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심리학 #58

"나를 꿈꾸는 사람들"

by 깨닫는마음씨




나라는 것은 무엇일까?


인.간.의. 자.화.상.이.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자기이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자화상이라는 말로 쓰고는 있지만 '그림'이 아니다. 어떠한 '이미지'가 아니다. 그러니 '이념'이 될 수도 없으며 '대상'으로 표상될 수도 없다.


이 말은 동시에, 나.는. 텍.스.트.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나.를. 알.리.고.자. 하.는. 모.든. 텍.스.트.는. 나.를. 감.춘.다!


지금 이 글과도 같다.


그게 뭐지 하고 따라가봤자, 더 헷갈리게만 될 것이다.


그러나 언술하는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언어들의 쓰레기산을 가득 쌓아놓으면, 언제나 그것보다 더 높은 위치에서 나는 등장해 반갑게 손을 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을 텍스트로 도배한다면, 그래서 세상이 가장 크게 텍스트로 가득 차게 된다면, 마찬가지로 나는 그 가장 크게 꽉 차있는 경계 밖의 더 큰 자유의 공간으로 나와 미소지으며 서있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나.는. 우.리.가. 알.던. 그. 어.떤. 것.보.다. 가.장. 크.게. 드.러.난.다!


나에 대한 모든 언어의 산은 나의 앞에서 무너지기 위해 쌓인다. 가장 크게 나를 드러냈으면 언어는 임무를 다한 것이다.


어떠한 정교한 언어를 동원한다 해도 직접적으로 나를 언술할 수는 없다. 오히려 나는 철두철미하게 무장한 언어의 헛점에서 그 존재의 자취를 알린다. 언어의 여백이 나의 주출몰지이다.


그리고 언어의 재미있는 특성이란, 말.하.면. 말.할.수.록. 실.은. 여.백.이. 더. 커.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나도 더욱 크게 드러난다.


물.론. 언.어.가. 나.를. 키.운. 것.이. 아.니.다.


장님이 더 많이 더듬다보니 코끼리라는 것이 엄청나게 크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뿐이다.


이게 굳이 나를 말하려는 이유다.


나.를. 더. 큰. 것.으.로. 꿈.꾸.고. 있.는. 이.들.이. 나.를. 말.하.려. 한.다.


철학자들은 대표적이다.


철학자들이 아주 엄밀한 고밀도의 언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그 언어들로 나를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다. 나는 인간 지성의 최고점으로 형상화한 이 언어들보다도 더욱 높게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이러한 방식으로 철학은 나의 위상을 끊임없이 높여왔다.


철학의 발전사는 시대에 따른 '나에 관한 이해'의 변천사와도 같다.


인간은 어떠한 존재인지에 대한 논의들은 결국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응답하기 위한 것이었다. 철학은 이 '존재에 응답하는 재미'에 푹 빠진 이들이 해온 것이며, 단 한 번도 응답하는 일에 게을러본 적이 마냥 성실했다.


철학이 마치 우리가 이야기를 쓰듯이 사유를 통해 존재를 만들어가는 주체적 인식활동이라고 오해하는 이들도 있지만, 하이데거는 완전히 다른 얘기를 한다.


철.학.은. 존.재.가. 시.켜.서. 하.는. 것.이.다.


존재는 부르고 있으며, 우리는 응답한다.


"너 뭐하는 애야?"라고 물으면 "나야."라고 응답한다.


존재를 향한 응답을 통해서만 인간은 자화상을 그려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자화상은 정말로 '그림'이기도 했는데, 이 그림은 존재의 영감을 받아 캔버스 위에, 또 오선지 위에 그려졌다.


예술가들도 당연히 나를 더 큰 것으로 꿈꾸었던 이들이다.


작가들은 나를 상상하거나, 또는 나에게서 남겨진 자취들을 추적해 더 큰 나에 대한 이야기들을 만들어갔다.


그러나 단 한 명도 "이것이 나다!"라고 말하는 이는 없었다.


나를 꿈꾸었던 모두는 알고 있었던 까닭이다.


나.는. 완.성.된. 것.이. 아.니.라. 언.제.나. 이.제. 시.작.이.라.는. 사.실.을.


텍스트는 완성을 꿈꾼다. 언어는 완벽을 기획한다. 책은 완결된다.


그리고 나는 최종본으로 완성된 책 밖으로 슬쩍 빠져나와, 그 '감옥' 밖으로 표표하게 걸어나와 미소띤 얼굴로 이렇게 말한다.


"자, 이제부터 나를 시작할게."


이처럼 완성 그 이상의 것이며, 상상 그 이상의 것이 바로 나다.


가장 크게 형태를 조형했으면, 그것보다 더 크다고 흘러나오는 그 자유의 향기가 정말로 나다.


우리는 '실존'이라는 용어로, 또 '탈존'이라는 용어로 이 '나의 운동'을 묘사하기도 한다.


이것은 거듭해서 '바깥'으로 빠지는 운동이다. '탈동일시'라고도 부른다. 그 전까지 나라고 간주되었던 것에 나는 반드시 빠져나온다.


이. 우.주.에. 나.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자유는 성대하다.


대개 우리의 삶에서 고통을 경험하고, 또 삶이 닫힌 것처럼 갑갑하게 경험할 때는, 우리가 나를 잃었을 때다.


자유 그 자체인 나를 잃어 자유롭지 못하다는 그 경험이 고통이다.


우.리.가. 나.를. 잃.게. 되.는. 아.주. 흔.한. 자.리.는. 텍.스.트. 속.이.다.


오늘날에는 나를 잃는 일이 거의 일상적이다.


나를 주장하고 있기에, 그래야 한다는 텍스트의 이념 속에서 살고 있기에, 우리는 나를 잃고 있다.


이념은 '완성된 것'이다.


나에 대한 이념은 '완성된 것'으로서의 나를 언술한다.


남는 것은 우리의 실천뿐이다.


완성되어 있는 '나'라고 하는 텍스트의 이념을 향해 우리는 부단한 실천을 통해 그 이념이 현실화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라고, 이념과 실천의 관계는 구조화된다.


쉽게 말해 이는 '나'라고 하는 이상적인 그림의 모범적 형상이 있고, 그 그림을 그려내는 실천을 통해 '나'는 실현된다고 하는 기획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나를 잃게 된 것이다.


실증적으로 이해해보자.


오늘날의 우리는 자기가 누구인지를 다 아는 것처럼 행위한다. 자기가 이미 이념적으로는 그 자화상이 완성된 존재인 것처럼 군다. 나머지는 실천의 문제며, 그 실천을 효과적으로 성립하게 해줄 '돈의 문제'다.


충분한 돈만 있으면 모두가 다 나답게 나로서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라는 것은 흡사 '왕'의 새로운 이름처럼 되어 있다.


다들 왕처럼 살지 못해 자신이 고통스럽다고 생각한다. 왜 아무도 자기를 사랑해주지 않냐는 호소는, 왜 아무도 자기가 왕이 되도록 돕지 않냐고 하는 탄원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왕이 되지 못해 고통받는 것이 아니다.


왕. 따.위.의. 작.은. 텍.스.트. 속.에.서. 나.를. 잃.어. 고.통.스.러.운.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양상으로 고통받는다는 것은 실은 우리에게는 희망이다.


우리는 '왕'이라고 하는 책 속에 가려진 나라는 것이 왕보다 훨씬 더 큰 것이라는 사실을 현재 직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직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왕이 가장 큰 것이라는 '오래된 착각'일 뿐이다. 그 착각 때문에 우리는 '왕으로서의 나'를 꿈꾸며, 그렇게 '더욱 작은 나'를 꿈꾸며, 스스로를 감옥 속으로 밀어넣게 된 것이다.


나를 더 큰 것으로 꿈꿔온 철학자, 예술가, 작가들은 이미 한참 전부터 왕이라는 것이 얼마나 작은 것인지를 묘사해왔다.


종교인들은 더욱 이르게 선을 그었다. '왕이 되는 길'과 '나로 커지는 길'은 완전히 다른 길이라며, 지상에서 제일 커보이는 왕이라는 것에도 결코 갇힐 수 없는 나의 크기를 한결같이 노래해왔다.


오늘날 범람하는 "당당하게 나의 이야기를 하자."라고 하는 이념적 주장은 "나도 왕이 될 수 있다."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것은 "가장 그 몸이 멋지고 자유로운 성인도 쭈그려 앉아 오리걸음으로 유치원에 등교하는 놀라운 업적을 이룰 수 있다."의 의미다.


아니 대체 왜?


우리가 나를 더 크게 꿈꿀수록 우리는 자유로워지며, 나를 더 작게 꿈꿀수록 우리는 고통받는다.


깨.달.음.은. 늘. 가.장. 크.게. 나.를. 꿈.꾸.는. 방.식.이.다.


여기에서 꿈꾼다는 것은 자기가 쓴 설계도대로 자신의 모습이 이루어지기를 욕망한다는 뜻이 아니다.


깨달음에 내용이 없는 것은, 상정될 수 있는 이미지가 없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결.국. 나.를. 미.지.로. 꿈.꾸.는. 것.이.다.


그러나 형식은 있다. 이것은 어떠한 것을 그 안에 가두려는 형식이 아니다. 깨달음의 형식은 깨달음이라는 이름 자체에서부터 드러나 있다.


깨서, 닿는 형식이다.


'지금까지 해오며 완성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의 그 바깥'이라는 형식이다.


깨달음의 관점에서, 인간은 지금까지 한 번도 완성된 적이 없다.


그러나 이를 다시 말하면, 인간은 시작부터 매순간 완성되어 왔다. 완성만을 거듭하며, 완성만을 연쇄해왔다.


이러한 인간의 성공은 인간 자신이 스스로의 자화상을 더 큰 것으로 꿈꿀 수 있었던 까닭이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자기이해가 깊어짐에 따라, 자유는 더 장대하게 펼쳐졌으며, 나는 더 진한 존재의 향기로 무르익어갔다.


존재의 자기이해, 그것이 곧 인간이었던 것이며, 그것이 나라고 하는 존재였다.


그리고 이제 이 글에서의 '존재'라는 표현을 '마음'이라고 다 바꿔 읽으면 심리학이다.


심리학도 더욱 큰 것으로 나를 꿈꾸고 있는 사람들의 활동이다.


정말로 심리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모든 심리학은 그래서 '깨달음의 심리학'이다.


그리고 『깨달음의 심리학』이라는 책의 바깥으로 다시 또 우아한 자태를 드러내려고 하고 있는 것이 있으니, 나는 또 미소짓는다. 나는 이제 시작한다.


영원한 자유이고, 영원한 신비인 이것을 우리는 이제 꿈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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