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턴 투 서울(Return to Seoul, 2023)

피보다 진한 것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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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프랑스로 입양된 한국인여성은 프랑스와 한국 사이에서 방황하지 않는다.


정체성의 고민은 그보다 훨씬 깊은 차원에서 생겨난다.


쉽게 말해, 그녀는 거의 비등한 점수를 보이는 P와 J 사이에서 자신이 INFP일지 INFJ일지를 선택하는 일을 인생과제로 여기지 않는다.


처음에는 그녀도 그러했다.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을 확실히 하고 싶었다.


규정에 대한 욕망은 안정에의 필요가 만들어낸다.


자기의 인생이 흔들리거나 막혔을 때, 우리는 정체성의 고민을 한다. 이것이 바로 자신이라고 말할 수 있는 특정한 자기정체성을 확보하기만 하면 그에 따라 자동으로 '자신의 길'이라는 것 또한 생겨날 것 같아서다.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몰라서, 이른바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몰라서, 우리는 자신이 불안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찾으려 한다. 자기 자신이 확고해지면 다른 모든 것도 안정되리라고 기대한다.


하지만 실제로 시작해본 자아찾기의 여정에는 끝이 없다.


갈수록 다른 거울들이 출현하며, 거울의 형상만큼이나 자신의 모습도 늘 다르게 비친다. 심지어는 같은 거울조차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상이 달라진다.


자신이 확고해지기는 커녕, 더 무수하게 분열되는 기분이다.


의식들이 분산되어 자신이 흐려진다. 그럴수록 하나의 거울에만 의존해보려다가 염증을 느끼기도 하고, 또 다른 새로운 거울을 찾아 나서서는 동일한 일만을 반복한다.


이 모든 흐림 속에서 '진한 것'은 대체 어디에 있는가.


그녀는 결국에는 피로 회귀하는가.


고향을 지키는 엄마의 품에 이제야 정착해 미나리전이나 부쳐 먹을 준비를 하는가.


다행이다.


그 자리에서도 또 떠나게 되어 다행이다.


흘러서 다행이다.


눈물도 흐르고, 발걸음도 흐른다.


그녀가 분명하게 안 것은 자신은 고향으로부터 버려져 고향을 잃은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고향과 같은 것은 없었다는 사실이다.


누구에게나 그러했다.


다만 우리의 인생이 흐르지 못하고 막혀 있었기에, 새롭게 출현한 삶의 변수를 마침내 기다려온 고향인 것처럼 형상화한 뒤, 그것에게 고향이 되어줄 것을 강제했을 뿐이다.


그렇게 고향을 회복한다는 목표가 생겨나면, 길이 생겨나고, 자신은 그 길 위에서 흔들림없이 걸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


그리고는 누구에게나 같은 일이 일어났다.


만나고, 헤어지고, 또 걸어가는, 여느 때와 같은 일이다.


어쩌면 그녀는 이 지점에서 눈치챘을 것이다.


고향을 찾고 진정한 자기 자신을 찾는다는 명목은 그저 인생의 모험을 떠나고 싶었던 마음이 조금 용기를 얻을 수 있게끔 내건 사소한 핑계였다는 것을.


만나고, 헤어지고, 또 걸어가는 그 일뿐이었으며, 그렇게 그녀는 변화되어가고, 주변인들도 변화되어갔다.


모든 것이 흐르고, 더는 막히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지금껏 경험해온 정체성들의 통합적 완성이 아니었으며, 순간순간 그때의 그녀일 뿐이었다. 그 순간에 가장 정직하고 충실한 그녀였다.


안정이라는 것은 정체되어 있을 때가 아니라, 오히려 흐르고 있을 때 생겨나는 것이었다.


그렇게 그녀는 흐르고 흘러, 이제 피아노 앞에 앉아 있다.


처음 본 악보를 온몸으로 직관하며, 낯선 두려움 속으로 가득 뛰어들어, 그녀는 건반을 누르기 시작한다.


어부이자, 에어컨설치기사였으며, 생의 말년을 맞은 지금에야 피아노를 처음 독학으로 배우게 되며 생기를 회복한 그녀의 친부처럼, 어쩌면 친부에게 물려받았을지 모를 그 감각으로, 그녀의 연주가 펼쳐진다.


이것은 음악이며, 이것은 여행이다.


음표들은 그녀가 걸어온 발걸음들.


그녀는 언제나 연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진정한 음표를 찾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음표들 위를 사뿐히 오가며 그녀라는 인생을 자유로이 노래하고 있었다.


결코 정체될 수 없는 자유를 이 시간에 깊이 새기고 있었다.


피보다 진한 것, 세상에서 가장 진한 것은 정녕 무엇이었나?


그것은 그녀가 걸어온 여행길에 새겨진 그녀의 발자국이다.


어쩌다가 당신이 내딛고, 운명처럼 당신이 다시 밟은 당신의 발자국, 그것들은 당신이라는 음악이 될 것이라고 이 영화는 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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