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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깨닫는마음씨 Apr 15. 2023

물안에서(2023)

물안에서 쓴 글




  본다는 것은 안다는 것이고, 인식한다는 것이며, 기억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외부의 것을 내부로 갖고 와 포섭하는 작용이다. 외부의 사물을 망막에 맺힌 상으로 전환해 뇌에 저장하는 과정과도 같다.


  포섭된 것은 소유된 것이다. 곳간에 축적된 분명한 자원이다.   


  그래서 보는 일은 권위가 된다. '시선의 권위'다.


  더 많은 이들이 보고 싶어하던 것을 분명하게 보여줄 수 있는 권위는 돈이 되고, 자신만이 볼 수 있던 것을 분명하게 보여줄 수 있는 권위는 명예가 된다.


  그러나 물음은 이것이다.


  "이런 것을 대체 왜 하고 있는가?"


  시선에 비친 모든 것이 불분명하고 모호하게 보이게 된 순간 이 물음은 생겨난다.


  이것은 이 영화의 내외부를 함께 관통해 흐르는 물음이다. 


  물안에 있는 것처럼 뿌옇고 흐리다.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언어적 설명은 오히려 쉽다. 그러나 설명을 동원한다고 해서 세계가 분명해지지는 않으며, 영화가 분명해지지는 않는다.


  "정신차려"라는 큰소리를 듣는다면 차라리 영화를 그만두거나 영화관을 나옴으로써 자기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던가를 성찰하며 의식이 분명해질지도 모른다. 그렇게 차라리 혼내는 신(神)이 있다면 모든 불분명함이 분명함으로 바뀔 수 있을지도 모른다.


  죄책감만큼 분명한 것은 없다.


  절벽 위의 세속과 절벽 밑의 탈속 중 어떤 것도 선택할 수 없던 시인은 양심을 고백하며 언제나 죄책감 속에 잠겨든다. 이것은 역설이다. "존재해서 죄송합니다."를 발화하는 그 자리만이 유일하게 그가 분명함으로 존재할 수 있는 자리가 되는 까닭이다.


  그러나 시인을 혼내는 신은 없다. 돈도 명예도 되지 않는 일에 굳이 시인을 '보며' 신의 임무를 수행하고자 하는 이는 없다.


  신이 없는 세계를 다만 인식의 주체는 혼자 끌어안고 있다.


  신이 없다면 자신이 카메라를 들고 이 모든 것을 분명하게 증언해주리라고 생각했을 때도 한참 전에는 있었을지 모른다. 최소 자신이 보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게 보여주고 싶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부분은 술에 취해 있었다.


  실은 아무리 인식하려 해봐도 다 불분명하고 모호하기만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취기를 통해 자신 또한 흐리게 함으로써 그 상태를 맞추고자 했다. 같은 상태가 되면 흐릿한 세계에 대한 초점이 맞아 어떤 분명한 것을 볼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것이다.


  이제 술에 취하지 않으니 세계의 총체는 원래 그러했다.


  세계는 처음부터 물안에 있었다.


  자신이 처음부터 물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세계라고 보고 있던 것은 그저 자기 자신이었을 뿐이다.


  자신을 시선의 대상으로 삼아 분명하게 인식하려던 주체는, 이러한 방식으로 주체 자신의 분명함에 대한 권위를 잃고야 만다.


  물밖에서 보고 있던 그러한 주체는 없다. 그 주체야말로 가장 물안에 있던 자기 자신이었다.


  자신이 해체되면 세계가 해체되고, 그 사이로 밀려들어오는 것은 삶이다.


  삶은 물과 같다. 누구도 단 한 번도 그 밖에 있었던 적이 없다.


  그런 식으로 존재하면 안된다고 정신차리라며 혼내는 큰소리에 대해 느끼는 감정을 불안이라고 생각했고, 다른 어떤 것보다 '분명한 것 같은' 그 불안에 의지해서 역설적으로 주체 자신을 존재하게 해왔다. 양극적인 가치들 사이에서 덜덜 떨어가며 외줄타기를 해왔다.


  그동안 불안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두려움이었다.


  '물안'이야말로 진짜 '불안'의 이름이었다. 


  세계가 불안해서 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이 물안에서 흐릿하다.


  불안하지만 불안을 견디며 그 어떤 분명한 순수를 인식해보고자 했던 그러한 자신만은 시인의 양심처럼 분명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와 같은 자신이야말로 가장 불분명한 것이었으며, 가장 '물안'했던 것이다.


  시선의 권위, 인식하는 주체의 권위를 해체시킨 이는 그리고 이제 바다로 떠난다. 물안으로 떠난다.


  카메라의 시선은 더는 그를 분명하게 책임져주지 못하며, 그는 한없이 흐릿해진다.


  인식의 주체에게는 죽음이지만, 카메라의 시선 밖에서 흩어져 향기로 피어난 것은 자유다. 확인할 수 없지만 그럴 것이다. 그랬으면 좋겠다.


  불안의 다른 이름은 자유다. 물안에서 사는 것들은 물을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해도 물안이라 자유롭다. 물안에서 자유롭다. 삶은 이미 자유롭다.


  이런 글을 대체 왜 쓰고 있는가?


  나는 자유다.


  자유로워서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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