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 밖에서 온 심리학 #6

"있는 그대로의 진짜 의미"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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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캐릭터를 육성하듯이 자신에게 다양한 경험들을 통한 경험치를 먹이며 자기 자신을 성장시킨다.


그러다가 스탯을 잘못 분배한 것 같거나 성장루트를 잘못 타서, 원하던 모습이 되지 못하고 '똥캐'가 된 것 같을 때 우리는 이런 말을 하기도 한다.


"이런 나의 모습도 있는 그대로 괜찮아."


정말로 괜찮은가?


괜찮지 않은데 괜찮다고 자기최면을 걸기 위해 '있는 그대로'라는 표현은 자주 남발된다.


그것은 자기위로이거나 자기도취의 주문이 되어 있다.


우리가 스스로를 만들어간다고 믿었던 때가 있다. 자신이 기획한 정신적 설계도에 따라 당당하게 '나'를 완성해가는 길이 삶이라고도 믿어졌다.


이러한 낡은 관점에 따라 실존주의는 가장 오독되기도 하였다.


실존이라는 것은 마치 백지의 상태에서 출발해, 자신이 꿈꾸는 미래의 멋진 자화상을 그리는 일에 전력을 다하는 자아실현의 과정을 의미하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이 세상에 유일하고 절대적인 본질이라는 것은 없으니 이제 나의 본질을 내가 스스로 창조한다며, 어디 라노벨이나 무협지에 나올 법한 부끄러운 대사의 대잔치로 전락한 것이다.


이에 따라, 대단히 실존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있는 그대로' 또한 같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 세상에 '하나로 규정된 정답'은 없으니, 어떻게 실현되었든 간에 지금 내 자신의 모습이 엄연한 '다양성의 정답'이고, 또 이러한 내 자신이 가장 온전한 주인공이라는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있는 그대로'는 기능하게 된 것이다.


"이게 나야! 어쩌라구?"


오늘날의 '있는 그대로'가 남용되는 방식은, 한 대 때려주고 싶게 만드는 이 태도를 함축한다.


때려주고 싶은 모든 것에는 자기가 이 우주의 신적 중심이라는 착각이 담겨 있다. 그 착각이 깨지라고 우리는 때려주고 싶게 되는 것이다.


자기가 신적 중심이라는 착각을 갖는 이는, 자기의 근거가 자기라고 생각한다. 마치 자기가 자기를 창조해서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것 같은 태도를 보인다.


그러니 그 책임감은 막대하다. 자기가 자기에게 근거해있으니, 모든 실패의 책임은 자기에게로만 귀속된다.


때문에 이러한 이들은 남들에게 지지 않게끔 자기도 여러 좋은 경험들을 소비하려 하고, 자기를 각종 분야의 전문가인 것처럼 꾸미려 하며, 또 무엇보다 많은 돈을 벌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쫓긴다.


이를 적절히 비유하자면, 남의 자식들이 다니는 좋은 학원에 자기 자식은 등록하지 못해 뒤쳐지는 일이 없도록, 어떻게든 무리를 해서라도 남들 다 하는 가장 좋아보이는 것들을 자기 자식에게도 해주려고 하는 부모의 모습과도 같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식의 실패는 부모의 실패다.


그리고 이처럼 실패했다고 느끼는 부모는 이제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 아이는 있는 그대로 괜찮아."


이를 악물고 간신히 입가에 미소를 띄워올리며 말한다. 그러나 그 눈은 결코 웃고 있지 않다.


신적 주체의 실패는 신적인 실패다.


마치 자신의 실수로 버튼을 잘못 눌러 이 세상 모든 이가 대홍수에 휩쓸려 죽게 만든 것과 동일한 그 실패다.


주홍글씨 중의 주홍글씨이며, 영원한 저주의 낙인이다.


그러니 방어해야 한다. 어떻게든 정당화해야 한다. 잘못된 것이 없는 것처럼 기필코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토해낸다.


"지금 이 모습 그대로 괜찮아. 모든 것은 온전해. 있는 그대로 다 괜찮은 거야."


이처럼 오늘날의 '있는 그대로'는 '실패한 신'의 억지스러운 변명구다.


신적 주체는 왜 실패했는가?


그 답은 분명하다.


인생은 게임이 아니기 때문이며, 자신은 게임마스터와 같은 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삶을 육성시뮬레이션 게임처럼 살고 있으면 실패는 필연이다.


삶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육성하는 과정이 아니다.


실존주의는, 또 존재의 심리학은 아주 다른 얘기를 한다.


삶은 존재가 우리를 육성하는 과정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우리 자신을 만든다.


'있는 그대로'는 바로 이 의미를 담고 있는, 실은 아주 엄청난 말이다.


이것은 거의, 지금 죽어도 된다는 말과 같다. 어떤 말씀이든지 따르겠다고 하는 것과 같다.


내가 내 자신을 사랑하고 수용하겠다는 것이 '있는 그대로'인가?


그렇지 않다.


존재로부터 사랑받고 존재로부터 수용받는 일에 내 자신은 다만 열려 있겠다는 것이 '있는 그대로'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존재하게 하는 것이 아니며, 또는 우리가 존재를 존재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존재가 우리 자신을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 '있는 그대로'라는 말은 '존재가 내게 하시는대로'를 뜻하게 된다.


우리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존재가 하는 일을 믿고 따르겠다는 것이다.


존재가 우리에게 펼쳐내고 있는 것이며, 우리는 그에 대해 응답할 뿐이다. 우리가 앞서 정신적 설계도를 쥐고, 또는 펜이나 촛불을 쥐고 "자, 나가자!"라며 다른 모든 것을 존재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이 성숙하지 못했던 시절의 낡은 발상이다.


존재가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를 밝히고 풀어내게 될 때, 그것을 '의미'라고 부른다.


"지금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자기가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한다며 궁리하고 있던 그 모든 잡생각이 사리지고, 우리의 시야가 선명해지며, 현재 존재가 움직이고 있던 바를 하나의 그림처럼 감지하게 되면, 이 순간이 바로 의미를 발견한 순간이다.


존재의 철학자인 하이데거의 후예로서 실존상담은 바로 이 일을 한다.


"지금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는 "지금 존재가 무엇을 하시려고 하는가?"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응답한다.


"존재여 그렇게 하시옵소서. 따르겠나이다. 당신이 먼저 가시는 그 발걸음을 시(詩)로서 노래하겠나이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는 원래 시어(詩語)다.


존재를 향한 절대적 신뢰와 사랑을 담은 아주 엄청난 시어다.


존재가 바로 그렇게 먼저 스스로를 다 던져 인간에게 절대적 신뢰와 사랑을 보내고 있던 만큼의 그 어마어마함이다.


존재의 신성한 발걸음을 뒤따라간 인간의 정직한 발걸음이 시라면, 시가 청하는 것은 바로 사색이다.


'있는 그대로'는 정답과 같은 주문으로 채택되어야 할 소비재가 아니라, 그 울림에 비추어 깊게 음미되어야 할 창조재다. 즉, 지금 이순간 언제나 새롭게 그 의미를 드러내야 할 소재다.


우리가 언어적 욕망으로 실현하려던 바가 아니라, 존재는 정말로 우리 자신을 어떻게 만들려고 하고 있는가?


대체 어떤 모습으로 우리가 가장 멋지게 존재할 수 있도록, 그럼으로써 이 세상에 온 바대로 행복하도록 존재는 지금 움직이고 있는가?


이 지점은 분명하다.


존재는 자기가 신적 주체인 것처럼 활동하는 자아를 돕기 위해 움직이지 않는다. 바로 그 자아가 깨어지도록 움직인다.


그럼으로써 존재야말로 바로 신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며, 그렇게 우리가 '있는 그대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어마어마한 신적 사실임을 우리에게 알리고자 한다.


신적 사실의 본원적 힘으로 말미암아, 가장 작고 이상한 것들에 속박되어 있던 우리 자신을 해방시키고, 가장 작고 이상한 것들에 눌려 기형적인 모습이 되었던 우리 자신의, 우리 자신도 몰랐던, 빛나는 모습을 찾게 하기 위함이다. 더욱 아름답고 생기있게 피어나도록 하기 위함이다.


결국 우리는 이처럼 존재의 빛 아래, 그리고 존재의 축복 위에 서있는 것이다.


각종 주술적 쇼들로 자기가 자기 자신을 축복하려는 일은, 또 그 축복의 버프를 통해 자기 자신을 육성하려는 일은 가상공간에서의 소꿉놀이로 족할 것이다. 실제의 우리는 절대적으로 가장 큰 축복을 다만 아낌없이 받는 일에 열려 있고자 하는 것이 전부다.


존재는 계획이 다 있다. 계획이 있는 척하지만 실은 아무 것도 모르고, 실은 다 망하는 우리와는 다르다.


우리를 위한 가장 뜻깊은 계획을 존재는 반드시 이룬다.


이러한 존재를 전적으로 신뢰하겠다는 것, 그리고 노래하겠다는 것, 이것이 '있는 그대로'의 진짜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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