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에는 3명만이 산다"
까르마라는 것이 있는지 없는지를 논쟁하는 일보다는, 우리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많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보는 일이 유익하다.
하나의 세계와 다른 세계는 '상호관계성'으로 연결되어 있다. 영향을 주면서 동시에 받게 된다. 결코 일방적일 수 없다.
그렇다면 이것이, 우리가 한 일이 우리 자신에게 그대로 돌아온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적어도 우리는 관계로 이루어진 세상 안에서는 그렇다고 말해야 한다. 또는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말하는 것 또한 좋다.
쉬운 예를 들어보자.
"빨간 티셔츠는 나쁘다."라고 생각하는 이가 있다. 그는 그러한 '세계관'을 채택하고 있으며, 그 세계관은 타인뿐 아니라 그 자신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가 빨간 티셔츠를 입은 타인을 비난하는 만큼이나, 그는 자신이 빨간 티셔츠를 입는다면 사람들이 자기를 호되게 비난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자.기.가. 쏜. 화.살.은. 자.기.에.게.로. 돌.아.간.다.
이것은 인간이 '세계관'이라는 인식구조를 만들어 사유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현상이다.
또는 다른 방식으로 상호관계성을 이해해볼 수도 있다.
패들이 동그랗게 배열된 도미노 게임을 떠올려보자. 하나의 패가 다른 패를 쳐서 쓰러뜨리면 그 움직임은 연쇄되어 결국 처음의 패를 치게 될 것이다.
자신이 행위한대로 정확하게 받게 된 것이다.
이것이 성립되는 이유는 상호관계성 때문이다. 상호관계성은 누구도 홀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이 이미 참여되어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무엇에 참여하는가를 묻는다면 그 대답은 분명하다.
인간이다.
인.간. 모.두.는. 인.간.에. 참.여.되.어. 있.다.
아무리 잘난 인간도 인간을 벗어날 수 없으며, 아무리 못난 인간도 인간을 벗어날 수 없다.
때문에 누군가가 '인간'에게 어떤 행위를 하면 그 행위가 '인간'인 그 자신에게로 소급되는 일은 필연이다.
권선징악은 자기만 초월자로서 반칙과 편법이 가능하다고 믿는 철없는 꼬마마법사 같은 생각보다는 훨씬 신뢰할 만한 법칙이며, 그것은 도덕법칙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물리법칙이다.
그러나 이러한 까르마적 개념이 정말로 작동하는지를 우리가 쉽게 신뢰할 수 없는 이유는 그 운동이 우리의 인식 밖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도미노패가 너무 많다. 최소 80억개다.
게다가 알아보기 쉽게 도미노패가 원형으로 죽 늘어서 있는 것도 아니다. 분명 순환의 구조를 띠지만, 전체의 구조는 미로처럼 아주 복잡한 얼개를 이루고 있다. 때문에 우리는 추적할 수도 없고 심지어 상상하기도 어렵다.
나아가 그 작용이 반영되기에는 물리적 현실에서 시간이 걸리는 것 같다. 그래서 어떠한 작용의 결과를 경험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어떠한 시작의 요인에 의한 것인지를 검증하는 일에 무리가 따른다. '시간차'로 인해 인과관계가 선명하지 못하게 느껴진다.
그렇기에 우리는 일종의 사고실험을 해볼 수 있다.
지구에 딱 3명의 인간만 살고 있다고 해보자.
가상의 이름을 붙여 현래, 진근, 이나라고 할 수 있다.
현래가 진근을 못생겼다고 때린다. 그러한 현래가 이나에게 똑같이 맞을 가능성은 있는가? 있다면 얼마나 높아 보이는가?
어쩌면 현래에게 맞은 진근은 대신 이나에게 화풀이를 할 수도 있다. 그렇게 고통받던 이나는 현래가 진근을 때리기에 이 모든 폭력의 순환이 시작된다고 생각하며, 현래가 잠들었을 때 그를 죽도록 구타할 수도 있다. 이것은 직접적인 영향력의 경우다.
또 어쩌면 현래에게 맞는 진근의 모습을 본 이나는, 자기도 못생긴 게 왜 사람을 때리냐며 현래에게 정의의 파이어펀치를 시전할 수도 있다. 이것은 간접적인 영향력의 경우다.
어떠한 예이든 간에, 현래가 진근에게 한 일이 이나에게 영향을 줘서 그것이 이나를 통해 다시 현래에게 돌아가게 된 것이다.
이 구조는 80억 명을 생각할 때보다는 우리에게 훨씬 가능하게 보인다.
지구에 사는 최소의 인원이 2명이 아니라 3명이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
그래야 역동이 평면적이지 않고 입체적으로 조망될 수 있다. 입체적이라는 것은 현실적이라는 의미다.
현실적으로 3명의 이름을 다시 명명해보자.
'나' '너' '그'가 바로 그 이름들이다.
'나'는 '너'에게 한대로 '그'에게서 받게 된다.
여기에서 '그'라는 것을 '사람들' '세상' '삶' 등으로 변주하면 더욱 섬세한 이해가 가능해진다.
어떠한 '나'는 늘 '세상'이 부당하게 자기를 무시하고 있다고 경험한다. 대개 이와 같은 '나'는 '너'를 부당하게 무시하는 것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세상'과 '너' 사이에는 별다른 연결고리가 없는 것 같기에, '나'는 그 두 사건을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곤 한다.
우리는 지금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나'는 '세상'과의 관계를 바꾸기 위해 노력할지도 모른다. 이제는 새롭게 달라진 자신이 되었다며 '세상'에게 조금 더 친절해달라고 눈웃음을 지을 수도 있을 것이다. 또는 '세상'을 자신의 뜻대로 통제할 방법을 찾아 이상한 사이비심리학 등을 배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너'는 무시한 채 '세상'과만 좋아지려는 전.적.으.로. 불.가.능.한. 일.을. 시.도.한.다.
더 일상적이고 분명한 형태로 이 구조를 이해해보자.
우.리.는. 자.기. 마.음.은. 무.시.한. 채.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만. 한.다.
'너'의 자리에 가장 위치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마음'이다.
'나' '마음' '사람들'은 지구에 살고 있는 3명의 가장 보편적인 이름들이다.
'나'는 자기 '마음'은 막 대하면서,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자신을 막 대하지 않기를 요구한다.
그러나 마음이라는 것은 인간의 공통재이기에, 누군가가 마음을 막 대하면 사람들은 자기의 마음이 막 대해진 것으로 경험하게 된다. 자기의 마음을 막 대한 이를 사람들이 곱게 볼리가 없다. 결국 사람들은 그가 마음에게 한 것처럼 그를 막 대하게 된다.
'나'에게나 '사람들'에게나 '마음'은 언제나 '너'의 자리에 있다.
마르틴 부버에게 '너'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너'는 언제나 '영원자 너'다.
쉽게 말해보자.
너.는. 영.원.한. 연.인.이.다.
이 막대한 것을 막 대한 일은 치명적이다.
우.리. 자.신.이. 마.음.을. 대.하.는. 방.식.이. 곧.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이.다.
마음을 자기가 돌봐주어야 할 초딩아이로 보는 이는 사람들도 초딩아이로 본다. 마음을 소중한 연인으로 보는 이는 사람들도 연인으로 본다.
그리고 그 시선은 돌아온다.
마음을 초딩아이로 보는 이를 사람들은 초딩아이로 보며, 마음을 연인으로 보는 이를 사람들은 연인으로 본다.
본질적으로 말하자면, 원래 지구에는 1명만 살고 있다.
마음을 가진 단 1명의 인간만 산다.
삶에서 펼쳐지는 모든 것은 그 인간이 자신의 마음과 맺는 관계성의 표현이다.
인간의 안에서는 마음이라고 불리고, 밖에서는 삶이라고 불린다.
우리에게 언제나 가장 그리운 음조로 '너'라고 불려야 할 바로 그것이다.
지구에 살고 있는 3명은 이러한 방식으로 삼위일체다.
지구에서 유일한 이 '너'를 사랑하는 일만이 우리의 전부다.
마.음.의. 연.인.이. 되.고. 싶.은. 일.이. 우.리.의. 소.망.의. 전.부.다.
까르마는 마음을 만나고 싶어 헤매왔던 그 모든 방황의 궤적을 뜻한다.
마침내 만나게 된 그 순간, 지구는 행복한 별이다.
인간이 연인에게 전한 가장 좋은 그 사랑을 이제 인간이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