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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깨닫는마음씨 Oct 02. 2019

조커(Joker, 2019)

소외된 삶의 히어로 "나는 몹시 화가 나있다"



  영화관을 나선 뒤에도 울음이 멈추지를 않는다. 영화 내내 흐르던 눈물로도, 몹시 화가 난 이의 가슴을 태우던 뜨거움을 사그라들게 하기에는 너무나 역부족이다.


  이 영화가 전하는 느낌은 후루야 미노루의 초기작인 『나와 함께(국내명: 크레이지 군단)』를 키득거리며 보다가, 어느새 서럽게 울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마찬가지로 동작가의 작품인 『두더지』의 현실 위에서 발견하게 되는 감각에 가깝다.


  특히나 지금의 이 시대를 소외된 채 살아가고 있는 무수한 젊음들에게 있어 이 영화는 분명한 '나'의 이야기다.


  그래서 이 영화는 단지 조커에 대한 이야기를 보여주는 영화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를 영화 속 조커와 영화 밖 관객이 반반씩 나누어 보여주게 되는 영화다.


  영화는 처참하게 토해내고, 장절하게 쏟아붓는다.


  울분을.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용암 같은 울분덩어리를.


  영화 속에서 조커는 결코 울지 않는다. 너무나도 화가 나있는 까닭이다. 냉장고 안에 들어가도 꺼지지 않는 화다. 폐에 불이 가득 차있다. 영겁조차 태울듯한 불길이 물을 모두 증발시켜서, 눈물 또한 흐르지 못한다. 그래서 조커는 지독히도 힘들어 울고 싶은 상황에서, 대신 웃는다. 통곡 대신에 광소한다. 성마른 횡격막의 스타카토음으로 하늘을 찌른다. 절규로 찢어발긴다. 표현 그대로의, 화난 광대(mad clown)다.


  그리고 관객이 대신 운다. 조커가 흘리지 못한 눈물만큼, 관객이 대신 서러움의 우물을 길어올린다. 그러다가도 스크린 속의 조커를 보고 어느덧 웃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서는, 그러한 자신의 모습이, 이미 무너져가는 낙타의 등에 얹은 바로 그 마지막 짐이었다는 황망한 사실을 눈치채게 됨으로써 더 서러워진다. 더 미안해지고, 더 가엾어진다. 눈물은 끝이 없다.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조커는 '나의 분노'를 대행하고, 관객은 '나의 슬픔'을 대행한다. 그렇게 상호적으로 나의 이야기가 밀도있게 구체화된다.


  그리고 이처럼 묘사되는 나의 이야기는 바로 소외의 이야기다. 분노와 슬픔은 소외가 야기하는 대표적인 감정들이다.


  영화 속에서 소외가 이루어지는 과정은 다음과 같이 알려진다.


  위대한 정의의 담지자인 배트맨이 될 브루스 웨인의 아버지인 토마스 웨인은 아들만큼이나, 자기만이 이 도시에 질서와 안정을 제공함으로써 도시를 회복시킬 수 있는 유일한 도덕주의적 구원자라는 신념에 사로잡혀, 정직한 젊은이들을 순종적인 유치원생처럼 대하며 연예인과 같은 인기를 모아 권력을 거머쥔다. 그렇게 전체주의적 우상화의 완성을 눈 앞에 둔다.


  그는 취업난에 시달리는 정직한 젊은이들을 구제해주겠다는 불같은 연설을 토해내면서, 그에게 직접적으로 도움을 청하러 온 한 정직한 젊은이에게는, 자기의 귀한 아들인 브루스 웨인 근처에 감히 접근하지 말라며 불같은 주먹을 날리기도 한다. 대저택 안에서 안전하게 보호받는 그의 금수저 아들에게 그저 쇠창살 사이로 꽃을 건네준 일이 유일한 그 정직한 젊은이의 코뼈는 그렇게 박살나게 된다.


  한편, TV쇼의 연예인들, 언론인들, 미디어 명사들은 이러한 토마스 웨인에게 동조하며, 정직한 젊은이의 수모를 공개적인 놀림거리로 삼고, 그에 대한 인신공격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리고 충분히 조롱을 즐긴 뒤에는, 도덕적인 인격자의 면모를 보이면서 그 정직한 젊은이에게, 인생을 어떻게 노력하며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현인처럼 조언하는 일도 잊지 않는다.


  물론 토마스 웨인의 부하직원들도 가장 앞서서 한몫 거든다. 그들은 정직한 젊은이를 자기들 아래에 있는 사회적 낙오자로 취급하며, 계급적 차별이 당연한 권리라도 되듯이 그 정직한 젊은이에게 잔혹한 집단폭력을 가한다. 그리고 이에 대해 토마스 웨인은 그 진상에는 아무런 관심없이, 그저 "우리는 한가족이다."라며 가족주의적 원칙과 동지애의 정신을 따라 자기의 부하직원들을 무조건적으로 비호한다.


  더불어, 그동안 그 정직한 젊은이의 형식적이나마 유일한 대화상대였던 심리상담사는, 이 토마스 웨인의 도시에서는 젊은이만큼이나 자기도 턱없이 하찮고 불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밝히면서, 이제 심리상담을 위한 복지예산이 삭감되어 센터가 문을 닫게 되었음을 정직한 젊은이에게 전한다.


  가는 곳마다 비참한 조롱거리의 신세와, 갖은 폭력의 희생자의 처지를 면할 수 없었던 그 정직한 젊은이는 그렇게 하소연할 곳마저 잃은 채 철저하게 고립된다.


  그리고는 끝내, 그가 연인으로 꿈꾸었던 이는 그를 모르는 존재로, 그가 아버지처럼 생각했던 이는 그를 배신한 존재로, 그가 어머니라고 믿었던 이는 그를 착취한 존재로 드러나기까지 하게 된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1분도 행복한 적이 없었던 한 정직한 젊은이는, 단지 자기만의 방식으로나마 고유하게 자족할 수 있기를 바랐지만, 그러한 그의 모습은 이 토마스 웨인의 도시에서는 오직 가학과, 무시와, 조롱의 대상으로만 전락하게 될 뿐이었다.


  그에게는 스스로의 인생을 살아내게 해줄 자기만의 코미디를 갖는 일조차 결코 허락되지 않았다. 그에게 유일한 고유성으로 남겨진 웃음마저도, 토마스 웨인과 그 선량한 동료들의 기준에 의해 의미가 멋대로 규정되어 짓밟혀야만 했다.


  분명하게 이 토마스 웨인의 세상에서는, 그는 있는 그대로의 그 자신으로 존재하면 안되는 듯 싶었다. 그는 오직 남의 것에 따라 남의 것으로서만 존재해야 했다.


  그가 그 자신을 위해 더 할 수 있는 것은 이제 아무 것도 없었으며, 그가 그 자신에 의해 속할 수 있는 곳은 이제 아무 곳도 없었다.


  그의 삶은 모든 곳에서 철저하게 부정당했다.


  그렇게 그 정직한 젊은이는 조커가 되었다.


  조커의 의미 그대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이가 되었다.


  이 시대의 소외된 삶이 되었다.


  내가 되었다.


  울분이 되었다.


  나도 행복하고 싶다고, 브루스 웨인같은 금수저가 아닐지라도, 사람으로나마 존중받고 싶다고, 내 자신으로서 존귀하게 살고 싶다고, 목놓아 부르짖는 울분이 되었다. 서럽게 흐르는 눈물이 되었다. 결코 잊히지 않는 아픔이 되었다.


  그렇게 나는 아팠던 것이다.


  소외되어서 아팠던 것이다. 아파서 슬프고, 아파서 화가 났던 것이다.


  울분이 터져나오는 그 자리, 거기에는 아픈 가슴이 있었다. 무참하게 찢어발겨진 가슴이 있었다.


  소외는 찢는 것이다. 사람으로부터 삶을 찢어내는 것이다.


  사람이 찢겨진다. 가슴이 찢겨진다. 그리고 찢긴 틈새로 삶이 새어나온다. 열이 빠져나온다. 몸이 차가워진다. 그래서 소외는 차가운 것이다.


  그리고 차가움 속에 운동은 정지된다. 대사활동이 멈춘다. 생명의 흐름이 멎는다. 죽음을 눈 앞에 둔다. 그래서 소외는 슬픈 것이다.


  소외는 반드시 누군가가 서럽게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삶이 찢겨져나간 사람에게 필연적으로 남는 것은 불가피하게 서러운 죽음뿐이다.


  불가피하게 죽음을 기다린다. 불가피한 죽음을 각오한다. 잘 죽음으로써 마지막에는 그래도 죽음을 통해 빛날 수 있게 되는 현실이 불가피성이기를 바란다.


  가슴이 찢어발겨진 아픔 속에서, 이처럼 나는 죽음을 맞이하고자 한다.


  그러나 죽지 못한다. 죽지 못하게 된다. 죽을 수가 없게 된다.


  가슴이 너무 아파서, 도저히 눈을 감을 수 없게 된다.


  그렇게 아픔이 죽어가는 이의 몸을 깨운다. 분노가 죽어가는 이의 슬픔에 열을 가한다. 울분이 죽어가는 이의 귀에 악다구니를 쳐댄다.


  살아야 한다.


  그 어느 곳에서도 받아들여지지 못한, 가장 형편없는 광대같은 너일지라도, 바로 너, 그러한 너는 반드시 살아야 한다. 그러한 너로 살아도 된다. 그러한 너도 살아도 된다.


  찢겨진 가슴에서 새어나오는 것이 삶이 아니었다. 터져나오는 것이 삶이었다.


  삶은 울분이 되어 토해내고 있었다. 죽어가는 이의 귀에 쏟아붓고 있었다.


  울분은 절규하는 삶의 목소리였다. 소외의 아픔을 알리는 목소리였다. 그 소외 속에서 가장 서럽게 죽지 말아야 할 가장 존귀한 것이 이 세상에 있음을 알리는 목소리였다.


  삶이 사람에게 알린다. 울분이 되어 더는 모를 수 없도록 강렬하게 알린다. 바로 이처럼 강렬한 힘이 여기에 있다고 스스로를 알린다.


  그렇게 삶이 사람을 깨운다. 가슴을 태운다. 모든 곳에서 버림받은 이를 일으켜 세운다.


  조커가 일어선다.


  내가 일어선다.


  우뚝 선다.


  스스로를 되살리는 삶의 힘을 증거하는 이가 우뚝 서서 미소짓는다.


  그는 더는 소외된 것이 아니다. 그는 이제 소외된 모든 것의 대변자로서 이 자리에 선다.


  모든 토마스 웨인의 세상이 그를 부정한다 할지라도, 그는 삶이 직접 살라고 명한 그 삶의 권능의 산증인으로서, 스스로의 삶에만 의지하여 이 자리에 선다. 그 누구도 아닌, 삶이 허락한 오직 그 자신으로서 이 자리에 당당히 선다.


  그가 바로 삶의 히어로다.


  이것은 바로 그 삶의 히어로에 대한 이야기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음의 이야기며, 나의 이야기고, 조커의 이야기다.


  귀하게 사람 대접받으며 살고 싶어하는 모든 이의 아픔을, 뜨거운 울분의 가슴으로 대변하는 진짜 히어로의 이야기다.


  그래서 울음이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다시 또 살아도 된다고, 얼마든지 살아도 된다고.


  그 무엇으로도 사그라들게 하기에는 너무나 역부족인 히어로의 가슴이 몹시도 타오르고 있었던 까닭이다.


  그렇게, 간절히 살고 싶어하는 이들에게 새겨진다.


  뜨거움이.


  이 가슴 깊이.


  나는 몹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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