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좋아하는 우화"
우화(寓話)란 '의미의 이야기'다.
전체가 통째로 은유로 구성된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우화의 서사 자체는 임시적인 사다리와 같은 작용만을 한다. 사다리를 밟고 새로운 의미의 지평에 올라서면 이제 사다리는 필요없는 것이다. 통째로 폐기된다. 의미를 획득한 우화의 서사는 반복되지 않는다. 반복될 필요가 없다.
선(禪)의 대화는 대표적인 우화의 형식을 갖는다. 오직 어떠한 진실된 의미에 눈뜨도록 돕기 위해서만 그 형식이 구성된다.
통상적으로 우화는 '지혜를 전하는 짧은 이야기'라고도 말해진다. 이러한 의미에도 선은 부합한다. 그러나 지혜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방식으로 지혜를 전하는 것이 아니다.
우.화.는. 지.혜.의. 직.접.체.험.을. 겨.냥.한.다.
그래서 이야기의 형식을 갖지만 사실은 이야기가 아니다. 실시간적인 호흡의 교류다. 표현 그대로 '살아있는 말'이다.
살아있는 말은 우리에게 돌연히 살아있는 것을 개방해낸다.
우리로 하여금 살아있다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를 조우하게 만든다.
우리가 좋아하는 이러한 우화가 있다.
어느 두 친구가 고깃집에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한 친구가 말했다.
"그거 아나? 이제 나에게는 이 세상 모든 곳이 나의 집일세."
그 말을 들은 다른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그래? 그러면 지금 자네가 살고 있는 집은 내가 가져도 되겠군?"
그러자 말을 꺼냈던 친구가 대답했다.
"물론이지. 이 고깃집은 이제 자네 것일세."
그리고 조금 더 잘 알려진 이러한 우화도 있다.
어떤 이가 성자에게 물었다.
"영원한 행복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성자가 대답했다.
"바보들과 다투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자 질문한 이가 말했다.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자는 대답했다.
"네, 당신이 옳습니다."
우리는 왜 이러한 우화들을 좋아하는가?
거기에 웃음이 있어서다.
그런데 이러한 웃음은 그 끝에서 자주 눈물로 바뀌기도 하는 웃음이다.
인.간.이. 지.금. 막. 풀.려.난. 까.닭.이.다.
너무나 쪼잔하고 비루한 자기 자신이 밉게만 만든 자아로부터, 개인을 겁박하여 축소시키는 관계의 억압으로부터, 또 우리 자신이 만들어내 스스로를 옭아매는 한계로 작동시키고 있는 무수한 생각들로부터, 그렇게 인간이라는 존재를 작고 더 작게 만드는 모든 저주로부터, 지금 인간이 풀려났다. 자유를 얻었다.
자.유.는. 크.기.의. 회.복.이.다.
인간은 인간이라는 존재 자신의 원래의 크기를 눈치채고야 말았다.
언어행렬과 언어행렬 사이의 행간으로부터 새어나오는 그 거대한 음성을 듣고야 말았다.
의.미.는. 행.간.에. 깃.들.어. 있.다.
우화는 행간의 이야기. 시와 마찬가지다.
설명할 수는 없어도 웃음으로, 또 눈물로, 우리는 기어이 만나고야 만다.
우리 자신이 이 정도로 거대한 존재였다는 우리 자신의 크기를. 그 의미를.
화들짝 돌연히 반가워서 폭소한 것이고, 또 오열한 것이다.
그동안 살아있지 않은 것처럼, 아니 살면 안되는 것처럼 눈치만 보며 작았던 그 모습이 보였고, 그럼에도 하늘 아래 태산과 같이 떳떳하게 서있던 거대한 그 기척을 느꼈다.
자신도 마음껏 살아도 되는 것이라고, 살아있는 것은 그 자신을 정확하게 알았다.
살아있다는 것은 자신으로 존재하는 일이었다.
자신의 원래 크기로 자유롭게 존재하는 일이었다.
이와 같은 존.재.의.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 지.혜.다.
우화는 우리에게 이 '지혜의 직접체험'의 기회를 제공하며, 그래서 우리는 우화를 좋아한다.
우리는 우리가 아주 크고 멋지며, 놀랍도록 자유로운 존재였다는 사실과 만나는 일을 정말로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