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 밖에서 온 심리학 #8

"말함의 의미"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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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작글의 출발점에서부터 우리는 유튜브와 SNS 이후의 시대를 시작한다고 말했다.


링크 하나를 걸어보자.


<SNS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다> SNS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다 [PADO] - 머니투데이 (mt.co.kr)


"소셜 미디어에서는 모두가 접근 가능하다면 관객 또한 있어야 한다고 여긴다. 글을 쓴 작가도, 프로젝트를 발표한 유명인도, 그냥 자신의 삶을 사는 예쁜 여성도, 익명의 악플러조차도 그렇게 생각한다. 어떤 이유로든 (혹은 아무 이유 없이) 네트워크 연결이 작동하면 모든 연결이 활보할 가치가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끔찍한 발상이었다. 내가 과거에 썼듯, 인간은 원래 이 정도로 서로에게 말을 걸도록 돼 있지 않았다. 그렇게 많은 말을 해서도 안 됐고, 그런 표현이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돼서도 안 됐다. 모든 생각이나 관념에 대해 댓글을 달거나 응수할 권리가 있다고 여겨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인용한 이 부분은 지금 우리가 전하고자 하는 핵심을 시사하고 있다.


유치원 학예회가 24시간 펼쳐지고, 우리가 그 자리의 관객으로 자리를 지켜야 하는 일이 강제되고 있다고 해보자.


학예회에 출석하지 않으면 돈도 벌지 못하게 만들고, 같이 놀아주지도 않을 것이라고까지 한다.


이것은 새로운 지옥이다.


이 지옥의 생활양식은 단지 가상공간 속에서만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오프라인의 현실에서도 작동하고 있다.


'심리적 카메라'가 사람들 자신을 늘 조명하고 있는 것 같다. 이로 인해, 실제적으로 감시하는 그 누구도 없지만 사람들에게는 자발적인 억압이 이루어진다. 이것은 두 방식으로 일어난다.


첫 번째는, 스스로 알아서 하는 자기검열의 방식이다. 여기에는 정말로 말하고 싶은 것은 말하지 못하는 억압이 존재한다. 그보다는 자신이 '선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인물로 보이기 위한 말들만이 정제된다.


두 번째는, 아무 말 대잔치를 펼치는 자기방종의 방식이다. 이것은 표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억압이 만든 것이다. 이제는 아무리 못났어도 당당하게 자기 주장을 하지 못하면 바보라는 식의 도덕적 명령이 억압한다. 이로써 사람들은 '선하기 위해' 위악을 자처하게 되거나, 말하고 싶지 않은데 말해야만 하는 강박에 시달리게 된다.


결국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에게는 '말함'이라는 것이 착취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로 인해 '말함의 의미' 또한 최대치로 굴절되어 퇴색되었던 것이다.


말함이 참다운 말함으로 기능하지 못할 때 우리는 이 현실을 지옥같이 경험한다. 이러한 경우 말함이란 오히려 지옥의 상황을 더 크게 심화시키는 일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너무나 단순하며 효과적인 예가 있다.


우리가 세상을 떠도는 수많은 공허한 말들에 지친 채로 집에 돌아왔다. 그리고 이제 민석이는 공부하러 방에 들어가야 하고, 우리는 부엌 식탁에 조신히 앉아야 한다. 집에 들어와서도 또 '말함의 고문'이 기다리고 있다. 이에 대한 유일한 대응책은, 참고 또 참는 것이다. 유튜브 심리학 채널에서 배운대로 공감하고, 수용하며, 경청해야 한다. 여기에서 우리도 '말함'을 시작했다가는 3차 세계대전의 발발이다.


우리가 이처럼 말에 지친 현실은, 말함의 의미라는 것이 대체 어느 정도로 몰락했는가를 그대로 보여준다.


'말함'이라는 것이 '당당하게 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말함은 거대담론의 압제에 맞서 다양한 미시담론들이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투사처럼 활동하는 그러한 일이 아니다.


이것은 다만 "어, 왜 너만 독재해? 나도 독재할래!"라는 권력투쟁의 의도에 불과하다. 물론 담론들은 원래 권력을 얻기 위해 서로 투쟁한다. 그러면 그 성취물의 소재에 붙어야 할 이름은 '권력' 또는 '권위'이지, 결코 '자유'는 아니다.


자유는 담론에 있지 않다.


담론들이 서로를 전시하고 있는 곳은 자유의 평원이라기보다는 도때기시장이다.


그리고 그곳을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바로 자유다.


쉽게 비유하면, SNS에서 자기만의 길을 간다며 자기를 전시하는 것이 자유가 아니라, SNS를 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 자유인 것이다.


자유의 원형이 '숨쉴 수 있는 자유'임을 다른 글에서 말한 바 있다.


이것을 우리는 이제 '숨을 수 있는 자유'라고 다시 말해보자.


어렸을 때 친구들과 숨바꼭질이나 술래잡기를 하면서 우리가 경험했던 것은 분명 자유다.


그때 우리에게는 '숨을 수 있는 자유'가 있었고, 이 자유가 펼쳐지던 만큼 우리는 생기있게 숨쉴 수도 있었다.


'숨을 수 있는 자유'는 그대로 '숨쉴 수 있는 자유'였다.


'숨'은 가장 일차적인 '말함'이다.


그러니 말함의 자유란 실제로는 '숨을 수 있는 자유'를 전제해서만이 가능한 것이다.


물론 이 숨는다는 행위는 온라인의 익명성을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것은 공간의 문제다. 숨기 위해서는 공간이 필요하다. 숨는다는 행위는 공간에 딱 들어맞게 우리가 존재하는 상황을 묘사한다. 그렇게 우리 자신에게 공간이 있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게 된다. 익명성을 갖기보다는 우리는 오히려 더욱 구체적인 우리 자신이 된다.


숨는다는 것은 공간을 발견한다는 것이고, 공간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정말로 존재하게 된다.


존재는 원래 비어 있는 것으로 있기 때문이다.


존재는 스스로 숨으며, 그 숨는 행위를 통해 스스로를 드러낸다.


하이데거는 여기에서 중요한 이해를 우리에게 전한다.


존재가 이와 같이 움직일 때, 그것은 존재가 우리를 존재하라고 초대하고 있는 것이며,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존재의 부름에 응답하여 우리가 하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말함'이다.


존재는 부르고, 인간은 말한다.


'말함'이라는 것은 이처럼 존재를 향한 응답으로서만 '말함'인 것이다.


어려운 얘기가 아니다.


우리가 정말로 말할 때 거기에는 우리 자신의 존재를 밝히는 감동이 있다는, 너무나 단순하고 자명한 사실에 대한 얘기다.


이렇게 말할 때, 그 말함은 다 시(詩)다. 존재의 시다.


시는 존재를 담은 말이며, 동시에 공간을 담은 말이다. 그러니 이 삶의 전부를 다 담은 것이다. 동시에 그 둘은 같다. 그러니 이 삶을 일치된 하나로 담은 것이다.


결국 시를 통해 '말함'과 '말하는 인간'도 하나가 된다.


그것을 '존재한다'라고 부른다. '자유롭다'라고도 '나다'라고도 부를 것이다.


이 '말함의 의미'를 잃어서, 우리는 우리가 존재하는지를 모르게 되었다.


고작해야 가상공간에 만들어낸 자신의 언어적 이미지를 자기라고 믿으며, 그 비루한 존재감을 붙들고 산다.


SNS에 별들은 많으나, 그 빛은 우리의 발밑조차 밝혀주지 못한다.


가장 화려하게 노출되어 있는 것이 실은 가장 가려진 것인 셈이다. 의미를 상실한 말함은 이처럼 우리의 현실을 어둡게 만들어 간다. 말할수록 더욱 어두워진다. 인생이 깜깜하다.


자기가 별이 되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늘에 존재하는 별을 노래하는 자는 어떠한가?


더 많은 별빛들이 그의 하늘에서 빛나며 그의 땅을 밝힌다.


존재의 신비가 그의 삶에 가득하다.


신비는 숨어 있기에 신비가 아니다. 숨음으로써 드러내기에 신비다. 없음으로써 있기에 신비다.


왜 없게 되었는가?


자신을 다 주었기 때문이다. 별은 그 별빛을 인간에게 다 주었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이 받은 별빛을 발견하고, 음미하며, 나눈다.


말이 되어 뿌려진다.


사람들 모두의 가슴에도 담긴 별빛이 이미 그들의 삶을 밝히고 있다는 오직 그 사실만을 전하기 위해.


사람들 모두가 바로 그렇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이것이 바로 '말함의 의미'다.


우리는 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로 존재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말하지 않더라도, 그 말하지 않는 자유의 말함 속에서 우리는 무엇보다 나로 존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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