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심리학 #53

"보리수의 시간"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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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는 것도 아니고 버리는 것도 아니다.


긴장도 아니고 이완도 아니다.


그것인 것도 아니고 그것이 아닌 것도 아니다.


부처불(佛) 자에는 이러한 뜻이 담겨 있다. 사람(人)이 아니라고(弗) 드러내면서 그 안에는 언제나 사람(人)을 담고 있다.


이것은 보리수의 생태이며, 보리수의 생태로 살아가는 이의 생활이다.


그런데 보리수를 생활하지 않고, 양육하는 이들도 있다. 이들은 자기보다 큰 보리수의 품에 안겨 보리수를 닮아가기보다는, 자기 안에 보리수를 키운다.


소위, 자신이 깨달음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이들이다.


깨달음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이는 곧 깨달음의 양육자다. 이들은 깨달음을 아이처럼 보호하려고 한다. 그러기 위해 자기가 얼마나 강력한 권위의 보호자인지를 증명하는 일에 힘을 쏟는다. 이 일은 다음과 같은 방식들로 펼쳐진다.


첫 번째로, 가장 주된 방식은 '철수'다. 깨달음아이를 더러운 세상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이들은 안전한 라푼젤의 탑을 세워 그 안으로 철수한다. 이들이 보는 세상은 추악하고 오염되었으며 질낮은 곳이다. 청정한 고급아파트에 사는 자기 아이가 임대아파트에 사는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게 하듯이, 이들은 깨달음이라는 것을 교류하지 않는다.


두 번째로, 오늘날 유행하는 방식은 '통합'이다. 이것은 아이가 원하는 것은 다 시켜주고자 하는 모습으로 드러난다. 짜장면도 온전하고 짬뽕도 온전하니 다 우리 아이의 것이라는 식이다. 이러한 방식 속에서 남의 것을 뺏어서라도 우리 아이의 배를 채워주려는 일은 정당화된다. 이것은 남의 말들을 도둑질해 취합함으로써 자기가 가장 높은 깨달음을 얻은 사람인 척 구는 모습으로 아주 잘 나타난다. 이들에게는 깨달음이라는 것이 가장 양적인 소재이며, 그것들은 몽땅 다 자기 것이다.


세 번째로, 가장 그럴듯한 외연으로 행사되는 방식은 '수용'이다. 여기에는 '적극적 수용'과 '소극적 수용'이 있다. 양자의 공통점은 이 세상 모든 것을 자기가 품어주어야 할 아이들로 본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적극적 수용'은 자기가 경험하는 현상에 수반하는 고통을 감수하고서라도 어떻게든 '다 받아주려는' 입장을 취한다. 이를 악물고 끄아아 신음을 내면서 "그래 이게 그 마음이었구나. 이렇게 아프고 온전했구나."라는 대사를 하는 것이 그 전형적인 모습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입양'을 시도하는 것이다. 반면 '소극적 수용'은 모든 현상의 온전함을 자기가 '다 알아주려는' 입장이다. 그럼으로써 '아이들'이 이 상냥한 권위에 감화되어 자기의 아이가 되겠다고 자발적으로 '입양'을 청하는 결과를 기대한다. 이러한 이들에게 깨달음이라는 것은 '부모의 권위'와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가장 많은 아이들을 소유하며 지키는 부모가 진정한 깨달음의 권위자라는 식이다.


이 세 방식은 전부 다 소유의 논리로 작동한다. 그래서 일방통행이다. 다른 이들을, 또는 여러 마음작용들을 자기가 수용하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일방통행이 아닌 것은 아니다. 애.초.에. 수.용.은. 하.나.가. 다.른. 하.나.를. 알.아.주.고. 받.아.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장 수용이 아닌 것은 무엇인가?


버.티.는. 일.이.다.


그리고 모든 소유의 논리는 다 버티는 일에 다름아니다. 버텨야만 유지할 수 있고, 계속 가질 수 있다.


매일같이 이들은 탑에 갇혀 미치게 된 라푼젤이 방문을 쾅쾅 두드리는 소리를 버티고, 자기가 훔쳐온 남의 말들이 뇌 속 마굿간에서 서로 싸우는 모순의 혼란을 버티며, 꼴보기 싫은 아이들 앞에서 선한 부모인 척 상냥하게 미소짓는 일을 버틴다.


그래야만 자기가 깨달음을 가졌다고 증명할 수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버티는 일이 워낙 힘들다보니 이들은 이상한 것들을 다양하게도 고안해낸다.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나 손목 등의 혈을 두드리면 마음을 수용하는 일이 한결 쉬워진다거나, 라푼젤 에니메이션을 보며 스토리텔링을 소비하면 방에 갇힌 라푼젤이 조용해진다거나, 짜장면은 얼마나 약하면 짜장면이 되고 싶었을지 또 짬뽕은 얼마나 속상했으면 짬뽕이 되고 싶었을지 그 취약점들에 초점을 맞추어 이해하면 그것들을 다 먹지 않아도 마치 다 먹은 통합적 혜택만을 누리게 된다는 식으로 이들이 이상한 얘기들을 하는 이유는, 단지 자기들이 버티는 일이 힘들어서다.


깨달음을 가진 척하는 일이 원래 이토록 힘든 일이다.


사랑, 자유, 존재 등의 언어만큼이나 수용 또한 오늘날에는 대표적으로 몰락한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수용이라는 것은 어떠한 것을 가지는 방편, 곧 소유의 논리로 굴절되었다.


그러나, 수용하면 그것을 가질 수 있고, 그것에 대한 중요한 권위를 얻을 수 있다는 발상은 실제로는 조금도 작동하지 않는 논리다. 연애를 떠올려보면 분명하다. 우리가 상대를 다 받아주고 알아준다고 해서, 그렇게 우리가 상대를 버텨낸다고 해서, 그 상대가 우리를 좋아하게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아주 많은 경우 상대는 우리로부터 멀어지고 싶어한다.


왜 그럴까?


우리가 상대를 전적으로 소유하려고 하니, 상대는 질식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아주 질려버린다.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본다면, 우리가 정말로 좋아하게 되는 이는 누구일까?


우리를 구속하지 않는 이다.


우리를 전적으로 풀어주는 이다.


이것은 아이가 놀이터에서 놀게 한 뒤, 자기는 놀이터 밖에서 지켜보는 엄마의 입장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가 소망하는 것은 언제나 '엄마 없는 놀이터'다.


자기가 아이들의 개성과 자율성을 존중하며 그들을 잘 다룬다고 생각하는 어떤 선생들은, 아이들을 강압적 권위로 통제하려 하지 않고 다만 아이들에게 자유를 허용함으로써, 오히려 아이들이 알아서 자기 일을 해나가는 동시에 선생을 자상하고 부드러운 진짜 권위를 가진 참어른으로 보게 된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이것이 바로 전형적인 독재주의의 내용이다.


자유를 허용하고 있는 이로 인해 그 자리에 자유가 생겨난다는 것, 이것은 독재 중의 최고의 독재다.


우리에게는 수용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자유를 허용해줄 이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다만 자유가 필요할 뿐이다.


자.유.의. 근.간.은. 언.제.나. 숨.쉴. 자.유.다.


그리고 이 호흡이라는 형식이 바로 수용에 대한 정확한 의미를 밝혀준다.


호흡은 가지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호흡에는 버리는 작용이 함께 있다.


정확히 말하면, 호흡은 가지는 것도 아니고 버리는 것도 아니다. 그 둘을 통합해야 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날숨과 들숨, 각각의 온전함을 알아주어 통합해야 한다는 어리석은 말을 우리는 어디에서도 들어보지 못했다.


자.연.스.러.운. 삶.의. 과.정.에.는. 원.래. 통.합.이. 필.요.없.다.


자연스럽게 살아가고 있는 생명은 알아서 그의 일을 한다. 스스로 자기조직적인 섭식작용을 한다.


생명은 가지기 위해 먹지 않는다. 버리기 위해서도 먹지 않는다. 살아가고 싶어서 먹을 뿐이다.


생명은 더 많은 먹이를 위장 안에 가지려고 버티지도 않고, 가진 것을 잃지 않고자 최대한 똥을 싸지 않으려고 버티지도 않는다.


다시 호흡으로 비유하면, 소유하기 위해 버티는 일은 숨을 참는 일과도 같다.


이것은 생명임을 부정하고자 하는 일이다.


생명이면서 동시에 가장 생명이 아닌 척하는 것, 그것이 헤매는 인간의 모습이다. 때문에 그 반대편에서, 인간이면서 동시에 인간이 아닌 부처는 생명성을 회복한 인간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다.


보리수가 키운 인간, 그래서 보리수를 닮은 인간이다.


보리수는 태양빛을 받아 그 잎새를 반짝인다. 그렇게 자신의 존재로 태양을 찬미한다.


어떤 것이 정말로 수용되었다면, 그때는 반드시 절대적 감사의 자기표현이 나온다.


아이가 학예회무대에서 학부모들에게 수용됨으로써 자기의 예능을 과시하는 것이 자기표현이 아니다.


자.기.표.현.은. 타.자.를. 향.한. 고.백.의. 형.식.을. 갖.는.다.


사고를 저지른 연예인이 개심해서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면서, 그동안 팬여러분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들인지를 오만하게 잊어왔다고, 이제는 그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정성으로 다가갈 것이라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 것이 또한 고백이 아니다.


각종 쇼는 넘쳐나지만, 고백은 언제나 하나뿐이다.


눈.을. 떠.서. 그. 존.재.를. 똑.바.로. 보.는. 것.이.다.


그 하나뿐인 중대성을,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그 귀한 의미를.


가지고자 버티고 있을 때는 눈이 감겨 있다. 입도 앙 다문 채 닫혀 있다. 귀도 잘 들리지 않는다.


수용은 다만 열려 있다는 의미다.


존재를 향해 눈이 열려 있고, 귀가 열려 있고, 입이 열려 있는 것이 수용이다. 그래서 쌍방통행이 일어난다.


다시 말하지만, 보리수의 생태다.


살아가는 모든 것은 존재의 신비를 향해 열려 있다.


인간은 더욱 직접적으로 그 신비에 초대되어 신비로 젖어간다.


인간이 존재를 양육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인간에게 자신을 다 준다.


붓다가 보리수에 앉아 한 일은 이러한 일이다.


그는 세상으로부터 철수하지도 않았고, 동서고금의 위대한 지혜들을 통합하고 있지도 않았으며, 어떻게든 자기가 모든 것을 다 수용해주겠다며 "마음, 드루와, 드루와!" 하고 있지 않았다.


붓다는 그냥 눈만 뜨고 있었다. 숨만 쉬었다. 귀만 열고, 입으로는 "좋다."라고만 미소했다.


깨달음을 가진 자가 아니었다.


깨달은 자였다.


가지는 것도 아니고 버리는 것도 아니다. 삶이라고 하는 우리의 시간이 그러하다. 다만 기회이며, 다만 감사하다.


다만 이처럼 좋은 것들에 대한 고백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렇게 그는 보리수의 시간을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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