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 밖에서 온 심리학 #15

"마음의 빚을 청산하는 일"

by 깨닫는마음씨




가상공간의 이미지가 현실에서의 행복의 기준이 되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현실을 저 드높은 허구의 세계로, 새로운 올림푸스의 화려한 신들의 세상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안간힘을 다한다.


마치 어떠한 빚을 청산하기라도 하려는 듯이 몸부림을 친다.


'더 나은 나'는 빚을 청산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신분인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더 나은 나'가 되고자 하는 신분상승에 대한 욕구는 과거의 어느 때보다 가열차다.


'더 나은 나'로 올라설 사다리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무엇보다 뜨겁다.


"당당하게 나의 이야기를 하라."라고 말하는 이들은, 누군가가 사다리를 주지 않는다면 자신이 언어로 '더 나은 나'로의 사다리를 만들면 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서 만들어지는 사다리는 언어로 인한 것이 아니다.


누구나 다 자기만의 사다리를 가질 수 있다는 언어에 현혹되어 사다리공장에 온 이민자들의 시간과 노동력을 착취함으로써 만들어진 사다리다. 사다리공장장만은 사다리를 타며 흐뭇할 것이다.


신분상승을 위한 수직이동은 이처럼 상대를 발판으로 삼아야만 가능해진다.


우리가 더는 스스로를 속여선 안될 것이다.


모두가 자신만의 사다리를 타고 '더 나은 나'로서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다는 말은 완벽한 거짓말이다.


나아가 그저 자신만의 길을 찾아내어 그 길을 가기만 하면, 누구에게도 무해한 가장 평화롭고 우아한 방식으로 수직이동이 일어날 것이라는 말 또한 기만이다.


신분상승의 수직이동은 반드시 다른 이의 사다리를 걷어차거나, 다른 이를 사다리에서 떨구는 방식으로만 가능하다.


시체를 우리 아래에 많이 쌓아야 우리의 고도가 높아진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다.


이 사실을 시작부터 속이면 계속 착각 속에 빠져 분열된다.


이러한 분열자들은 실제로는 사람들을 해치려는 의도 속에 있으면서도, 오히려 자기는 사람들의 마음을 알아주고 지켜주는 선량한 일을 하고 있다며 의아해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당당하게 나의 길을 가고, 나의 이야기를 시작하기만 하면, 즉 '내가 혼자 잘하기만 하면' 정말로 신분상승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그것은 나의 길을 홍보하고, 나의 이야기를 선전함으로써, 사람들의 관심을 착취하고 그 시간을 강탈해야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신분상승을 꿈꾸는 이들은 늘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사람들의 시간을 뺏을 수 있을까를 궁리한다.


그렇다면 남의 시간을 얻어야만 살 수 있는 이 '시간도둑들'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자기의 시간을 뺏겼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결국 남의 시간을 뺏는 시간도둑이 된다.


수직이동에 대한 절박한 욕구도 이들이 자신의 시간을 뺏겼다는 그 초조감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이것은 조금 입체적인 얘기로 풀려나간다.


먼저 눈앞에 놓인 사탕을 먹고 싶어하는 아이의 모습을 떠올려보자. 잘 알려진 실험처럼, 아이가 사탕을 먹는 일을 지연시키면 그에게 세 배의 사탕을 주겠다는 '약속'이 주어진다.


여기에서 자신이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아이는 지연을 선택한다.


현재를 인내하고 나중에 더 큰 보상을 받는 일이 현명한 일이라고 판단하며, 아이는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만족스럽게 경험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인내'와 '지적 우월성'은 연합된다.


그리고 이 연합은 '도덕'으로 자리매김한다.


자기는 똑똑하니 무식한 애들처럼 함부로 설치지 않고 점잖게 선비처럼 인내할 줄 안다는 '도덕적 정체성'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자기가 정말로 선비 같은 지성적 인격자인 줄 알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다만 '장사꾼의 정체성'일 뿐이다.


더 큰 보상을 기대하기에 참고 있는 것뿐이지, 인격적으로 훌륭해서 참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러한 장사꾼 아이가 도덕적 정체성을 뒤집어쓴 채 인내를 거듭하다 보면, 결국엔 화로 가득 차게 된다.


그가 실천하는 도덕적 행위는 조금도 그를 만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직 큰 보상만이 그를 충족시켜주는 것이지만, 그것은 기약이 없다.


그러니 자기가 이렇게 도덕적인데도 왜 보상이 주어지지 않냐며 억울한 '착한 사람'을 연기하는 모습으로 읍소하게 된다. 순결한 피해자처럼 거듭해서 그 자신을 입지화한다. 그 자리에 가득 억눌려져 있는 것은 화다.


그러나 이것은 이 세상의 도덕성이 훼손되어서 생겨난 화가 아니라, 장사꾼이 자기가 기대한 이득을 취하지 못해 생겨난 화일 뿐이다.


더 큰 보상을 위해 지연하던 동안의, 자기의 시간이 뺏긴 것 같아 나는 그 화다.


이러한 이들이 관계 속에서 자주 경험하는 것도 동일한 성질의 화다.


선비의 껍질을 뒤집어쓴 장사꾼들은, 상대를 인내하며 상대가 원하는 것을 자신이 다 이루어주려는 것처럼 행위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언제나 진정으로 상대들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희생했으나, 상대들은 아직 금수만도 못한 존재들이라 자신을 사람으로 대우하지 않았다며 속상하고 씁쓸한 심정을 토로하곤 한다.


그래도 언젠가는 그들이 깨어나는 날이 올 것이라고 상대들을 안쓰럽게 여기기도 하며, 자신은 이제 더는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축생들과의 애착관계는 그만 하고, 이제 건강하고 자유롭게 자신만의 길을 갈 예정이라고 사람들 앞에 굳게 다짐하는 모습을 시연하기도 한다.


장사꾼이 선비인 척 선비흉내를 내고 있을 때 자주 드러나는 모습들이다.


이들이 상대를 인내하며 상대에게 잘 해주려 한 이유는 단순하다. 상대로부터 자기가 준 것 이상의 더 큰 것을 받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이것은 상거래의 원리다. 그 중에서도 '부당거래의 원리'다.


이러한 원리로 살아가는 이들은, 자기는 1을 주지만 상대에게는 3이 돌아올 것을 기대하며, 상대를 인내한다.


그리고는 자기는 상대에 대한 도리를 다했으며, 가장 인간적이고 도덕적으로 상대에게 성실했을 뿐만 아니라, 어떻게든 상대와 계속 함께하려 했다고 자신의 순수성을 호소하곤 한다.


결코 그렇지 않다.


보통 이러한 이들은 어떠한 관계에서 '부당거래가 성사되지 않아 생겨난' 자신의 화를 은폐하거나 우회하는 '수동 공격'을 통해 교묘하게 상대를 괴롭힌 뒤, 결국에는 지친 상대가 먼저 관계를 끝내자는 말을 하게끔 유도한다.


그러면 자기는 상대로부터 버림받은 모양새를 취하면서, 관계를 '자기에게 귀책사유 없이 끝내는' 이득을 얻는 동시에 도덕적 승리의 이득까지도 거머쥘 수 있게 된다.


즉, 이들은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부당거래를 이루지 못하면, 최소 도덕적 승리나마 상대에게서 뺏으려는 방식으로 관계 속에서 행위하고 있는 것이다.


왜인가?


상대가 자신의 시간을 빼앗았다고 생각하는 까닭이다.


자신이 기대하는 부당거래를 상대가 충족시켜주지 않으면, 이들은 어떻게든 상대에게서 무엇이라도 빼앗으려 한다. 자신이 상대를 인내하며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시간을 보상받기를 바라며, 상대에 대한 복수심을 불태운다.


이처럼 부당거래를 꿈꾸는 이가, 상대가 그 부당거래를 성사시켜 주지 않는다고 상대에게서 빼앗는 이 방식은 총체적인 부당거래의 방식이다.


그래서 이들이 사기꾼이라고 불린다.


마법적인 '사다리를 기대하는 장사꾼'이라서 '사기꾼'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여기에서 다시 사탕을 먹는 일을 지연하는 아이의 모습으로 돌아가보자.


아이는 어떠한 방식으로 부당거래를 꿈꾸는 사기꾼이 되었던 것일까?


거기에는 '약속'이 있었다.


부모, 또는 부모의 위상을 가진 것으로부터의 약속이 있었다.


잘 참고 있으면 더 큰 보상을 주겠다는 바로 그 약속이었다.


그러나 약속은 깨졌다.


아이가 아무리 인내하며 기다려도 보상은 주어지지 않았다. 이 지점에서 기대가 깨진 아이는 화가 나며, 그 화는 자기의 부모를 향한 화다.


이 세상의 누구도 자신에게 그러한 '부당거래'의 약속을 한 적이 없다.


오직 그의 부모만이 몇 배로 돌려주겠다는 약속을 했으며, 그 약속을 깼을 뿐이다.


그러나 아이는 세상 전체가 다 이처럼 자기를 속이려 한다고 생각하게 되며, 이제 자기가 세상에 속지 않고 역으로 세상을 이용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부당거래의 사기꾼은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출현하게 된 것이다.


자기 부모에게 난 커다란 화를, 세상과 타인들에게 대신 돌리고 있는 '효자 중의 효자'가 사기꾼인 셈이다.


신분상승에 대한 욕구 또한 실은, 약속을 지키지 않은 자신의 부모에 대한 이들의 저항심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높이에 대한 강박적 추구는, 평원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갈망과 일치한다.


높이를 원하는 자에게 평원이란 자신이 한없이 무기력하게만 경험되는 곳이다.


이것은 부모와의 약속을 믿고는 마냥 한정없이 기다리고만 있던 아이의 상태와 동일하다.


아이는 부모가 사탕을 주기 전에는 어쩔 도리가 없다. 자신이 충족될 수 있는 가능성은 전적으로 부모에게만 달려 있다.


쉽게 말해, 부모 없이는 실상 자신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이것은 아이가 가장 부모를 의존하고 있는 상태다.


자신은 똑똑해서 지금 주체적으로 최대치의 이득을 얻을 수 있는 '나만의 길'을 선택한 것이라고 아이는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 실체는 다만 부모에게 전적으로 위탁해버린 삶이다.


그러니 이러한 입장에서 아이는 지속적으로 무기력함을 경험하게 될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이들에게, 기다리고 인내하는 상태는 곧 무기력한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니 끝없이 그 무기력을 상쇄해줄 자극을 찾아 헤매게도 된다. 그렇게 자극들을 소비해가면서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약속을 지켜줄 최고의 부모가 자기를 찾아와줄 날만을.


자기가 드높은 신들의 세계로 도약하기 위해 자신의 발판이 되어줄 날만을.


그리고는 오지 않는 부모 대신에, 세상 모든 것이 자기를 위해 부당거래를 성립시켜주어야 할 부모가 되어야 한다는 듯이 무수한 사람들을 발판으로 삼아 계속 도약을 시도한다.


'더 나은 나'를 이루기 위해 '더 많은 너'를 희생시키는 일만을 지속한다.


이것이 '사다리를 기대하는 장사꾼'이자, '만인에 대한 부당거래자'이자, '부모 없이는 아무 것도 못하는 아이'이자, '자기가 똑똑한 줄 아는 도덕적 주체'이자, '더 나은 나'의 전모다.


부모 없이는 실은 아무 것도 못하는 아이의 무기력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신분상승의 도약은 꿈꾸어지며, 다른 이들을 자기의 부모 대신에 발판으로 삼기 위해 또한 신분상승의 도약은 꿈꾸어진다.


총체적인 '똑똑한 아동'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부모를 의존하듯이 상대들에게 전적으로 의존해있으면서, 자기가 오히려 상대들을 알아주고, 키워주고, 지켜주는 형상으로 상대들의 부모라도 된 줄 아는 그러한 아동의 모습이다.


약속을 지켜줄 부모가 장시간 오지 않을 때, 이들은 결국 자기가 꿈꾸던 부모의 환상을 자기 안에서 '놀라운 경험'으로 만들어내게 된다. 그리고는 이제 자기가 그러한 부모인 것처럼 행세하곤 한다. 사람들에게도 바로 그 부모의 정체성으로 활동한다.


이와 같은 부모의 정체성이 또한, 앞서 말한 선비인 척하는 장사꾼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모두가 당당하게 자신의 사다리를 만들자고, 자기가 도와주겠다고 말하는 모든 사다리공장의 공장장이다.


즉, 실제로 자기가 남의 시간을 뺏고 있는 이다. 남의 시간을 뺏는 그 일을 통해서만 연명하는 이다.


자신의 시간을 뺏겼다고 생각하는 아이는 이로써 정확하게 자신이 남들의 시간을 뺏는 이로 드러나게 된다.


'부모에게 시간을 뺏긴 아이'와 '아이에게 시간을 뺏은 부모'의 이 심리적 역동이 사다리를 꿈꾸는 이들에게서는 무한하게 반복된다.


그럴수록 증대되는 것은 바로 '마음의 빚'이다.


이것은 '부모에게 시간을 뺏긴 아이'와 '아이에게 시간을 뺏은 부모' 사이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곧, 이러한 부모와 아이의 역동을 가진 개인이 그 내면에서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이 '마음의 빚'을 개인이 체감하는 정도는 언제나 그 개인이 부당거래를 시도한 만큼이다.


'아이로서의 자기'가 더욱 크게 부당거래를 시도하는 만큼, '부모로서의 자기'는 더욱 크게 갚아야 할 빚이 있는 것처럼 경험된다.


한 몸에서 그 둘이 일어나며, 그 둘의 충돌이 일어난다. 분열되어 있는 것이다.


'아이로서의 자기'와 '부모로서의 자기'는 명백한 분열의 소재다. 이 분열의 간극 속에서, 받아야 할 것을 받지 못했다는 화도 커지고, 주어야 할 것을 주지 못했다는 부채감도 동시에 커진다.


그러니 자기는 더 받아야 한다고 '당당한 나의 이야기'를 주장하는 목소리도 높이게 되며, 그럴수록 '마음의 빚'이 만드는 '지금 똑바로 못살고 있다는' 죄책감의 무게도 커져간다.


이것이 무슨 말인지는 분명하다.


사다리는 수직이동을 위한 것임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것은 '신분상승'을 위한 것이 아니라, '존재추락'을 위한 것이었다.


당당한 나의 이야기를 할수록 우리에게 생겨난 것은 '마음의 빚'이다.


우리는 땅굴을 파고 들어가고 있던 것이다.


평지의 무기력함을 벗어나기 위해 사다리를 타고 상승하려 한 결과, 우리는 결과적으로 평지보다 아래의 구덩이로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게 된 것이다.


사다리공장장들은 분명 흐뭇할 것이다. 모두가 이제 함께 이 구덩이 안에 있다. 다같이 '마음의 빚'을 지고 있다. 이 세상에서 자기 혼자만이 저주받은 운명에 빠진 것이 아니라 그에게는 큰 위안이 될 것이다.


이곳이 바로 '더 나은 나'를 향해 수직이동을 해서 도착한 세상이다.


이런 것을 꿈꾼다면, 애초에 꾸지 않는 것이 좋다.


부당거래는 처음부터 시도하지 않는 것이 좋다.


'더 나은 나'가 되는 길은 남들을 밟고, 그럼으로써 남들과 같이 구덩이로 추락하게 되는 방법밖에는 없다.


그건 실제로 '더 낫게' 느껴지지도 않을 것이다.


사실적으로도 '더 낮게' 되는 일일 뿐이다.


'마음의 빚'의 무게로 인한 추락만이 약속되는 일이다. 이 약속만은 분명하게 지켜질 약속이다.


그렇다면 '더 나은 나'가 아니라 '더 나인 나'가 되는 것은 어떠한가?


똑똑한 아이들이 점잖게 앉아 저마다 자신의 도덕성과 지적 우월성을 뽐내며 사탕을 지연하고 있을 때, 나는 그냥 나답게 자리에서 일어서 자전거를 타러 가는 일은 어떠한가?


남들에게 나를 대단한 것처럼 전시하려는 그 모든 일보다, 남들이 보지 않더라도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을 단순하게 그냥 하는 것은 어떠한가?


이것은 부당거래를 꿈꾸지 않으니 '마음의 빚'도 생기지 않는다.


이미 자신이 자신을 충족시키는 일을 하고 있으니, 부모가 없으면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아이의 입장에서도 자연스레 벗어난다.


화도, 조바심도, 죄책감도 사라진다.


남의 시간을 뺏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나의 시간을 충만하게 쓰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살 때 우리는 정말로 "나는 나."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곧, 우리가 지금 제대로 된 높이로의 수직이동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더 나인 나'는 '더 나는 나'이다.


그는 '마음의 빚'을 질 부당거래를 시도하지 않으니 자신의 마음이 자유로우며, 그렇게 자신의 하늘을 더욱 날고 있는 중이다.


우리의 비행에 필요한 것은 사다리가 아니다.


자유로운 마음이다.


이러한 수직이동을 꿈꾸는 일은 정말로 어떠하겠는가?


당신이 정말로 행복해지는 현실을 지금 바로 사는 그 일은.


당신이 이러한 것을 꿈꾸고자 하는 순간, 이 꿈은 더는 꿈이 아니며 당신에게 사실적으로 가능한 현실이다. 이것만은 부당거래가 아닌 것이기에, 우리는 그 큰 것이 당신에게 이루어지리라고 약속할 수 있다.


당신이 그냥 당신이 되고자 하는 일은, 가장 공정한 것이며, 가장 확실한 현실이다. 약속된 수직이동이다.


당신이 그냥 당신이라는 것은, 당신에게는 원래 마음의 날개가 있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그냥 당신이기만 하면, 당신에게는 원래 아무런 빚도 없었다.


당신은 자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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