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생존"
우리가 남에게서 뺏지 않는 삶은 가능할까?
종교적 선각자들이 무수하게 우리에게 들려주었던 얘기는 결국 '뺏지 않는 삶'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트리나 폴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에서도 리차드 바크의 『갈매기 조나단』에서도 이 목소리는 동일하게 들려온다.
"이 삶에는 먹고 자며 서로 먹이를 다투는 것 이상의 그 무엇이 있지 않을까?"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이 바로 그것을 찾아 나선 여정을 종교적 탐구 내지 철학적 탐구라고 부른다. 이는 '뺏으며 사는 삶' 너머로 나아가기 위한 인간의 간절함과도 같았다.
뺏으며 사는 삶, 이것은 고전적인 생존의 양식이다.
인간은 분명 이 고전적인 생존을 위해 모험했지만, 이.러.한. 생.존.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더.욱. 모.험.했.다.
성공적인 모험가들은 깨달음이라고 하는 새로운 삶의 양식을 발견해 그것을 우리에게 알리기 위해 돌아왔다. 깨달음은 고전적인 생존을 넘어선 자리에서 가능한 아주 근사한 존재방식으로 우리에게 알려졌다.
그런데 이 말을 뒤집어 말하자면, 깨달음을 가장 가로막는 것이 바로 고전적인 생존이라고 할 수 있다. 더 정확하게는 고전적인 생존에 대한 강박과 집착이 한 개인이 깨닫는 일에 있어 가장 큰 장애물이 된다.
고전적인 생존의 소재는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듯이 돈, 외모, 인기, 권위, 지식, 정보, 알파개체에 대한 지향 등과 같은 것들이다. 종족보존을 위한 생물학적 기제와 사유재산제로 포괄되는 사회학적 기제가 복합된 소재들이다.
깨.달.음.은. 언.제.나. 이. 고.전.적.인. 생.존.에. 의.해. 발.목.이. 잡.힌.다.
한 개인이 아무리 깨달은 척을 해도 그가 실은 깨닫지 못했다는 사실이 노출되는 지점 역시 이 생존과 관련된 부분에서다.
어떠한 종교체험 및 신비체험들을 한다 해도 그가 여전히 고전적인 생존의 기제에 입각해 돈과 권위 등을 가장 중요한 소재로 간주하며 그것들에 집착하며 살고 있다면 그는 깨달은 것이 아니다.
깨달음은 숨길 수도 없는 것이고, 위장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기존의 현실과는 변별되어 완전히 새로워진 존재방식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깨달아 사는 삶이 알거지로 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더욱 아닌 것은, 돈을 버는 일도 더욱 잘 하며, 또 깨달아 하는 일도 함께 잘 하는 식으로, 양극적인 두 양식을 균형있게 통합적으로 운용한다는 발상이다.
과.거.의. 것.에. 집.착.하.여. 그.것.을. 놓.지. 못.하.는. 이.들.이. 언.제.나. 분.열.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깨.달.음.에.는. 분.열.이. 없.다.
분열된 것들 각각의 온전한 가치를 알아주어 통합하는 것이 깨달음이 아니라, 분열이 아닌 것이 깨달음이다.
분열된 것들은 사실적으로 어떠한 일을 하는가?
서로의 것을 뺏기 위해 투쟁한다.
분열된 것들은 분열이 극복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통합이라는 이름으로 반대편의 것을 자기의 것으로 취하기를 원한다.
이처럼 고전적인 생존의 양식은 외적인 생존투쟁의 양상뿐만이 아니라 개인의 내부에서도 동일한 약탈의 현실을 창출해낸다. '뺏으며 사는 삶'은 개인을 총체적으로 지배하게 된다. 그로 인해, 그가 의식적으로는 뺏으려 하지 않는다 해도 그는 반드시 남들의 것을 빼앗게 된다.
이러한 분열의 모습을 현실에서 대표적으로 드러내는 고전적인 생존의 소재가 바로 '돈'과 '정치'다.
이 두 소재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이것들이 분열적으로 집착되기에 가장 쉬운 소재라는 의미다.
돈에 집착하면서 깨달음이란 성립될 수 없고, 정치에 집착하면서 깨달음이란 성립될 수 없다. 이것은 도덕적인 얘기가 아니라 기술적인 얘기다. 예수에게도 붓다에게도 이 지점은 언제나 분명했다.
스스로 계속 내외적인 분열을 만들어내면서 깨달은 삶을 사는 일은 불가능하다.
심지어 스스로 분열시킨 것들에 대해 자기가 그것들을 통합하는 상위의 주체로 서려고까지 하는 일은 깨달음에서 가장 먼 것이다. 이는 자기가 모든 이의 신이라는 주장과도 같은 얘기다.
돈과 정치라는 소재는 개인이 자신을 신처럼 경험하기에 좋은 소재다. 이렇게 대상적 소재에 의존한 전능감에 위탁하여 '신 놀이'를 하고 있으면 깨달음은 요원하다.
물론 깨닫지 않는다고 해도 아무런 문제는 없다. 문제는 다만 이것들을 추구하면서 자기가 깨달은 척하고 있다는 것에만 있다. 실제로는 뺏으며 살고 있으면서 뺏지 않는 척을 한다. 지겨운 내로남불이다.
분열은 지겹다.
통합은 더 지겹다.
이런 일들만 하며 우리가 생존해야 한다면, 대체 그 삶에는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애벌레도 알고, 갈매기도 아는 것을, 인간인 우리가 모를 수는 없다.
거듭 강조하지만, 깨달음은 생존을 무시하고 혼자 여여히 신선놀음을 하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는 것은 어떨까.
깨.달.음.은. 더. 큰. 차.원.에.서. 생.존.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생존'의 개념을 새로이 달리 쓰는 것과도 같다.
현대의 심리학은 이 지점에서 매우 큰 언어적 도움을 제공한다.
'고전적인 생존' 대신에 우리는 이제 '심리적 생존'을 말할 수 있다. 깨달음이란 이 '심리적 생존'과 관계된 것이다.
심리적 생존을 쉽게 말하면 '마음이 사는 일'이다.
아무리 돈과 인기 등의 고전적인 생존의 자원이 많다 하더라도 마음이 죽어 있다면 다 쓸모없는 것들이다. 그러한 개인은 행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행.복.이.라.고. 느.끼.는. 것.은. 마.음.이. 살.아. 있.을. 때.만. 경.험.되.는. 것.이.다.
마음이 죽어 있는 이들은 억지로 마음을 살아 있는 것처럼 만들기 위해, 술을 들이붓고, 마약을 복용하며, 끝없는 관계의 자극재들을 소비하려고 한다. 표현 그대로, 아이티 섬의 약물에 절여진 좀비와 같은 것이다.
그렇게 행복한 척해보지만, 행복이란 것 또한 숨길 수도 없는 것이고, 위장할 수도 없는 것이다.
행.복.은. 깨.달.음.의. 속.성.과. 같.다.
조건에 구애받지 않고 더 많이 행복해지고자 하는 이들이 곧잘 깨달음의 모험을 나서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모험가들은 더 많은 자신의 행복의 증진이란 것이 곧 타인의 행복과 직결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때문에 이들은 자연스럽게 '뺏지 않는 삶'을 지향하게 된다. 도덕원리가 아니라 행복원리가 그들을 동기화한다.
왜 이렇게 되는가?
마.음.이.란. 것.이. 인.간.의. 공.통.구.조.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눈 두 개, 코 하나, 입 하나를 달고 나오듯이, 마음 또한 우리에게 공통적인 것이다.
마음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인간을 경험하는 것이며, 마음을 '내 마음'으로 경험하면서 우리는 그 인간을 '나'로 경험하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더 많은 '내 마음'을 경험함으로써 우리는 개인이 되어가는 동시에 공통의 인간이 되어간다.
그러니 우리가 더욱더 '나'일수록 우리는 타인의 마음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타인의 마음이 살아나 그가 행복하기를 바라게 된다.
그 행복이 바로 인간의 행복이며, 인간의 행복은 곧 내 자신의 행복이 되는 까닭이다.
이렇게 살아가고 있을 때, 우리는 깨달아 살아간다고 표현한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이 글에서 말하고 있는 '새로운 생존'이다.
심리적 생존이고, 더 멋진 생존이며, 깨달음의 생존이다.
마음은 자기가 마음을 알아주어야 살아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은. 뺏.지. 않.아.야. 살.아.난.다.
남의 것을 빼앗는 이들은, 마음을 마치 자기 내면의 자식들처럼 형상화한 뒤 그 마음들을 하나하나 알아주어야 한다며 매우 자주 선량한 표정으로 말하곤 한다. 이 가식적인 언행이 바로 고전적인 생존의 원리에 입각해 살아갈 때 일어나는 일이다. 자기 자식을 위해 남의 것을 빼앗고자 하는 약탈의 일이다.
이러한 일을 그만 두고, 더 큰 차원에서 생존하는 현실도 우리에게는 분명 가능하다.
인간의 행복한 얼굴을 더욱 크게 꿈꾸는 일은 진실로 가능하다.
그것이 주체못할 당신의 행복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