜기에서도 알아보았다.


  Y.E.S.


  삶을 간절하게 불러 청하는 그 선명한 신호가 가장 어두운 밤을 밝히며 저 우주 끝에서 삶에게 닿았다.


  엄청나게 거대하고 힘있는 것이 이제 순식간에 착륙할 것이다.


  그 주인을 맞으러.


  당신의 별인 지구로 이제 힘차게 돌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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