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봄날은 항복으로 시작된다"
게임에는 승패가 있다.
게임의 감각으로 살다보면 자연스럽게 승패에 집착하게 된다. 이것은 자기 삶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이기고자 하는 모습으로 자주 형상화된다.
유튜브를 보고 얻은 레시피로 마스터쉐프처럼 보이려 하고, 나무위키에서 읽은 지식으로 전문가인 척하며, SNS에서 본 남의 사진을 통해 자기가 그 경험의 대가인 양 행세하려 한다.
어떻든 간에 자기는 매우 똑똑해서 모든 것을 알고 있어야 하고, 가장 좋은 최신정보의 담지자여야 하며, 그 결과로 모든 게임에서 승리해야 한다.
이렇게 살고 있을 때 '항복'이라는 말은 너무나 씁쓸하고 절망스러운 지옥밑바닥으로 추락하게 될 것 같은 감각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것은 아마도 재기불가한 '영원한 패배'를 의미하는 듯도 싶다. 항복선언만 하지 않으면 언제든 자신은 다시 일어서 승리를 쟁취할 가능성이 있지만, 자기의 입으로 항복이라고 말하면 모든 것이 끝날 것처럼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나 패배가 정말로 괴로워지는 것은 항복선언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장기를 두고 있는 아이의 모습을 떠올려보라. 아버지는 아이에게 장기두는 법을 가르쳐주면서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런데 아이는 외통수여서 아이가 질 수밖에 없다고 아버지가 가르쳐준 상황에 대해 저항을 시작한다. 어떤 식으로 말을 옮겨도 패배는 확정적이다. 이럴 때 저항하는 방식은 무조건 버티는 것이다. 얼굴이 시뻘개진 채 고개를 숙이고 이를 악물고는 그저 '아무 것도 선택하지 않은 채' 시간만 죽이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결국 지친 아버지가 짜증을 내며 이제 그만 하자고 장기판을 치울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아이는, 어른이 저렇게 화를 내면 되겠냐며 일종의 '정신승리'를 경험한다. 바로 이 정신승리를 이루기 위해 아이는 항복선언을 하지 않고 버틴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신승리에는 너무나 큰 대가가 지불된다. 무엇보다도 살려지지 않고 죽여지는 시간 동안 몸이 너무 괴롭다. 장시간 고통받던 끝에 아버지와의 관계도 안좋아진다. 어쩌면 아버지는 다시는 아이와 장기를 두려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아이는 아버지와 함께 즐겁고 생기있는 시간을 보낼 기회을 영영 잃게 된 것이다.
만약 아이가 항복선언을 일찍 했으면 패배는 그리 괴롭지 않다. 왜인가?
하나의 패배는 배움의 시간이 되기 때문이다. 배우면서 아이는 장기실력이 늘어가며, 장기는 더욱 재미있어진다. 아이가 눈동자를 빛내며 배우는 모습을 보고는 아버지도 행복하다. 둘 사이의 관계도 한결 깊어진다.
거의 모든 면에서 좋은 일만 있다.
정신승리 하나만을 위해 모든 것을 다 잃고 만 삶의 양상과는 정반대의 것이다.
이것은 어떻게든 항복선언을 하지 않기 위한 '저항'의 방식에 대한 묘사다. 또 다른 방식도 있다.
패배를 경험하고 싶지 않고, 항복선언은 더욱더 하고 싶지 않은 어떠한 이들은, 이제 직접적으로 게임을 하려 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게임방송을 시청하는 관람객이 되고, 별점과 좋아요를 통해 그 게임플레이를 평가하는 평론가가 되며, 나아가서는 게임에 대해 모든 것을 다 아는 척하는 외부의 훈수꾼이 된다.
그리고는 최종적으로 이제 게임플레이어들을 가르치는 스승이 된다.
그럼으로써 영원히 항복선언을 하지 않아도 될 것만 같은 구조를 만들어낸다.
이것은 항복선언에 대한 '회피'의 방식이다. 이와 같은 '저항'과 '회피'의 방식은 서로 연쇄되기도 하고 중첩되기도 한다. 그러다가는 합쳐져서 제3의 형태를 이루게도 된다. 그것은 바로 '모욕'의 방식이다.
모욕은 무엇인가?
자신이 패배하게 될 때 경험하게 될 것 같은 감정을 상대로 하여금 대신 경험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두 가지의 형태로 일어난다.
A에게 패배한 것처럼 경험하는 B가 있다. A와 같은 장에 있으면 B는 영영 자기가 A를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한다. 늘 그 밑에서 쓰라린 패배감을 느끼며 비굴하게 살아야 할 것만 같다.
이럴 때 어떠한 B는 C를 끌어들인다. 그리고 A와 C 사이에 이간질을 시작한다. 특히 A에게는 C를 A보다 더 대단한 인물인 것처럼 말함으로써 A를 자극한다. 나아가 C는 잘하는데 A는 어떤 것을 못하는지를 교묘하게 부각시킨 뒤, 자기는 A를 벗어나 C에게 더욱 진정한 것을 얻으러 갈 것이라는 식으로 암시하곤 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B는 다른 인물을 끌어들여 A를 평가절하하는 방식으로 모욕하곤 한다.
또 어떠한 B는 A에게 수동공격을 가함으로써, 너무나 괴로워진 A가 B에게 떠나라는 말을 먼저 하게 만드는 형태로 활동한다. 그렇게 A의 장에서 벗어난 B는 이제 자유의 투사처럼 자기를 입지화한 뒤, A에게 취해온 것들을 활용해 이제 자기가 A보다 더 진정한 것을 보여주겠다는 식으로 선언한다. 그리고는 A에게서 가지고 온 것들을 교묘하게 뒤틀어 그것들을 조롱하는 방식으로 A를 모욕한다.
이러한 방식들이 A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그동안 A는 B가 떠나지 못하도록 거의 반드시 막아온 까닭이다.
왜 그럴까?
아주 단순하다.
B가 아직까지 A에게 항복선언을 하지 않은 까닭이다.
A는 정확하게 항복선언을 듣고 게임을 끝내기 위해 B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B가 현재 일어난 사실적인 결과를 흐지부지 흐린 채 도망가려고 하기에 A는 B를 붙잡아왔던 것이다.
그리고 B는 어떻게든 항복선언만은 하지 않기 위해, 즉 자신이 A에게 졌다는 사실을 본질적인 차원에서 인정하지 않기 위해, 결국에는 A를 모욕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쓰레기를 A에게 몽땅 투기하고는 도망가게 된 것이다.
인생을 자기가 똑똑한 머리로 승리해나가는 게임으로 생각하며 살고 있으면 이러한 방식이 필연적으로 발달된다.
이간질과 날조, 조롱, 모욕 등은 완전히 막다른 길에 놓인 지성이 최후로 하게 되는 방식이다.
지성은 왜 막다른 길에 놓였는가?
항복선언을 하지 않아서다.
자신이 항복선언을 하지 않은 게임판에서 도망쳐서 다른 게임판으로 이동하면 거기에서는 자기가 게임고수인 척 대장놀이를 하는 일이 가능할 것이라고 이들이 생각할 수는 있다.
그러나 삶은 우리가 한 번 막힌 장면을 계속해서 우리에게 조우시킨다.
장소와 관계대상을 바꾸면 문제상황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문제의 원인을 갖고 있는 바로 그 자신이 이동해가는 것이기에, 이동한 그곳에서도 동일한 문제가 생겨난다.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은 자신이 항복선언을 하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우리의 삶이 막히는 것은 언제나 우리가 항복선언을 하지 않아서다.
겉으로는 겸손하게 상대를 위에 두고 존중하는 척하지만, 실은 상대를 언제나 자기 아래로 보고 있는 이가 항복선언을 하지 않는다.
게임감각으로 살아가고 있으면 늘 자기가 제일 위라고 자동적으로 간주하게 된다. 왜인가?
자기는 정보의 취합자인 정보주체이기 때문이다.
A, C, D, E, F, G 등의 그 모든 것의 좋은 점만을 따와서 자기는 제일 좋은 것을 갖게 된 주체라고 B는 믿고 있다. 그러니 A 하나만 갖고 있는 A보다 자신이 우월한 것은 당연하다. 이러한 방식으로 B는 그 어떤 것보다 자기가 가장 많이 가진 가장 높은 주체라는 정체성을 형성한다.
그러니 이러한 이는 상대들을 정말로 존중할 수가 없다. 상대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있는 그대로 볼 수가 없다.
늘 평가절하를 해서 깎아내리고, 대신 자기를 높이는 데 여념이 없다.
농구를 엄청 잘하는 이에게 지면 농구를 깎아내리고 자기는 더 진정한 스포츠인 축구를 할 줄 안다고 말하는 식이다. 그러다가 축구를 엄청 잘하는 이에게 지면 이제 그는 야구로 이동해갈 것이다. 비루함의 표상이다.
항복선언을 한다는 것은, 대단한 것을 정말로 대단한 것으로 상쾌하게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한 인정을 이룬 이는 상대를 따라하지도 않고, 더는 상대를 이기려고 뒤에서 이를 갈지도 않는다. 언젠가는 자기가 동분야에서 더 높은 성취를 이루어 이기겠다며 복수심을 불태우지도 않는다.
상대의 시간을 절대적으로 인정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상대는 그것을 왜 잘하게 되었는가? 그 자신의 시간을 모조리 다 거기에 쏟았기 때문이다. 다른 것을 다 포기하고 오직 그것에만 자신의 인생을 다 바쳤기 때문이다.
항복선언은 바로 이 인간의 삶에 대한 커다란 존중감을 표하는 일이다.
항복선언을 하지 않는 것은 상대의 인생을 부정하는 일과도 같다. 그리고 이렇게 상대의 인생을 부정하면 자기의 인생도 부정된다.
그래서 항복선언을 하지 않으면 자기의 인생이 막히는 것이다.
늘 같은 자리에서 정체된다.
이것은 계절이 멈춘 것과 같다. 봄이 오지 않는다.
더 흥미로운 지점은, 어떤 이가 자신이 진 것처럼 경험되어 항복선언을 이루어야 할 그 시점을 살펴보면, 실은 상대에게 진 것 이전에 이미 그 자신의 인생이 막혀있는 답답한 좌절감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이다.
상대는 다만 자신이 경험하고 있던 좌절감을 가시적으로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 것에 지나지 않는다.
패배는 이미 한참 전에 일어나고 있었다.
자기가 자기의 인생이 막히는 쪽으로 계속 움직이고 있었기에 생겨난 '인생에 진 것 같은' 그 패배의 형식이다.
결국 항복선언을 하지 않는 이는 자기 인생의 문제를 상대의 탓인 것처럼 전가한 뒤 그를 모욕하기까지 한 최저의 활동 속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이러한 이는 자기 인생의 한 시절, 게임에 승리했던 것만 같은 과거의 봄날을 붙잡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봄은 지나고 반드시 여름이 오며, 또 가을이 온다. 그리고 과거의 영광이 모두 사라진 겨울 속에 그는 있다.
그리고 이것은 다만 삶의 사이클일 뿐이다. 삶은 그를 패배시키려고 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모욕하려고 하고 있는 것 또한 아니다.
오히려 어느 때보다 더 빠르게 영광이 지고 겨울이 온 것 같다면, 실은 삶은 그의 편이었던 것이다.
봄을 그렇게 좋아하는 이에게, 삶은 새로운 봄을 더욱 빠르게 가져다주려고 하고 있었을 뿐이다.
항복선언은 단순하게 "겨울이다."라는 말일 뿐이다.
삶이라고 하는 사이클을 가장 대단한 것으로 존중하며, 그 시간의 흐름을 절대적으로 인정하고 신뢰한다는 고백일 뿐이다.
항복(降伏)이라는 한자를 살펴보자.
항복할항(降) 자는 '산을 내려오는 발걸음'을 묘사한 글자다. 이것은 자기가 가장 높은 곳에 있다는 착각을 깨고 자신이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다.
엎드릴복(伏) 자는 '사람 옆에 개가 함께 있는 모습'을 묘사한 글자다. 이것은 분명한 동반의 그림이다. 앞 글자와 연결해서 이해해보면, 가장 높은 곳에서 내려와 있는 자리는 사람과 개가 함께하며 서로에게 충실한 그 자리다.
항복은 그렇다면 정말로 어떤 의미가 되는가?
높은 곳에서 홀로 막막하게 있던 상황에서 벗어나, 이제 우리가 길 위에 서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충실한 동행자와 함께.
어떤 것을 대단히 잘하는 이에게 항복선언을 하면, 그가 우리 인생에서의 동행인이 된다. 항복선언은 역설적으로 상대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에 대한 그 찬사와 감동인 까닭이다. 자기를 정확하게 알아본 이를 상대는 싫어할 수 없다. 정직한 그의 편이 된다.
결국 항복선언은 우리가 우리보다 대단한 것들을 향해 그것이 정말로 대단하다고 정직하게 발화하는 감탄사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계절은 이 경이의 감탄사로 열린다.
"와, 여름이네."
"오, 가을이 왔다."
"우와, 겨울이야."
그러면 우리가 이렇게 말하게 될 날이 왜 멀었겠는가?
"이야, 봄이다!"
항복선언은 이처럼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많은 것을 우리의 편으로 삼는 일이면서,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세력인 바로 우리의 시간을 우리의 편으로 삼는 일이다.
항복해버리면, 어느덧 우리 인생의 봄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