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하는 게 있으면 말만 해"
자신이 너무나 그것을 원하는 것 같고 계속 그것에 집착되는 것, 게임 속에서는 이러한 것을 얻으려면 레벨을 높여야 할지 모른다. 더 많은 퀘스트를 완수해서 명성을 높이고, 능력치를 올리며, 이제 그것을 가질 수 있는 충분한 자격을 증명해야만 그것이 자기 손에 들어올 것이다.
물론 더 빠르게는 현질을 하면 된다.
그래서 다 돈에 목숨을 건다. 돈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원하는 것을 가슴태우지 않고 빨리 얻으려면 돈이 최고인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의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가 열병처럼 원하고 있는 그것은 정말로 우리가 원하고 있는 것인가?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이해해보자.
우리가 정말로 원하고 있는 것은, 그것도 우리를 원하고 있다.
때문에 우리가 정말로 갖고 싶어하는 것은 대개 이미 우리의 손에 들어와 있다. 적어도 우리의 근처에 있다. 인력작용의 결과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가깝지 않은 것은 실은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닐 수 있다.
어쩌면 이 '거리감'이 핵심일 것이다.
우리에게 그것이 멀리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간절히 원한다고 착각하고 있을지 모른다.
욕망의 크기는 거리감에 비례한다.
거리감을 메워주는 것은 그렇다면 무엇일까?
앞서 말한 것처럼, 더 많은 거리를 도약할 수 있는 자신의 역량이나 기술은 일정 부분 유용할 것이며, 또 돈 역시 유용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소재들은 잠깐 닿게는 만들어주지만 이내 고무줄의 탄성작용처럼 우리가 원래 위치해있던 자리로 우리를 후퇴시킨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이 도구적 소재들은 우리 자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말로 거리감을 메워주는 것, 그 무엇보다도 빠르고 확실하며 거의 영구적으로 거리감을 매워주는 것은 바로 우리의 존재다.
욕망의 크기는 존재의 크기로만 상쇄될 수 있다.
자기 존재를 크게 확인하고 있는 이들은 그래서 욕망에 잘 휘둘리지 않는다. 욕망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미 가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 존재를 작게 경험하는 이들은 자꾸만 자신의 욕망에 치인다. 늘 가슴이 요동치는 불안과 쫓기는 듯한 조바심을 경험한다. 이대로 있으면 안될 것 같고, 빨리 '저기'로 가야만 할 것 같은 그 압박감이다.
더욱 쫓기는 이들은 어떠한 이들인가?
그것을 원한다고 말도 못하는 이들이다.
이들은 말을 하는 대신에, 그것을 어떻게 얻을지에 대한 생각을 한다. 생각을 하고 있으니 말은 더욱 나오지 않는다. 그러면 가슴이 아주 답답해지며, 머리만 미로처럼 어지럽다.
원하는 것을 얻을 자격을 갖추기 위해, 이들은 지금 던젼의 미로에 진입한 것이다.
성공적인 결과가 있으면 좋겠지만, 인생은 게임이 아니라서 영영 현기증 속에 헤매게 될 뿐이다.
삶을 게임으로 만들지 않고, 세계를 던젼으로 만들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말만 하면 된다.
말만 하는 습관이 생기면 아주 좋다.
그러면 우주의 기운이 모여 커다란 욕망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는 실은 그것을 갖고 싶은 게 아니다. 그러니 그 욕망의 소재가 이루어져야 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단지 그것을 갖고 싶다고 말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왜 말하고 싶은가?
스스로에게서 발화되는 말을 스스로 듣고는,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고 싶어서다.
자신이 그것을 원해도 되는 자신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싶어한다.
그러한 자신이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싶어한다.
이것은 자유의 가능성이다.
아주 섹시한 이성이 있다. 우리는 그 이성을 원하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다만 우리 자신이 섹시한 이성을 원할 수 있고, 또 원해도 된다는 그 사실을 이해하고 싶을 뿐이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늘 섹시한 이성 앞에서 기가 죽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속박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만나고 싶은 것이다.
자유의 크기는 언제나 존재의 크기와 동일한 것이다.
우리가 어떤 것을 크게 원하는 만큼, 우리는 자신의 존재를 크게 확인하고 싶은 것이며, 곧 그것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자신의 자유를 크게 실현하고 싶은 것이다.
분명하다.
자유는 모든 것을 다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소유하고 있는 그 모든 것으로부터 자신이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말만 하는 일은 이러한 자유를 펼쳐가는 길이다.
현명한 엄마들은 아이에게 이 방식으로 잘 안내하곤 한다. 장난감을 사주기보다는 그 장난감을 원한다고 '말만 하라고' 요청한다. 그리고 말만 아주 즐겁게 하게 된 아이는 이제 그 장난감을 사달라고 조르지 않는다. 의식은 이미 자유로워져서 마트 밖을 내달리고 있다.
우리가 어떠한 것을 원한다고 말만 할 때, 우리는 우리가 그러한 것을 원해도 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당당하게 선언하고 있는 것과도 같다.
여기에서는 우리 존재의 크기가 회복되는 역사가 펼쳐진다.
물론 말이 존재를 크게 만든 것은 아니다.
현재 발화되는 말의 기능은, 앞서 말해진 것을 해체하기 위함이다.
"너는 그런 것을 원하면 안돼."
이같은 수많은 금지어가 우리의 인생 내내 우리에게 말해져왔고, 그 결과로 우리 자신과 우리에게 금지된 소재들 사이의 거리감이 형성되어왔다.
우리 존재의 크기는 결국 언어에 의해 비루한 크기로 축소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현재의 우리가 그것을 원한다고 발화하는 말은, 기존에 우리에게 저주로 새겨진 말과 전면적으로 충돌하여 서로를 함께 해체하는 말이 된다.
말은 날아간다.
남는 것은 말과 아무 상관없는 우리의 존재다. 그 본래의 크기다. 그 본래의 자유다.
그러니 어떻게 말해야 할지 말을 굴릴 필요도 없다.
이것은 존재를 크게 만드는 말의 마법이 아니다. 존재의 터전에 깔린 지뢰에 수류탄을 던져 그 둘이 같이 없어지게 하는 단순작업일 뿐이다.
대충 말해도 되며, 아무렇게나 말해도 된다. 수사학은 필요없으며, 무식하게 말해도 된다.
단지 말만 하면 된다.
원하는 게 있으면 말만 하면 된다.
그러면 이루어진다.
원한다고 착각해온 그 소망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진짜 소망이 이루어진다.
가장 크고 자유로운 나를 다시 찾게 된다.
늘 가장 가까이 있었지만, 말에 가리워져 보이지 않았던 나를 이제야 만난다.
우리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언제나 이처럼 가장 가까이에 있었다.
그러니 말만 하면 된다.
말을 해서 말을 버리면, 나는 늘 여기에서 웃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