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아픔으로부터 배우는 일"
아프다고 다 사랑인 것은 결코 아니지만, 사랑은 아픈 것이다.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서 아픈 것이 아니라, 사랑은 원래 아픈 것이다.
사랑이 아닌 것이라 아픈 것이 아니라, 사랑이 아닌 것도 아프고, 사랑도 아픈 것이다.
너우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닌가?
노래는 아름답지만 진실은 아니다.
너무 어려운 수학은 수학이 아닌가?
자신이 못한다고 해서 그것을 무시하거나 변질시키려 하는 행위는 게임감각이 만들어낸다. 게임에서야 치트키를 쓸 수 있겠지만, 사랑에는 어떤 치트키도 통하지 않는다. 자신이 배우는 대로만 정직하게 펼쳐질 뿐이다.
사랑을 어떤 무겁고 심각한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에는 아픔이 동반된다는 것을 분명히 할 뿐이다.
실제로 우리는 사랑을 두려워한다.
사랑하는 일뿐만 아니라 우리는 사랑받는 일에도 닫혀 있다. 실은 이 일에 더욱 닫혀 있다.
여기에는 사랑에 의해 자신이 변화되거나 또는 사라질 것 같다는 두려움이 있다.
그리고 이 두려움은 자신과 사랑의 관계에 놓이게 된 대상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자기가 사랑하는 이가 다른 모습으로 바뀌거나 갑자기 사라질 것 같아 우리는 두려움을 느낀다.
이것이 바로 사랑에 수반하는 아픔의 정체다.
사랑은 변화의 힘이며, 변화에는 아픔이 따른다.
사랑을 요청하면서 변화하지 않으려는 일은 성립불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고집을 부릴 때 우리는 가장 크게 아픔을 경험한다.
칼릴 지브란은 사랑의 본질에 대해 아주 섬세하게 노래한 시인이다. 사랑은 우리의 껍질을 벗기려 하고, 우리의 자아를 털어내버리려 하며, 우리의 왕관을 떨어트리려 한다고 그는 노래한다.
우리가 그것을 바랐기 때문이다. 그 소망으로 사랑을 불렀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가 불렀으면서도 오히려 그 사랑에 저항하며 고집을 부리다가 아픔이 커지게 되면, 우리는 그 자리에서 탈출해 이렇게 말하곤 한다.
"휴우. 이제야 자유를 얻었네. 지금부터는 내가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보여주겠어."
보통 이 '진정한 사랑'의 예제가 되곤 하는 것은 장발장과 미리엘 주교의 관계 같은 것이다.
상대를 아프게 하지 않으며 언제나 상대의 욕구를 긍정하고 그 의도를 전적으로 지지해주는 이 모습을 '무조건적인 사랑'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랑이 아니라 양육이다.
이들이 꿈꾸는 것은 무조건 자기 편을 들어줄 엄마 같은 것이다.
자기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양육자의 모습을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이상적인 양육자는 현실에서는 반드시 가스라이터의 모습으로 드러나게 된다.
그 모든 이상들과 마찬가지로 이상적인 양육자는 현실에서 존재할 수 없기에, 그러한 표상을 어떻게든 구현하려면 자기 자신과 상대를 동시에 세뇌시키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는 까닭이다.
가스라이팅은 아프게 하지 않는다. 아프게 하면 세뇌대상이 도망가버린다. 늘 친절하고 예의바르게 집행되는 것이 가스라이팅이다.
사랑을 배우는 과정의 어디쯤에선가 반드시 실패한 이들이 이 '무통의 가스라이팅'을 사랑이라고 말하게 된다.
무통은 불통의 전조다. 죽은 것만이 무통의 현실에 있으며, 우리는 죽은 것과는 대화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것은 사랑에 아픔이 수반되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사랑은 죽어 있는 것처럼 살고 있는 우리를 깨우려 한다. 쿡쿡 찔러, 살아 있다는 사실로 깨어나게끔 돕는다.
이처럼 사랑에 의해 우리는 살아진다.
사랑은 우리가 살 수 있게 만드는 힘이다. 우리는 전적으로 동의할 수 있다.
그런데 살아진다는 것은 동시에 사라진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이 사랑에 필연적으로 아픔이 수반되는 근원적인 이유다.
어떤 이는 고양이를 정말 좋아하면서도 키울 엄두를 내지 못한다. 자신이 모든 것을 다 바쳐 사랑한 것이 언젠가 자기 곁에서 떠나게 될 날이 두렵기 때문이다.
헤어지는 것이 너무 아플까봐 사귀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보편적인 현실이다.
그래서 이러한 이들은 어떤 일을 하는가?
상대를 배신한다.
자기가 먼저 헤어진다.
그렇게 자기가 받게 될 아픔을 상대에게 대신 뒤집어씌운다.
그리고는 이제 자기는 자신을 구속하고 억압하는 상대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사랑을 알았다며 무통마취가 만들어낸 도취의 노래를 부른다.
이런 것도 사랑인가?
이것은 그저 사랑에 대한 두려움이다.
사랑에 대한 두려움이 낳은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르는 일은, 우리가 정말로 사랑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잃게 만든다.
사랑은 인간을 숙성시킨다.
자신의 눈앞에서 사라져가는 것들을 많이 바라보고 또 잘 보낸 이일수록 그 눈빛이 깊어진다.
사랑은 무조건적인 양육자 엄마가 자신의 모든 아이를 다 알아주는 일 같은 것이 아니다.
이것은 사랑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가장 닫혀 있을 때 생겨나는 환상이다.
두려움은 분명 우리를 닫히게 만든다.
사라지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그러니 지금 살아지고 있는 것 또한 볼 수가 없게 된다.
사랑하기에 떠난다는 말이 있다. 상대를 착취하지 않고 정말로 사랑하기 위해 떠나는 것이라며 갖은 설명을 한다.
그렇지 않고, 사랑은 떠날 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니 사랑은 떠나지 않는다. 떠날 것의 가장 끝까지 그 자리에 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이것이 아픔인가?
아니 이것이 사랑이다.
사랑에는 아픔이 가득하다.
그렇게 사랑에는 사랑이 가득하다.
우리는 바로 이 사실을 사랑의 아픔으로부터 배운다.
세상에는 '사랑'과 '다른 더 좋은 사랑들'이 있는 게 아니라, '사랑'과 '사랑에 대한 두려움'만이 있다.
그렇게 사랑에 대해 열려 배우는 것과 사랑에 대해 닫혀 고집하는 것만이 있다.
사랑에 대한 얘기를 왜 이리 길게도 하는가?
우리가 배워서 알고 싶은 우리 자신의 모습, 우리 존재의 의미가 바로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사랑에 대한 배움이며, 그것은 우리가 배우고 싶은 만큼만 우리에게 펼쳐진다. 우리는 더 빨리 배울 수도, 잠시 더 헤맬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이것 외에 다른 사랑은 없다.
이것 외에 다른 사랑이 있다고 고집할 때 역설적으로 이것에 대해 생겨나는 것이 바로 집착이다. 집착은 이것에 대한 환상만을 볼 뿐, 정말로 이것에 대해 열려 있지 않아 일어나는 것이다.
그 살아짐과, 그 사라짐에 눈과 가슴을 닫고, 어떻게 '아픔 없는 곳으로 잘 도망갈까'만을 궁리하는 것이 집착의 상태다.
사랑의 아픔은 사랑이 없는 곳으로 가면 경험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다 살아지고 있는 현실에는 그런 곳이 없다. 때문에 살아 있는 것이 아닌 허구의 언어들로 직조된 가상공간으로의 탈출을 꿈꾸게 된다.
허구에도 사랑이 있다고, 허구를 사랑하는 일은 가능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조작이 가능해서 자기 뜻대로 되는 것을 사랑이라고 부른다면, 우리는 이것을 다시 사랑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부를 것이다.
허구에서 나오는 일은 분명 아플 수 있다.
허구에 빠져 사랑을 놓치는 일은 더 아플 것이다.
아프다면 사랑이 아직 기다리고 있는 것이니, 지금이 배워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