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막히는 이유"
인생이 막히는 일, 인생의 정체(停滯)는 왜 일어나는가?
아마도 거의 확실하게 인생의 정체(正體)를 오해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혹시 인생이라는 것을 무수한 방향성을 가진 힘들이 서로 긴장 속에 교차하며 언제라도 서로 충돌해서 붕괴될 수 있는 불안한 '교통흐름'이라고 생각하고 있는가?
인생의 정체(正體)를 그렇게 파악한 뒤, 우리 자신을 또한 유능한 '교통순경'처럼 정체(正體)짓고 있는가?
아주 쉽게, 우리가 멈추어 있고 막혀 있는 것처럼 경험하던 때를 돌이켜보자.
우리가 멈추게 되는 때는 '하고 싶지 않다.'가 아주 크게 작용한다.
왜 하고 싶지 않은지도 분명하다.
할 일이 너무 많아서다.
그러다보니 일은 계속 누적되어 가고, 사건들이 중첩됨에 따라 이제 상황은 더욱 복잡해짐으로써, 일처리를 위한 판단에는 더욱 큰 에너지를 소비하게 된다.
아니 실은 그럴 수도 없다. 이미 자신이 판단해서 해결할 수준의 크기가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상황에 대한 심정은 이것이 정확하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우리가 가장 막혀있을 때 반드시 호소하게 되는 심정이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으니, 더 할 수 없게 되며, 정체는 더욱 심화된다. 거의 총체적인 재난의 상태다. 조금이라도 상황에 대해 생각해보려 할수록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무력감만 커지게 될 것이다. 우울증의 상태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왜 이리 많아졌는가?
우리가 모든 것을 통제하려 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다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가 원래 가장 많은 일을 갖게 된다. 그는 삶의 거의 모든 경험을 다 일로 만들고자 한다. 일이 많아지는 것은 이처럼 자신이 일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일이라는 소재를 통해 통제에 대한 욕구를 채우려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에게 운명적인 사태처럼 일이 많이 찾아온다기보다는, 더 많은 것을 통제하고자 하는 생각이 큰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이는 왜 모든 것을 통제하려 하는가?
모든 것으로부터 사랑받고 싶기 때문이다.
모든 것에게 사랑받는 방법론은 모든 것을 만족시키는 일이라고 그는 믿는다.
통제는 통제의 대상을 만족시키고자 하는 이 의도로부터 집행된다.
통행자들이 많아 정체(停滯)되고 있는 도로의 상황을 떠올려보자. 그 한복판에 서서 열심히 교통을 통제하려고 하고 있는 교통순경의 정체(正體)는, 지나가는 모든 행인들로부터 사랑받고 싶어하는 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를 중심으로 한 동심원이 그려지도록 교통정리를 한다.
자신이 사랑받는다는 실감을, 아니 확증을 얻을 때까지, 그는 통행인들을 그들이 가야 할 곳으로 보내는 '진짜 교통정리'를 할 생각이 없다. 자신을 중심으로 뱅글뱅글 돌게만 하면서, 그 중심에 있는 자기를 모두가 바라봐주며 애정어린 표현들을 전해주기를 소망한다.
우리의 뇌에서 일어나는 생각의 운동과도 동일하다.
우리의 머리가 뱅글뱅글 돌 때를 기억해보면 그때에는 거의 반드시 우리가 인정받거나 사랑받고 싶어하는 대상에 대한 지향이 있다.
일이 많아서 그 일의 무게에 눌려 우울해진 이들에게는 이러한 대상들이 아주 많은 것이다.
그는 자기와 관계맺고 있는 모든 대상을 자기가 다 만족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그들에 대한 통제권을 갖고 싶어한다.
통제권을 놓는다는 것은 이들에게는 그 대상으로부터 사랑받기를 포기한다는 말과 같다.
그는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받고 싶기에 결코 단 하나의 대상이라도 놓칠 수는 없다. 전적으로 다 통제해야 하며, 그렇게 그는 전적으로 다 소진된다.
이것이 우리가 인생이 막혔다고 부르는 상황이다.
이러한 이가 일이나 통제의 활동은 이제 '하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도, 계속 그 행위를 지속하는 이유는 거기에는 여전히 모든 것에게 사랑받는 것은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상대를 통제해서 만족시켜주면 상대가 자신에게 사랑을 줄 것이라는 '전적으로 잘못된' 착각이 그의 생각들에게 계속해서 뱅글뱅글 돌 동력을 제공하고 있는 한, 이 정체의 현실을 끝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자신이 완벽하게 통제하면 모든 것이 자기를 사랑해줄 것이라는 착각은 게임속에서나 가능한 것이라는 이해다.
자기가 통제에 성공해서 유능한 결과를 내면 NPC들이 "용사님, 사랑해요."라고 말해준다. 애초에 NPC들은 바로 그 말을 하기 위해, 게임의 주인공 주변을 뱅글뱅글 돌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다.
이처럼 사람을 게임속 NPC로 보고 있을 때, 사랑에 대한 착각이 발생하며, 그에 따른 통제욕이 야기된다.
현실의 자신은 모든 이로부터 사랑받아야 할 주인공이 아니다.
그러한 주인공을 꿈꿀 때 우리의 인생은 필히 막힌다.
해야 할 일이 많은 것이 아니다. 만족시켜야 할 대상이 많은 것이 아니다. 또 그만큼 통제해야 할 것이 많은 것이 아니다.
자신은 대체 누구로부터 사랑받고 싶은가?
대다수는 자신에게 관심이 없어지고, 또 몇몇은 심지어 자신을 미워하게 되더라도, 그에게만은 사랑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그 누군가는 대체 누구인가?
그걸 확인하면, 일은 정리된다.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 하나만을 분명히 하면, 나머지 것들은 알아서 정리된다.
이것이 '진짜 교통정리'다.
혹시 자신의 안에는 너무 많은 마음들이 있어서 이들이 어떻게 다 온전한 길로 향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는가?
그러한 마음의 교통순경이 되어 있는가?
모든 마음에게 사랑받기 위해, 모든 마음을 통제하려 하고 있는가?
그러다가 이제 마음을 생각하는 일은 지쳤다며, 자신의 진짜 마음을 모르겠다며, 육아에 지친 엄마처럼 주저앉아 있는가?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은 더욱 쉽다.
모든 마음이라는 것은 애초 없다.
그것은 아주 큰 통제의 생각을 소비하기 위해 만들어낸 가상의 소재일 뿐이다.
자신에게 중요한 마음은 지금 하나다.
그 마음은 어떠한 하나의 것만을 지향하고 있다.
이러한 단 하나의 마음의 움직임을 속이고는, 모두에게 사랑받고 싶다고 말하고 있는 그 착각의 행위만을 그만 하면 된다.
커다란 대로에 단 하나의 통행인만이 있다.
원래부터 그러했다.
통행인은 자유로웠다.
우리 자신의 정체성에 막히지만 않는다면 마음의 정체(停滯)란 없다. 이것이 마음의 운동의 총체라고 할 수 있는 인생의 정체(正體)다.
모두를 만족시켜야 한다는 착각을 버릴 때, 우리 자신이 사랑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며, 우리의 인생은 이미 그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만이 '하고 싶다.' 우리의 일은 정말로 이것밖에는 없다.
이제 나에게서 사랑받는 현실로, 막힘없이 자유롭게 대로를 달려나가는 일뿐이다.
내가 이 모든 것에게 사랑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마음이 그것을 꿈꾸며 향해온 나에게서 사랑받아야 하는 것이다.
나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나는 길이다.
그 길 위에서, 인생은 나의 인생으로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