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 있는 종교심리학 #5

"Jeff Buckley - Grace"

by 깨닫는마음씨
Jeff Buckley - Grace




데미안 라이스를 제프 버클리의 재림이라고 부를 때, 이 수식어는 제프 버클리에게도 데미안 라이스에게도 조금 아쉬운 말이다.


둘의 공통점은 하늘과 인간 사이를 중개하는 미디엄(medium)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방향성이 다르다.


데미안 라이스는 모아서 하늘로 올려보낸다. 청하고, 호소하며, 지상의 것들을 항변한다. 그렇게 하늘로 향하는 기둥을 세운다.


반면 제프 버클리는 하늘에 있는 것을 땅으로 불러온다. 형상이 없어 실은 잡아둘 수 없는 것을 그 자신이 받아 그 몸에 머물게 한다. 그리고는 땅에서 울부짖던 것들에게 신탁을 내린다.


이것은 사제와 샤먼의 차이와도, 또 기도와 공수의 차이와도 유사하다.


사제의 기도는 가닿게 만드는 것이다.


샤먼의 공수는 불러오는 것이다.


샤먼의 특성을 보이는 이들이 요절하는 경향성이 있는가에 대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인과관계는 없다. 그러나 빅터 프랭클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신적인 것'을 '무의식적인 것'으로 본다면, 개인이 감당하기에 어려운 거대한 무의식을 자주 그 몸에 머물게 하는 일은 그리 쉽지만은 않아 보인다.


펄 잼의 에디 베더는 제프 버클리와 비슷한 과다. 진짜 샤먼이다.


그러나 이쪽은, 무척 다행이게도, 오래 살고 있다.


세상의 변혁을 꿈꾸는 혁명가적 면모는, 한 개인이 끌어온 무의식적 에너지를 남김없이 투여할 수 있는 출구로 기능하는지도 모른다.


떠올려보면 여리고 섬세한 90년대의 '문학소년들'은 그들이 접촉했던 거대한 분노와 비애를 감당해내는 일에 분명 어려움을 느꼈다. 알코올과 약물의 도움을 빌려보려도 했지만, 그것들은 더욱 빠르게 그들을 붕괴시키는 데 일조했다. 그러면서도 자기파괴적인 이 행위를 멈출 수는 없었다. 이것은 마치 강신무의 전통에서 신내림의 운명을 거부할 수 없는 것과도 유사하다.


히피의 시대도 일찌감치 끝났고, 기성세대가 된 히피에 대해 저항했던 그런지의 시대도 완벽하게 끝났다.


남은 것은 심리학이다.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심리학은 인간의 의식발달에 크게 일조했던 이 두 문화적 현상에서 아주 큰 배움을 얻었다.


히피세대가 보여주었던 것을 '낙관적 영성'이라고 말해볼 수 있다면, 그런지세대가 드러낸 것은 '비관적 영성'이라고 할 수 있다.


통속적으로 비유하자면, 전자는 '시크릿'이고 후자는 '실존주의'다.


전자는 행복감의 도취 속에서 긍정하고 또 긍정함으로써 가장 긍정할 수 있는 것을 찾으려 했고, 후자는 모든 것을 부정했다. 이 방식은 'neti, neti'라고 불린다. 부정하고 또 부정함으로써 지금껏 긍정되어 온 '가짜'를 다 해체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종교심리학은 이 두 입장을 이솝우화보다는 동등하게 다룬다.


'낙관적 영성'과 '비관적 영성'은 결국 '바람과 해님'에 대한 두 지향성이다.


그러나 어감에서 경험되는 것과는 다르게 '낙관적 영성'은 해님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다.


'낙관적 영성'은 정확하게 바람 속에 있다. 바람은 모든 것을 뒤흔든다.


인간이 달착륙과 함께 우주로 인식의 지평을 확장하게 된 일은 희망만은 아니었다. 히피들에게는 실은 모든 것이 걱정이었다. 그들이 책임질 것이 더 커졌기 때문이다. 이 거대한 책무를 두고 지상에서 전쟁 따위를 할 때가 아니었다.


그들은 우주를 책임질 수 있는 역량을 키우기 위해 명상을 하고, LSD를 복용하며, 동양철학을 공부하여 우주의식과 합일하고자 했다.


'의식의 확장'이라고 말하는 것은, 인간의 지평이 확장된만큼 생겨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곧 '신대륙'에 대한 안정된 통제권을 손에 넣기 위한 경영의 입장을 출현시킨다.


히피들은 분명 이 '영성경영인들'이었다.


이들을 통해 영성분야에 대한 연구는 심화되어 무수한 메뉴얼들이 만들어졌고, 인간의 내면세계와 외면세계를 총괄하는 이 메뉴얼들에 잘 따르기만 하면 인간종은 무한히 번영할 것이라고 가정되었다.


이른바 '낙관적 영성'의 주체들은, 그들 자신이 어떠한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인간을 조명해줄 따듯한 해님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30년 후에 그들의 자녀들은 정확한 그들의 반대편에 서서 이렇게 말했다.


"너희가 말한 모든 것은 다 허상이었다. 우리는 행복하지 않고, 너희의 빛 아래에서 그 어느 때보다 우울하며 최악이다."


'비관적 영성'의 출현이다.


이것은 북풍처럼 매섭게 몰아쳤다.


거짓된 인공정원에 피어난 모조품의 꽃들을 모조리 뿌리뽑고 싶어했다.


그리고 하늘로 불기둥처럼 치솟아 '해님'이라고 이름붙여진 구름을 간절하게 몰아내고자 했다.


그럼으로써 진짜 해님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이다.


사제도 샤먼도 이 '비관적 영성'의 기획을 공유한다.


이들은 바람이다.


불을 향하고자 하는 바람이고, 불을 머금고자 하는 바람이다.


생명은 그 가슴에 스스로 타는 불이 붙어 생명이 된다.


이것은 그렇게 '진짜'로 살고 싶은 실존주의의 기획이다.


표면적으로 '비관적 영성'은 추락해간다. 더욱 밑을 향한다. 근원에서부터 태우고 싶어하는 까닭이다. 가장 아래에서부터 모든 것을 다 하늘로 태워올리는 상승기류가 되고 싶어하는 까닭이다.


그것은 하늘에 떠있는 해님을 위장하지 않고, 다만 정직한 바람이 되어 해님을 꿈꾼다.


> Wait in the fire

> 불 속에서 기다려요

> And she weeps on my arm

> 그녀는 내 품에 안겨 흐느끼고

> Walking to the bright lights in sorrow

> 슬픔 속에서 밝은 빛을 향해 걸어가요

> Oh, drink a bit of wine

> 와인을 조금 마시고

> We both might go tomorrow

> 우리는 내일 함께 떠날 거예요

> Oh, my love

> 내 사랑이여


낙관적인 '위'가 아니라 비관적인 '아래'를 향해, 바람은 아마도 죽고 싶다는 바람으로 형상화되어 불어갈 것이다.


이것은 키르케고르의 절망이다.


모든 것이 부정되고, 자기 자신마저도 부정된 가장 밑바닥에서, 그리고 바람은 전적으로 새롭게 태어나고 싶다는 바람으로 다시 알려진다.


대체 어느 끝까지의 절망의 깊이가 구원되어야 하는지 바람의 여정은 정직했으며, 남은 것은 심리학이다.


'은총의 심리학'이다.


은총(grace)이란 무엇인가?


'내려온 것'이다.


모든 깊이를 향해 무조건적으로 내려온 것이 바로 은총이다.


그리고 은총의 비밀은 언제나 은총을 찾던 이보다 은총이 먼저 내려와 있다는 것이다.


실존주의적 이카로스는 날개를 달지 않는다. 그 두 손에 삽을 들고 대지를 파내려간다. 그리고 무수한 삽질 끝에, 무조건적인 삽질 끝에, 그가 가장 깊은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는 태양이다.


모든 것을 부정하고, 자기 자신마저도 부정한 그러한 자신 속에 태양이 있었다.


바람이 쭉정이 같은 가짜의 껍데기들을 다 날려버린 그 끝에, 그의 가슴 안에는 해님이 떠있다.


그리고 정직한 이는 그 해님과 함께 살아오른다.


가장 어둡던 곳에서부터 태양이 환히 밝혀가며 상승한다. 끝까지 간 그의 모든 것은 이제 뱡향이 전환되어 시작에서부터 통째로 구원된다.


이것을 회심(conversion)이라고 부른다.


회심은 은총이 만든다. 은총은 오직 은총에만 열려 있고자 한 정직한 바람에 의해 발견된다.


이것이 '비관적 영성'의 길이다.


한 삽, 한 삽 파내려가며 보물을 발견하고 자신을 성장시켜가는 낙관적 행복에 의한 것이 아니다.


전적으로 무의미하게 보일 헛된 삽질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의미는 언제나 무의미성의 가장 깊은 중심에서만 발견된다.


보이지 않아도 거기에 있다.


노래처럼.


노래가 아름다운 것은, 보이지 않는 진짜에 대한 신뢰를 담아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래는 개인의 삶의 깊이로 내려와 흐르며, 그 깊이만큼 다시 끌어올린다.


노래는 밑으로 내리는 것이면서 동시에 위로 올리는 것, 불러오는 것이면서 동시에 가닿게 만드는 것, 노래하는 이의 생애처럼 완수하지 못한 것 같으나 동시에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 곧 삽질의 신비다. 이 삽질에 영광있으라. 은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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