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심리학 #56

"꽤다름의 심리학"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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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자기가 개성적이라고 생각하며 살 것이다.


또는 개성을 갖추려고 자기계발에 힘쓰며 살 것이다.


누.구.나. 다. 남.들.과. 다.르.기.를. 바.라.는. 모.습.으.로. 그.렇.게. 똑.같.이. 살.고. 있.다.


남들과 달라야 한다는 욕망이 결국 총체적인 몰개성의 결과를 낳는 것은, 아마도 우리가 '다름'이라는 것에 대해 조금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 분명하다.


'다름'은 '나음'으로 곧잘 오해되며, 이것은 '나임'이 된다.


나인 것은 나은 것이다. 다른 것과 확실하게 차별될 만큼 우위를 점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나님'이다.


어렸을 때 우리가 만화나 소설 등을 보면서 "나님이 강림하셨다."라고 외치며 하나의 장면에 개입하고 싶던 순간들이 있었을 것이다.


이를테면, 슬램덩크에서 북산이 처참하게 패할 것 같은 장면이 있다. 그때 나님은 강림하신다. 안경선배 같은 위상이 아닌, 들어가는 순간 모든 게임의 양상을 뒤집을 수 있는 최강의 식스맨으로 나님은 코트에 입장한다.


그 특성은, 채치수보다 파워풀하고, 강백호보다 신체능력이 좋으며, 송태섭보다 센스가 탁월하고, 정대만보다 3점슛을 잘 넣으며, 서태웅보다 득점력이 강한 모습으로 드러난다.


모든 것을 다 잘하는 이 무적의 나님 앞에 모두가 환호하며, 소연이도 얼굴을 붉히며 다가와 "농구... 정말 좋아하는구나... 나도 네가 정말..."이라고 수줍게 말한다.


깨달음을 환상처럼 꿈꾸는 이들이 이러한 나님이 되고 싶어한다는 것은 비밀이 아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이 마치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반친구들에게 인기도 많은 무슨 초등학교 반장 같은 것이 되는 일이라는 착각은 진실로 만연하다. 그것만 얻으면 인생에서 최고의 나님이 되어, 다른 모든 것과 변별되는 가장 우위의 자리를 얻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다.


이들은 실은 깨달음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엄마에게 사랑받을 소재들을 두루 갖춘 아이가 되기를 꿈꾸는 것이다.


이러한 아이에게 엄마란 세계의 전부다. 그러니까 이것은 세계 전체로부터 사랑받고자 하는 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그는 세계 전체를 만족시키고자 시도하게 된다.


세계의 욕망을 다 채워줄 수 있는 인물로서 자기 자신을 형상화하고자 하게 된다.


그러니 몰개성적으로 될 수밖에 없다.


세계의 누군가는 김치찌개가 먹고 싶다고 하고, 누군가는 돈까스가 먹고 싶다고 하며, 누군가는 쫄면이 먹고 싶다고 한다. 그 모든 욕망을 통합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은 결국 김밥천국이다.


남들보다 나은 나임을 실현한 나님의 정체란 이처럼 그저 김밥천국일 뿐이다.


이러한 것이 깨달음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무아(無我)라는 것이 자기 욕심과 고집이 없어져서, "그 마음도 온전하구나."라면서 모든 것을 다 받아주며 설렁탕도 차려주고, 똠양꿍도 해주고, 같이 타코야끼 파티도 하는 그런 것을 의미하는가?


그렇지 않다.


무.아.는. 몰.개.성.의. 다.른. 이.름.이. 아.니.다.


오히려 무아야말로 개성적이다.


무.아.적. 감.수.성.으.로. 사.는. 깨.달.음.의. 현.실.이.말.로. 가.장. 개.성.적.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개성이라고 착각하는 수많은 몰개성들과는 꽤 다르다.


꽤 다른 것이라 '깨달음'은 '꽤다름'이다.


무엇이 다른가?


상대적인 비교를 하지 않는다는 점이 정말로 다르다.


'다름'이라는 표현이 상대적인 비교 속에서 이해될 때는 우열의 가치를 뜻하게 된다.


그러나 절대적인 감수성으로 이해될 때 '다름'은 이미 실현되어 있는 '자유'를 뜻한다.


나.는. 나.일. 자.유.가. 있.다.


단지 그 사실이다.


이러한 '나'는 다른 이들의 욕망을 충족시켜주기 위해 만들어내는 정체성이 아니다. 비교우위의 소재들로 만들어진 통합적 구현물이 아니다.


아주 단순하게 예를 들어보자.


그리고 같이 한번 생각해보자.


내가 지금 가진 모든 이름과 꼬리표들을 다 기각해보자. 내가 어떠한 직업인이 아니고, 어떠한 학벌과 기술 등의 사회적 유능성을 가진 이가 아니며, 또 어떠한 관계의 구성원이 아니고, 이러저러한 취향을 가진 이가 아니며, 특정한 어떤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바로 그런 사람이 아니고, 심지어 내가 지금껏 살아온 그 기억을 나의 인생이라고 믿는 사람이 아니다.


그 모든 정체성의 이름을 다 지운다면, 이제 물음은 이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당.신.에.게. 어.떻.게. 말.을. 걸. 것.인.가?


내가 '정말로' 그토록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는가?


나는 '정말로' 무엇을 사랑하고 있었는가?


상대적인 비교와 그 비교가 만들어낸 정체성들이 기각된 자리에서 떠오르는 그것, 거부할 수 없는 그것, 정말로 이것이었다고 바로 알게 되는 그것.


그.게. 바.로. 마.음.이.다.


지금 마음은 상대적인 비교의 세상이 만들어낸 한계를 넘어, 우리에게 그 자유로운 날개를 펄럭이고 있는 것이다.


"이제 갈까요, 자기야."


아마 그렇게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이처럼 자신의 마음을 처음 만나게 되었을 때는, 정말로 이러한 것이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라며 깜짝 놀라게도 된다.


그.러.나. 실.은. 알.고. 있.었.다.


어렴풋이 이미 다 눈치채고 있었다.


실은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것에 끌리는 사람인지를, 우리는 이미 다 알고 있다.


그것이 남들이 하는 것보다 열등해보여서, 남들의 것보다 하찮아보여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속여왔을 뿐이다.


상대적인 비교의 세상에서 우리가 특별한 개성을 추구한다며 해온 모든 일이란 결국 우리 자신을 속이는 모든 일에 불과했던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이 아닌 것처럼, 곧 우리가 몰개성적인 존재인 것처럼 스스로 만들어온 것이다.


우리의 개성은 어떤 때 드러나는가?


우리가 아무리 특별한 자신이 되고자 한다 해서, 또 특별한 자신을 사람들에게 열정적으로 선전한다 해서, 개성이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개.성.은.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향.할. 때. 비.로.소. 우.리.의. 개.성.으.로. 드.러.난.다.


누구나 자신이 사랑하는 것은 자신에게는 특별한 법이다. 그것은 대체불가능한 것이다.


이처럼 사랑이 우리를 특별성과 연관지어주며, 이것이 곧 우리의 고유한 개성이 된다.


그리고 마.음.은. 정.말.로. 우.리.가. 어.떠.한. 것.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우.리.에.게. 한.결.같.이. 알.려.준.다.


이에 따라 마음의 정직한 청자는 알게 된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것.을. 사.랑.할. 그. 나.일. 자.유.가. 있.다.는. 사.실.을.


이것이 바로 '다름'의 의미다.


또 '나다움'의 의미다.


비교의 논리 속에서 '가짜자기'를 만들어 자신을 속이지 않고 마음에만 정직하다면, 우리는 늘 자유롭게 사랑을 향해 움직일 수 있게 된다.


그럼으로써 비교의 세상에 갇혀 몰개성화가 된 이들과는 무척 다른 길, 가장 나다운 '꽤다름'의 길을 가게 된다.


우리가 실은 아무 것도 아닌 무아적 입장에 서있음을 확인하는 일은 이 모든 것의 시작이다.


그것은 그동안 못본 체하며 무시해온 마음에게 처음으로 인사를 건네는 일과도 같다.


나는 당신에게 어떻게 말을 걸 것인가?


"안녕."이라고 인사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정말로 무엇을 하고 싶었는지, 또 무엇을 그토록 사랑했는지가 아주 분명해진다.


마음의 화답인사로.


다가온 그 모습 자체의 선명함으로.


이제야 만난 가슴의 떨림으로.


"이제 갈까요, 자기야."


꽤다름의 여정이 막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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