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가 사라진 세상에서는 어떤 재미로 살 수 있을까?"
어떤 것이 가장 번성할 때 우리는 거기에서 그 끝을 본다.
인생은 게임이라고 말했고, 게임은 정보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했다. 정보를 얻는 만큼 게임에서 레벨업을 하게 되고, 가장 최고의 정보만을 얻어 효율적이고도 재미있게 레벨업을 해나가면 인생에서 성공할 수 있다고도 말했다.
이처럼 인생이라는 게임에는 공략본이라는 것이 있는 것처럼 말했다.
그래서 공략본들을 살펴보았다. 거기에는 무슨 핵심적인 말이 적혀 있었는가.
"네 자신을 남들이 탐낼 정보로 만들어라."
무수한 공략본들은 이 한 마디로 다 요약되었다.
핵심은 '나를 이야기로 파는 일'이었다.
나라고 하는 것을 이야기로 파는 이들이 초기에 그 신선함으로 인해 돈을 쥐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는 조금 더 확연하게 잘나보이는 이들만이 나를 이야기할 수 있다고 믿어졌다. 그래서 평균적이거나 또는 평균보다도 못하게 보이는 이들이 당당하게 자기의 이야기를 하는 현실은 새롭고 획기적인 울림으로 사람들에게 다가왔다.
'마음만 먹으면 나도 얼마든지 주인공이 될 수 있구나!'
이것은 이야기책 속에 나오는 '선택받은 왕자와 공주'만이 주인공이 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직접 자신이 주인공인 이야기책을 써서 매력적인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일종의 '새로운 마법'처럼 인식되었다.
이 새로운 마법의 초기 향유자들은 전술한 것처럼 그 마력에 공감하여 매료된 이들의 지지 속에 돈을 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돈은 그대로 그들의 레벨을 표상하게 되었다. 이들은 인생이라는 게임에서 정말로 성공하는 법을 아는 고레벨의 고수처럼 입지화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제 시장이 열렸다.
유튜브와 SNS로 대표되는 가상의 허공은 나의 이야기를 전시하여 파는 장터가 되었다.
이 장터에서 살아남기 위해 나는 더욱더 선정적인 소재가 되어야 하는 일은 필연이었다. 저마다 다 나를 쥐어짜내 판매의 이점을 얻을 수 있는 콘텐츠로 전환하려고 매일을 보낸다. 나라고 하는 것은 이처럼 강박이 되었으며, 오늘날의 생존의 필수재가 되었다.
'나'는 이제 더는 재미있지 않게 된 것이다.
누구나 다 나의 이야기를 떠들지만, 어떠한 나도 재미있지 않다.
얕고 지루할 뿐이다.
OTT에서 범람하는 영화들과도 같다. 양적인 다양성을 주장하지만 실은 볼 만한 것이 없다.
처음에는 분명 재미있었을 것이다.
거기에는 자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자유와 재미는 언제나 함께 간다.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은 '보편적인 도덕'이라고 하는 것에 눌려 스스로를 억압해왔다. 인간을 정의하는 '모범적인 이야기'에 따라 그 자신을 맞추어가고자 노력해왔다. 집단의 '이상'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개인의 '사정'보다 우선했다. '우리'가 '나'를 늘 앞서있던 것이다. 그럼으로써 우리(we)는 나에 대한 우리(cage)로 작용해왔다. 이것을 근대의 상황이라고 말한다.
바로 이 근대의 시대적 감옥으로부터 해방되어, 인간이 조심스럽게 '나'를 부르짖게 되었을 때, 분명 그것은 해방의 전조였다.
이내 자유의 공기는 힘차게 밀려들어 왔다.
근대로부터의 해방이니 이것은 탈근대였을 것이다.
'보편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를 사람들은 노래하기 시작했다. 보편적인 이상에 비하면 너무나 보잘 것 없지만 그래도 소중한 나의 이야기다. 눈을 꾹 감고 용기를 내어 한번 노래해봤더니, 성대한 박수갈채도 받기 시작했다.
내가 나로서 살아있다는 것에 재미를 느낀 그 역사적 순간이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 모든 영광의 순간은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당당하게 나의 이야기를 하자!"라는 표어가 이제 모두가 그렇게 따라 살아야만 할 하나의 '보편적인 이야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자기홍보는 새로운 전체주의적 도덕이 되었다.
그렇게 '당위의 감옥'이 되었다.
인간이 탈출했다고 여긴 근대는 이러한 방식으로 다시 인간을 포획하는 일에 성공했다.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났는가?
팔지 말아야 할 것을 팔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는, 팔 수 없는 것을 팔려 했기 때문이다.
근대의 '보편적인 이야기'를 해체하고자 한 첫 움직임은 실존주의 철학에 의해 펼쳐졌다.
실존주의의 기획은 오직 단 하나, 개인을 상대적인 비교의 세상에서 건져 올리는 것이었다.
개인이라고 하는 것이, 즉 '나'라고 하는 것이 '상대적인 소재'가 아니라 '절대적인 소재'임을 밝히고자 했던 것이다.
이것은 내가 남들보다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내가, 나로서, 나에게 특별하다는 사실만을 의미한다.
그러니 '나'는 팔 수 없는 것이다. 아무런 시장가치가 없다. 엄밀히는 그 모든 시장가치를 초월한다.
시장의 매대에 올라가는 순간 '나'는 절대성을 잃고 철저하게 상대화된다. 그리고는 상대적인 세상에서 늘 일어나는 것처럼, 남들의 인정을 받아야만 특별해질 수 있는 소재로 전락하게 된다.
남들의 인정을 얻어야만 비로소 나일 수 있는 나라니, 그러한 것도 나인가?
이것은 '나'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인간이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보편적인 이야기'의 억압에 맞서 싸우고 있는 것이 '나'인가?
이렇게 생각할 때, 이러한 나는 언제나 보편적인 이야기에 다시금 갇히고야 만다.
아주 단순하다.
어떠한 것에 저항하는 이는, 자신이 저항하는 그것에 의존함으로써만이 자기 자신을 세울 수 있는 까닭이다. 저항자는 늘 저항할 소재가 필요하다. 그러니 그 소재는 사라지지 않고 늘 지속된다. 저항이 억압을 지속하게 만드는 셈이다.
'보편적인 이야기'의 억압에 저항함으로써 처음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낸 경험은 짜릿했다. 권위적인 부모에게 눌려 지내다가 처음으로 자신의 의견을 떨리는 목소리로나마 주장했던 그 경험은 분명 잊지 못할 하나의 성공체험이다.
그리고 그게 다다.
이러한 성공체험에 고착되면, 반복적으로 그 체험이 일어났던 구조로 회귀하게만 된다.
즉, 자신이 저항할 거대한 억압을 스스로 만들어놓고 거기에 저항하는 방식으로만 '나'라는 것을 구현하게 된다.
그리고 이처럼 자신을 억압하던 것으로부터 승리해낸 이 '성공적인 나'가 바로 시장에 전시해서 판매할 소재가 된다.
자기를 억압하는 것에 의존해서만이, 또 자기에게 호응할 시장의 소비자들에 의존해서만이 비로소 '나'를 세우는 일이 가능한, 여러모로 허약하기 짝이 없는 나다.
가장 감옥에 있게 된 것이 가장 자유롭다고 외치는 곳, 그곳은 어디인가.
정신병동이다.
가상의 허공 위에는 유튜브 정신병동이 잘 기능하고 있다. 나날이 입원자 수가 늘어나 성행한다.
'보편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이제 '나의 이야기'를 하면 우리는 근대의 우리를 벗어나 내가 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지금의 현실은 잘 보여주고 있다.
근대를 '앎의 시대'라고도 말한다. 더 핵심적인 앎만 얻으면 인생의 모든 것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 근대다.
가장 중요한 정보들을 얻으면, 또 자기 자신이 가장 중요한 정보가 되면 인생에서 성공할 수 있다고 믿는 오늘날의 모습과 무엇이 다른가?
근대의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 해방책으로 근대적 기제를 활용하니, 근대에 계속 사로잡히는 일은 필연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어떠한 것에 저항하는 형태로 그것에 의존함으로써 얻은 자유란 결코 자유가 아니다.
그러나 외연으로는 '보편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를 지향하고 있으니, 이러한 속에서 자신은 자유롭다고 착각하게 된다. 그럼으로써 실은 의존되어 있다는 사실은 숨어버린다. 은폐되었기에 그 자각이 더욱 어려운 것이 된다.
자신을 자유인이라고 착각하는 노예는 노예의 상태를 벗어나기에 가장 어려운 입장에 놓인다.
이러한 삶이 재미있을리가 없다.
유튜브를 재미있다고 보고 있는 이도 있는가?
다 보고 있으니 자기도 봐야 할 것 같아 보며, 이걸 보는 것 외는 다른 어떤 것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본다.
주말에 재미도 없는 유튜브를 멍하니 보고 있는 우리의 모습과, 우리가 어릴 적에 야구중계를 틀어놓고는 TV 앞에서 초라하게 잠든 우리 아버지의 모습은 대체 무엇이 다른가?
텔레비전이 처음 보급되었을 때도 인간은 자유를 경험했을 것이다. 안방으로 세계가 밀려왔을 것이며, 한 자리에 앉아 지구촌과 호흡하는 감동을 느꼈을 것이다.
미디어는 다 같다.
종국에는 자유의 노예만을 남길 뿐이다.
이것은 미디어회의론인가?
그렇지 않다. 상대적인 정보, 상대적인 앎을 아무리 많이 얻어도, 나로 살아가는 '재미'를 계속해서 증진시킬 수는 없다는 그 명확한 한계점을 드러내고 싶을 뿐이다.
엄밀히 말하건대, 우리는 미디어가 재미있었던 것이 아니다.
미디어를 통해 살짝 엿보게 된 '나의 편린'이 재미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유튜브의 끝을 본다.
'나'라는 정보상품의 최후를 본다.
신데렐라만큼이나 그 무수한 '나의 이야기'는 이제 재미가 없다. 정직하게 신데렐라가 더 재미있다.
신데렐라는 왜 재미있는가?
누구의 이야기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 어떤 '나'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잘 쓰인 이야기, 그것은 '비어있는 이야기'다. '내가 없는 이야기'다.
내가 없고, 그 빈 자리에는 그럼 무엇이 있는가?
인간이 있다.
빈 자리는 인간이 인간과 만나 놀 자리다.
인간은 인간을 만나 서로 '나의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다. 한 인간이 앉아 상대의 37권짜리 자서전을 잘 경청한 다음에는 이제 자신의 26권짜리 자서전과 별책부록을 들려주지 않는다.
인간은 인간을 만나 '나'를 나눈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주절주절 떠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살아온 그 시간의 고유하며 총체적인 결과인 '지금 이것'을 그대로 교류한다.
그 눈빛과, 숨결과, 온기를 나눈다.
이것을 바로 '마음을 나눈다'고 말한다.
마음을 나누는 일이 바로 나를 나누는 일이다.
마음밖에는 내가 나일 수 있는 것이 없는 까닭이다.
조금 더 섬세하게 말해보자.
인간을 향한 마음, 나는 그것이다.
내가 나인 것은 언제라도, '지금 이것'으로도, 늘 인간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으로도 인간을 생각하고, 유튜브로도 인간이 궁금하다.
그리고 그 모든 미디어가 사라진 현실 속에서도, 나무 사이에서 들리는 새소리와 강가에 피는 저녁노을로도, 한결같이 인간을 그린다.
인간이 보고 싶다.
당신이 보고 싶다.
그렇다면 나는 나다.
당신과 또 만나 놀 수 있다니, 나는 늘 설레고 이 삶이 재미있다.
당신에게 인정받아서 내가 아니다.
당신을 사랑하기에 나는 나다.
당신이 대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사랑할 수 있다니, 이것은 신비이며, 이 신비는 앎을 아득히 초월해있다. 정보의 차원에서 비교될 수 있는 것이 없어 이것은 절대적이다.
우리는 아마도 서로의 자유로운 절대성에, 서로를 향하는 바로 그 마음에 반했을 것이고, 그래서 우리의 만남에는 절대적인 재미가 있다.
당신과 마음을 나누는 이 재미로 나는 영영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