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시간나무"
화의 문제는 중요하고, 또 중요하다.
이상심리학적 문제는 근본적으로 다 화의 문제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다.
우리가 자신의 마음에 대해 가장 힘들어하는 지점도 다 이 화의 문제다. 화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몰라 곤란해하며, 심지어는 자신이 화가 나있다는 사실조차 자각되지 않아 총체적인 혼란에 빠진다.
그렇다면 화는 대체 왜 나는 것일까?
특히 오늘날의 화의 양상은 대체 어떠한 것일까?
자신의 모습이 못나서? 아무리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것들이 있어서? 유리천장이 너무 답답해서? 내 마음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관계가 힘들어서? 사회로부터 부당하게 대접받아서? 자신의 재능을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서? 현실이 너무 각박해서?
이러한 것들은 다 부수적인 문제들일 뿐이다.
우.리.는. 사.실. 시.간.과. 싸.우.고. 있.다.
시.간. 때.문.에. 화.가. 난.다.
자.신.의. 시.간.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화.를. 낸.다.
우리는 시간속에서만 존재하며, 시간이 우리의 존재방식을 드러낸다.
우.리.의. 몸.은. 직.접.적.인. 시.간.작.용.의. 결.과.물.이.다.
때문에 시간과 싸운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몸과 싸운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우리가 우리의 몸과 맺는 관계방식이 그대로 타인과의 관계방식이자 세계와의 관계방식이 된다.
자신의 몸을 통제하고 있는 이는 반드시 타인도 통제하게 된다. 자기의 몸을 독재하려는 이는 반드시 세계를 독재하려고 하게 된다.
모든 투쟁과 갈등은 특정한 형상으로 시.간.을. 멈.추.고.자. 하.기.에. 발생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이 예는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의 제목을 빌어 '나의 고무고무열매나무'라고 명명해볼 것이다.
만화 『원피스』의 주인공 루피는 고무고무열매를 먹은 이능력자다. 그런데 그 열매는 실은 '신의 열매'였다. 이 열매의 힘으로 루피가 지키고자 하는 것은 꿈이 있고 자유로운 '소년의 세계'다. 이것은 『원피스』의 주제이며, 『원피스』가 정통적인 왕도만화인 이유다.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에서는 소년의 세계가 어떻게 상실되는지를 보여준다면, 『원피스』에서는 어떻게 소년의 세계를 지켜가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둘의 공통점은 소년의 세계를 위협하는 것을 '어른'의 존재로 묘사한다는 점이다. 한쪽에서는 '나쁜 어른'으로부터 소년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열심히 애썼지만 실패하게 된 '좋은 어른'을 묘사하고 있다면, 다른쪽에서는 추악한 욕망으로 가득한 어른들로부터 소년 스스로가 자신의 세계를 지키려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실낙원의 신화'다.
순수한 아이가 나쁜 어른에 의해 강제로 어른이 되고 낙원에서 쫓겨나 고통의 시절을 살게 된다는 신화적 전제를 담고 있다.
이와 같은 전제를 갖는 이는 결국 '좋은 어른'처럼 기능하는 루피를 꿈꾸게 된다. 자기 또한 순수한 소년이면서, 다른 순수한 소년들을 해하는 나쁜 어른들을 퇴치하려는 피터팬의 역할을 자임하게 된다.
결국 이러한 '나의 고무고무열매나무'의 주제는 '정의의 화'다.
소년이 소년이지 못하도록 만드는 나쁜 어른들을 향한 정당한 분노를 묘사하고자 한다. 심지어 이 분노는 '신의 열매'와도 같이 '신의 분노'이기도 하다.
자기가 지금 그들의 세계를 잃게 된 불쌍한 소년들을 위해 분노하고 있다고 경험할 때, 그러한 개인은 자신의 안에서 신적인 힘을 느끼곤 한다.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고, 두렵지 않다. 자신이 아니라 남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는 그 거룩한 충족감이 그의 몸을 가득 채우며 그를 생기있게 만든다. 이것은 신성하다.
모든 투쟁과 갈등에는 이 신성한 '정의의 화'가 내재되어 있다. 이와 같은 '정의의 화'는 소년들을 지키기 위해 더러운 사회를 심판하고, 소년들이 자유롭게 비상할 수 있는 세계를 만들어주기 위한 변혁의 운동을 집행하는 일에 커다란 동력으로 활용된다.
그러나 아무리 이러한 화를 동원한다고 해도 변하는 것은 없다. 오히려 계속 화만 날 뿐이다.
이것은 왜인가?
소년이 소년이지 못하게 된 것은 나쁜 어른들과 차가운 사회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몸이 변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더는 소년이지 못하게 된 것은, 단순하게 우리 몸의 시간이 흘렀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것은 무엇보다 더는 소년이 아닌 '우리의 몸'에 대한 주제이지, 외부의 다른 소년들에 대한 주제가 아니다.
소년의 세계에 집착하고 있는 것은 다른 소년들이 아니라 고무고무열매를 취식한 피터팬인 자기 자신뿐이다. 그러니 소년들을 위한 화이기 이전에, 이.것.은. 그. 몸.이. 변.해.버.린. 자.신.에. 대.해. 내.고. 있.는. 화.다. 차라리 이 이해는 좋다.
제제가 더는 라임오렌지나무에 오르지 못하게 된 것은 그 환상이 깨지기 이전에 먼저 그의 몸이 자라서다. 몸이 자란 만큼 제제는 라임오렌지나무가 얼마나 작았는지를 보게 된다. 그리고 그 자각으로 인해 환상은 깨진다.
언제나 이처럼 더. 큰. 몸.으.로.의. 성.장.이. 더. 작.은. 환.상.을. 해.체.하.는. 것.이.다.
우리의 현실적인 몸이 루피의 고무몸이 아니듯이, 시간을 고무고무열매의 현실처럼 믿고 싶어도 시간은 고무줄처럼 우리가 임의로 조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임의대로 늘이거나 줄일 수 없다.
이러한 시간에 대해 우리는 어떠한 정의도 행사할 수 없다.
시.간.이. 곧. 정.의.이.기. 때.문.이.다.
'정의의 화'는 어찌보면 착각에 가깝다. 화는 정의일 수가 없다. 그것은 하나의 '상실'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아주 단순하게, 우리가 하나의 시절을 잃고 나이가 들었을 때 우리는 우리가 상실한 그 시간을 돌려달라는 정의를 요구할 수 있는가? 한다면 대체 누구한테 할 수 있는가? 우리가 여름을 잃었다면 그 여름을 돌려달라고 누구한테 '정의의 화'를 내야 정당한 일이 된다는 것인가?
상.실.은. 정.의.가. 아.니.라. 오.직. 사.랑.과.만. 연.관.되.는. 문.제.다.
모든 상실은 오히려 우리에게 묻고 있다.
지금은 사라진 이것도 계속 사랑할 수 있겠냐는 그 물음 앞에 우리를 서게 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시간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다.
우.리.의. 모.든. 시.간.은. 우.리.가. 사.랑.한. 것.을. 계.속. 사.랑.하.겠.다.고. 약.속.하.고. 가.는. 그. 시.간.이.다.
그래서 언제나 우리의 시간은 우리가 사랑한 것들과 함께 간다.
나를 통해 그가 같이 살아가고, 그녀가 같이 살아간다.
우리 자신의 시간과 싸우는 동안 우리가 정말로 상실하게 되는 것은 '상실의 소재'가 아니라 '더 크게 사랑할 기회'다.
사랑의 크기도 실은 몸의 크기에 비례한다.
이 말은 대왕고래나 아프리카코끼리가 지구에서 제일 크게 사랑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자신의 몸을 이해하는 성숙도만큼 우리가 지각하는 우리 자신의 몸의 크기가 좌우되며, 우리는 그만큼 사랑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자기의 몸을 성숙하게 경험하지 못할 때 우리에게는 열등감이 생겨난다. 그리고 연애의 대상들을 통해 그 열등감을 해소하려고 시도하게 된다. 이것은 '미성숙한 사랑'이다.
이.처.럼. 미.성.숙.한. 몸.이. 미.성.숙.한. 사.랑.을. 낳.는. 것.이.다.
몸에 성숙해진다는 것은 당연히 운동을 열심히 해서 몸을 가꾼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몸에 대한 성숙도는 다만 현시절의 자신의 몸을 받아들이고 있는 정도로 평정된다.
즉, 자신의 에이징(ageing)에 대한 이해가 몸에 성숙해지는 일이다.
화를 '정의의 화'로 유용하려는 일에는 이점이 있다. 정의라는 이념하에 화의 기운이 자신의 내부를 가득 채우는 일은 무수한 화의 양상 중에서 유일하게 아무런 저항없이 적극적으로 용인될 수 있다. 그렇게 채워진 화는 신성하게 느껴질 정도로 그 개인에게 풍부한 활력을 제공한다. 실제로 더 활발한 행위들의 동력이 된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정의의 화'는 우리가 마치 젊어진 것처럼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회.춘.의. 이.점.을. 갖.는.다.
물론 아주 단기적인 회춘이다.
그리고 화의 기운을 통해 잠시 자신에게 '마법'을 쓴 만큼, 그 반동도 있다. 잠깐 회춘한 상태가 종료되면, 그만큼 잠깐 더 노화된 상태를 갖게 된다.
아주 단순하다. 화를 낼 때는 우리가 평소보다 더 강렬하게 활동할 수 있지만, 화의 프로세스가 멎으면 평소보다 더 몸은 무기력해진다. 에너지를 다 끌어다 쓴 그 반동이다.
그러면 그 무기력한 상태가 싫어 또 자신이 '정당하게 화낼 수 있는 소재'를 우리는 찾곤 한다.
계속 소년들을 위협하는 적이 만들어져야 하며, 거룩한 성전은 계속된다. 정의의 어벤져스들은 백설공주의 계모처럼 끝없는 투쟁과 갈등을 통해 회춘활동을 지속해나갈 수 있게 된다.
우리의 삶에는 반드시 적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이 자신의 몸과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 우리는 한번 살펴볼 수 있다. 이들에게 자신의 몸이 적이 되어 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조금 더 은밀한 형태로는, 우리의 삶에는 통합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통합이란 언제나 반대되는 적의 통합이다. '적'이라는 다소 불편해보이는 표현을 쓰지 않고도 언제나 적을 상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통합'이라는 단어는 회춘의 목적을 위해 자주 활용되는 단어다. 이러한 이들 또한 그 몸에 대한 태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들에게 자신의 몸이 통합의 소재가 되어 있을 가능성도 아주 높다.
몸이 시간과 직결되는 것이라는 점을 이해한다면, 적이니 통합이니 하는 개념들이 몸에 대해 쓰이는 일이 얼마나 말도 안되는 것인지는 분명해진다.
우리는 정말로 시간을 적으로 돌릴 수 있는가?
애초에 성립조차 되지 않는 말이다.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오직 시간에 달린 존재에게는 가당치도 않은 얘기다.
우리가 시간을 통합한다는 것은 하물며 어떻겠는가?
이 말은 우리가 시간을 내려다볼 수 있는 시간의 지배자라는 것이다. 단 1초도 우리의 뜻대로 더 가질 수 없는 우리는 할 수 없는 말이다.
내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얘기를 우리는 종종 듣곤 한다.
이.것.은. 내. 자.신.의. 시.간.을. 살.라.는. 말.이.다.
시간을 산다는 말이 우리에게 가장 오해되는 방식이 있다. 이것은 '생활계획표'의 방식이다. 시계의 시간에 따라 낭비없도록 자신의 시간씀씀이를 잘 조직해서 효율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방식이다.
이는 자신의 시간을 사는 일과는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다.
몸으로 다시 바꿔 이해하면 또한 명료해진다.
우리가 아무리 시간운용의 계획을 짠다고 몸이 따라주지는 않는다. 물론 억지로 몸과 투쟁하며 계획표를 이행하는 것 같은 그림을 만들어낼 수는 있다.
그렇게 살면 어떠한 일이 생기는가 하면 우리가 아주 커다란 보상을 기대하게 된다. 억지로 쥐어짜내 해냈으니 그에 수반하는 가치의 보상물을 얻고 싶어하는 것이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폭식을 하게 되는 등의 증상은 이러한 기제로 발생한다. 결과적으로 몸이 망가진다.
내 자신의 몸을 산다는 것은, 내 몸을 이해하고, 내 몸에 맞는 생활양식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남들의 몸이 살아가는 방식과는 다를 수도 있다. 그러나 전혀 중요하지 않다.
이.렇.게. 살.아.야. 나.는. 행.복.할. 것.이.기. 때.문.이.다.
남들의 몸을 따라 산다고 내 자신이 행복해지지는 않는다. 사실 그 반대다. 아주 화가 많이 날 것이며, 그에 따라 억지보상을 더 많이 기대하게 될 것이고, 그러나 아무리 채워도 충분히 보상되지 않는 현실에 더욱 화가 날 것이다.
통속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면 행복하다고 우리는 말하곤 한다.
이 말은, 화에 치이지 않으면 행복하다는 의미다. 그리고 틀린 말이 아니다.
우리가 행복할 비결은 우리 자신의 시간과, 또 우리 자신의 몸과 싸우지 않는 데에 있다.
그것들을 지배하려고 하지 않으며, 또 우리가 그것들 위에 있다고 착각하지 않으며, 우리가 그것들을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우리를 만들어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다만 이해하는 것이다.
시.간.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우리는 시간과 불가능한 투쟁을 펼치며, 또 그로 말미암아 연쇄되는 타인과의 투쟁 및 세계와의 투쟁 속에서 영원히 화만 내면서 살아갈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자신의 시간과 화해할 수도 있는가?
그럼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세계와의 친밀감을 회복하고, 타인에게도 가슴을 열고 반갑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이렇게 묻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이제 행복해도 되겠는가?
당신 자신에게 행복을 허용해도 되겠는가?
당신이 당신의 시간을 살아가며 더 크게 사랑하는 존재로 드러날 수 있는 이 기회를 이제 당신이 마음껏 가져보는 일도 괜찮겠는가?
그러한 당신은 가장 성숙하고 커다란 세계수에 앉아 있던 당신 자신을 문득 발견할 것이다.
'당신의 시간나무'가 당신이 단 한 번도 쫓겨난 적 없던 당신의 세계이고, 매시절 당신이 때마다 가장 빛나는 열매로 열리는 낙원이며, 당신의 모든 행복의 절대적인 근거이다.
'몸'이라고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