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충 살아볼까"
삶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엄청난 사태다. 아주 크고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이, 우리가 삶에 대해 아주 무거운 고뇌와 책임감을 짊어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렇게 사는 이는 삶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삶보다 자기가 더 엄청난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삶을 책임지려고 한다.
더 작은 것이 더 큰 것을 책임지려는 이 일은 본질적으로 그냥 힘든 일일 뿐이다. 성과는 없고, 생산성은 떨어지며, 그러한 자신에게 화만 쌓여가는 길이다.
인생을 자꾸 게임으로 착각하면, 게임의 플레이상황을 자기가 책임지듯이, 자기의 인생에 대해서도 자기가 동일한 방식으로 책임져야만 할 것 같은 '망상'이 발달하게 된다.
가장 기초적인 차원에서부터 인생은 게임이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하다.
게임은 우리가 전원을 켜서 시작하는 것이며, 또 우리가 그만하고 싶을 때 전원을 내리는 것이다.
그러나 삶은 오히려 우리를 켜고 끄는 것이다.
물론 자살과 같은 방식을 생각해볼 수는 있다. 그것은 삶에 저항하여 자신이 역으로 삶의 스위치를 내리겠다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도 하나의 망상이 있다. 자신이 삶을 종결시킬 수 있는 주체가 되면, 마찬가지로 자신이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일이 가능한 주체 역시도 될 수 있으리라는 망상이다. 그러나 이 망상이 실현된 적은 인류의 역사상 단 한 번도 없다.
예수나 붓다 역시도 임의로 삶을 통제할 수 없이, 다만 삶이 허락할 '때'를 기다릴 뿐이었다.
자신에게 속하지 않은 권한에 대해 자신이 책임지는 일은 애초 불가능한 일이며, 그럴 필요도 없는 일이다.
우리가 나고 지는 것은 우리에게 속하지 않았다.
이 사실만 분명하게 확인하고 있어도, 세상에서 부유령처럼 떠다니는 거의 모든 망상에 영향받지 않게 된다.
그 반대로, 자신이 삶을 책임져야 한다고 착각하고 있을 때는 아주 작은 망상 하나에도 치명적으로 휘둘리게 된다. 그렇게 자신을 지배하는 아주 심각한 망상의 무게에 눌린 끝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도 된다.
길을 걸으며, 자신의 동작 하나, 표정 하나를, 가상의 카메라에 비추어 점검하듯이 살피고 있는 이의 모습을 상상해보자.
이러한 이에게는 걷는 일이 너무나 힘겨운 일이 된다. 이 삶이라는 것이 다만 버거운 무게의 소재가 된다. 그 무게가 심대하게 경험되는 까닭에, 한 번이라도 넘어지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만 같다.
그러니 절대로 실패하면 안된다.
바로 이 태도가 자리잡는다. 오늘날 보편적으로 만연해있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자기가 삶보다 큰 것이 되어 삶을 책임져야 한다고 착각하는 정도만큼, 실패에 대한 압박감은 동일한 크기로 커진다.
삶이 자신보다 크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는 이는 그럼 실패를 어떻게 경험하는가?
욕하고, 짜증내고, 속상해하고, 자책도 좀 하다가, 아직 자신이 모르고 있는 어떤 것을 삶이 준비하고 있나보다 한다.
우리가 심리학적 용어로 '회복탄력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삶에 대한 태도에서 비롯한 것이다.
휘어진 나무는 땅에 든든하게 박혀있는 뿌리의 힘으로 탄성을 얻는다. 자기보다 더 큰 삶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이에게도 이 탄성의 작용이 생겨난다.
그리고 실패를 거듭하면서 이 탄성작용을 확인해감에 따라 그는 이제 하나의 태도를 발달시킬 수 있게 된다.
그것은 바로 '대충 사는 태도'다.
삶이 알아서 또 일으켜 세워줄 것임을 신뢰하며 삶에게 맡겼으니, 마치 자기가 혼자 다 해야 하는 것처럼, 또 사람들의 관심을 원기옥처럼 모아서 자기가 이 세상을 구원해야 하는 것처럼 굴지 않는 가볍고 경쾌한 태도다.
이는 우리가 수영을 할 때의 태도와도 유사한 것이다. 자기가 자기를 물 위에 떠있게 해야 한다며 막중한 책임의식을 갖는 이는 가라앉는다. 먼저 자신의 몸을 물에 다 맡기는 이만이 부력의 도움을 얻어 뜰 수 있게 된다.
자신이 사는 삶이, 또는 자신이 하는 일이, 자신에게 달려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일은 아주 좋은 일이다.
그러면 점점 더 사소한 것들에 목숨을 걸지 않게 된다.
자신에게 이 모든 것이 달려 있다고 착각할 때는,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운명적인 비중을 가진 것처럼 생각된다. 마치 살얼음판을 밟아가듯이, 작은 발걸음 하나도 실수하면 안된다고 몸을 바짝 졸이며 긴장하게 된다.
나아가, 어떠한 실패가 경험되었을 때는 작은 요소 하나라도 다 찾아가며 전부 다 자기에게 돌팔매를 할 타격재로 쓴다.
이렇게 살면 많이 아프다.
힘도 많이 든다.
삶이 흐름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이해해보자.
삶의 매순간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리 크지 않으며, 그리 많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 순간 자기가 생각하던 아주 완벽한 그림을 완성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픽셀의 그림을 떠올려보자.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는 그저 순간에 충실하게 하나의 도트(dot)를 찍으면 된다. 단순하게 채색하면 된다.
심지어 어떠한 도트를 빨간색으로 칠하다가 시간이 부족해서, 또는 귀찮아서, 또는 친구와 놀러 나가느라 다 칠하지 못했어도, 진실로 아무런 상관이 없다.
절반 정도만 빨간색으로 칠해지고 나머지 절반은 하얀색으로 남은 그 도트는 나중에 분홍색으로 쓰일 것이다.
삶이 알아서 그렇게 쓸 것이다.
당신 얼굴에 환하게 뜬 그 홍조를 묘사하기 위해 삶이 그렇게 알아서 다 적재적소에 갖다 쓸 것이다.
우리는 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가?
우리가 산다는 것은 대체 어떠한 것을 의미했는가?
산다는 것은 그린다는 것이며, 우리의 삶에서 그려지고 있던 그림은 바로 우리 자신의 얼굴이었다.
그려진 우리 자신의 얼굴을 보고자 우리는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얼굴이 결국에는 웃는 얼굴일 수 있도록, 삶은 우리를 위해 늘 최선을 다하고 있다.
우리가 매일매일의 일상 속에서 대충대충 도트들을 찍어내면, 삶이 그것들을 엮어 그리운 우리의 얼굴을 그리운다.
우리도 상상할 수 없던 가장 멋진 우리 자신의 얼굴을 삶은 그리고 있다.
엄청난 것의 완성은 똑같이 엄청난 것에게 맡겨야 하는 법이다.
만화가와 어시스턴트의 관계를 떠올려보자.
어시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처럼 굴며 작업물을 넘겨주지 않으면 만화가는 많이 힘들다.
어시가 대충대충 탄성작용을 통해 빠르게 흐름을 연결해줄수록 만화가는 그의 일을 멋지게 할 수 있다.
우리가 대충 사는 일이 실은 삶을 돕는 일이다.
우리가 만들어야 하는 것은 건너가는 흐름이지, 하나의 징검돌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 살 때, 이 엉성한 것을 삶이 얼마나 완벽에 가깝게 만들어내고 있는지 그 엄청난 삶의 작용은 더욱 신뢰된다.
우리의 몸도 바로 그렇게 작동한다. 우리가 조금 대충이어도, 우리의 몸이 알아서 스스로 건강의 항상성을 만들어낸다.
건강염려증과 같은 증세는 우리가 몸을 큰 것으로 보지 않고, 우리가 몸보다 큰 자리에 올라 몸을 책임져야 한다고 망상하고 있을 때 생겨나는 대표적인 착각의 증세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말로 단순하다.
순간의 웃음이다.
우리가 웃을 수 있는 그 방식으로 이 순간을 단순하게 사는 것이다.
어디에 점(dot)을 찍어야 하는가?
고민말고 지금 앞에서 우리를 웃음짓게 하는 곳에 대충 찍으면 된다.
자기가 우주에서 제일 엄청난 것처럼 굴며, 늘 모든 것을 염려하는 그 태도로 표정을 찡그리고 있다면, 삶의 작업은 더 오래 걸리며 에너지도 많이 들게 된다.
삶은 행복한 우리의 얼굴을 그리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이 순간에 웃고 있다면, 나아가 대충 사는 방식이 낳은 가벼움의 탄성으로 인해 우리에게 웃음들이 연쇄되어 흐름이 생겨난다면, 삶에게는 우리의 웃는 얼굴을 그리는 일이 아주 쉬워진다.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라는 말이 있다.
'지금의 웃는 얼굴과 같이 결국에도'가 이제 우리의 삶을 묘사하는 말이 될 것이다.
한번 대충 살아볼까.
이렇게 잠깐 떠올려본 이의 얼굴에는 이미 미소가 번진다.
결국에도.
아주 엄청난 신비를 대충 말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