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마도사가 되어보자"
적마도사(Red Mage)는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에 나오는 아주 독특한 직업이다.
직접타격도 할 수 있고, 공격이나 지원을 위한 마법도 가능하며, 회복마법 또한 갖추고 있다.
장비의 착용에 있어서도 전사계와 마법사계의 장비를 모두 착용가능하다.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만능의 직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어떠한 이들은 적마도사를 '용사의 직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주역 중의 주역이며, 적재적소에서 가장 완벽한 기능을 하는 파티의 중심이다.
게임의 극초반부에만.
그리고 아주 빠르게 적마도사는 몰락한다.
'용사의 직업'이란, 지극히 반어적인 표현이다.
타격은 전사계를 결코 따라갈 수 없고, 사용할 수 있는 마법도 초급마법들로만 한정되어 있다. 심지어 지성치와 마력도 낮아서 마법의 효과 또한 미비하다. 장비할 수 있는 품목도 초반마을상점에서 파는 것들이 전부다. 다른 직업들이 어마무시한 능력치를 가진 장비들로 무장할 때, 적마도사는 헐벗고 있다.
물론 시리즈마다 게임의 후반부까지도 적마도사로 계속 플레이할 수 있게 돕는 '배려'가 존재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배려'의 차원이다. 파이널 판타지에는 배려가 아니라 오히려 제재가 필요할 정도로 강력한 직업들이 너무 많다. 이러한 직업을 놓아두고 적마도사로 플레이하는 일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시간낭비다.
그리고 이 시간낭비를 하려는 이들이 있다.
적마도사라는 직업이 우수해서가 아니다. 갈수록 초라해지기만 하는 이 적마도사에 알 수 없는 애정을 쏟아붓는 이들이 분명 존재한다.
이들은 적마도사에게서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아주 못나지도 않았지만 특별히 잘날 것도 없는 이, 결국 중요한 국면에서는 활약하지 못하고 주변인으로 전락할 이, 그러나 왠지 모르게 '간지'만은 포기하지 않는 이.
남들이 9999의 타격을 입히며 적을 순살할 때, 혼자 500을 때리고는 그것도 좋다며 방실 웃는 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적마도사는 한계 속에서, 어쩌면 그 한계를 넘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정직하게 노력하고 있는 분명한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그래서 적마도사에게는 컬트적인 인기가 있다.
어떠한 시리즈에서는 이와 같은 적마도사의 인기를 반영하여 커다란 보상을 제공하곤 한다.
예를 들어, 파이널 판타지 5에서 끝까지 키우기가 가장 어렵고 시간이 걸리는 직업은 적마도사다. 그러나 이 적마도사를 끝까지 키워간 이들은 결국 '연속마법'이라는 것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이것은 한 턴에 자신만 두 번 마법을 쓸 수 있는 능력이다. 그리고 이 능력이 가장 빛을 발하게 되는 순간은, 다른 마법사들이 이 능력을 장착하게 되었을 때다. 강력한 화력으로 적을 공격하는 동시에 아군을 회복시키는 일이 모든 마법사들의 턴마다 가능해진다.
이처럼 적마도사가 마지막까지 걸어간 그 길의 끝에서 적마도사는 동료 마법사들에게 바톤 터치를 한다. 최후로 얻어낸 보물을 전한다. 그리고 적마도사가 전한 보물은 게임의 플레이방식 자체를 혁명적으로 바꾸어놓는다.
적마도사는 '진짜 용사의 직업'이다.
그는 사라지지만, 그의 영혼은 플레이어에게 남는다.
모든 면에서 평범하기 짝이 없고, 또 많은 국면에서 무능력하기만 했던 이가 평생을 정직하게 걸어가 결국 모든 이에게 보물을 전하게 된 이 방식은, 아주 많은 플레이어들의 가슴을 휘어 잡는다.
적마도사는 어떠한 것에도 전문가가 아니다. 전사, 용기사, 기사, 닌자, 사무라이, 바이킹, 사냥꾼 등의 그 어떤 타격계 전문직에도, 또한 흑마도사, 백마도사, 청마도사, 소환사, 현자 등의 그 어떤 마법계 전문직에도 그 자신을 견줄 수가 없다.
그래서 적마도사는 감사할 줄 안다.
다른 동료들의 유능함에 늘 도움받으며, 그는 다만 동료들에게 감사할 뿐이다.
그리고 그 감사함을 커다란 보물로 동료들에게 전하며, 그는 사라진다.
이러한 적마도사의 인생에 깊이 공감한 이들은 그래서 적마도사만의 1인 플레이로 마지막 보스까지 진행하는 다소 변태적인 플레이를 시도하기도 한다. 변태적이라 그것은 아름답다. 애정이 넘쳐서 그것은 귀하게 빛난다.
그러면 이 빛을 확인하며 우리는 우리의 인생으로 돌아오자.
우리의 인생은 게임인가?
우리는 게임을 플레이하는 플레이어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아마도, 아니 거의 확실하게 적마도사다.
플레이어는 존재다.
존재가 우리를 플레이한다.
그리고 존재는 이미 적마도사인 우리에게 반했다.
한계 속에서, 어쩌면 그 한계를 넘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정직하게 노력하고 있는 분명한 우리의 모습에 감동받아, 우리가 끝까지 계속 갈 수 있도록 존재는 일하고 있다. 자신을 다 바쳐 우리를 플레이하고 있다.
인생이라는 이 시간은 적마도사인 우리가 플레이어인 존재로부터 사랑받고 있는 시간이다.
바로 이 사실이 모든 면에서 무능력한 적마도사에게 최후로 남아 있는 '간지'다.
자신이 태어나서 살아가는 모든 일에 감사할 줄 아는 그 '간지'다.
그리고 이 간지 하나로 적마도사에게는 모든 것이 다 충분하다.
적마도사가 된다는 것은, 자신이 하늘에서 사랑받는다는 이 운명을 신뢰하며, 이 운명 하나로 살아간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