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심리학 #61

"스승의 시대는 왜 저물었는가?"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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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이라는 말은 이제 예전과 같은 높은 위상을 갖지 않는다.


이것은 교권이 추락했다는 의미와는 다른 것이다. 또는 시대의 큰어른들이 사라졌다는 말과도 다르며, 이 시대에는 진정한 선비로 사는 이들이 없다는 말과도 다르다.


또한 이제는 중요한 인생의 정보들에 대해 더는 특정분야의 권위자에게 의존할 필요 없이, 개인이 스스로 그 정보들을 추구하고 획득할 수 있는 정보민주주의의 시대가 열렸기 때문에, 그동안 중요정보의 소유자로서 그 권위를 행사하던 스승의 위상이 약화되는 일은 필연이라고 말하는 일과는 가장 다른 것이다.


스승들은 상기한 이유들로 인해 사라진 것이 아니다.


배.우.려.는. 자.가. 없.어.져.서. 스.승.도. 사.라.졌.다.


자신이 배우려고만 하면 스승은 언제든 출현한다. 자신이 배우려고 하지 않을 때 이 세상 어디에서도 스승을 찾을 수 없다. 세상에 스승이 없다며 개탄하는 이들은 그래서 대개 그 자신은 가장 배우려 하지 않는 모습으로 드러나 있을 때가 많다.


오늘날 배우려는 자가 점점 사라지게 된 풍조는 '스승'이라는 것에 대한 커다란 오해에서 비롯했다.


이 경우 스승은 통속적으로 다음과 같은 것으로 정의되곤 한다.


'가장 뛰어난 앎을 갖추어, 그 앎에 자신을 일치시킨 뒤, 그러한 앎을 통해 사람들을 잘 길러내는 인물'


스승은 이처럼 앎의 담지자이자, 앎의 구현자이며, 앎의 보급자로 가정되었다.


최고의 앎을 알면 알수록 그 인격이 고매해지고, 사람들에게도 선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는, 흡사 계몽주의의 아바타와도 같았다.


앎.으.로. 인.간.을. 양.육.하.는. 자.의. 출.현.이.다.


'교사'와 '부모'가 통합된 모델이 이처럼 우리가 '스승'이라고 부르는 것의 내용물이 되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스승의 몰락은 예견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출현한 스승이라는 것은 배우려는 자가 있어서 생겨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스승이 먼저 있어서 배워야 한다는 현실을 성립시킨다. 교사는 학생보다 먼저 출현해있고, 부모는 아이보다 먼저 출현해있다.


그러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스.승.은. 결.국. 서.비.스.맨.이. 된.다.


교사와 부모의 통합체인 스승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더 나은 앎을 제공해주어야 하고, 더 나은 복지혜택을 제공해주어야 한다. 상대보다 앞서 있는 자신의 위상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상대를 만족시켜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서비스맨의 일은 날이 갈수록 힘들어졌다.


누구나 인터넷에 검색만 하면 교사와 동일한 수준의 정보를 쉽게 보유할 수 있으며, 또 돈만 있으면 부모가 제공해주는 복지혜택보다 더 좋은 서비스를 각종 서비스업에서 제공받을 수 있는 현실이다.


그러니 '스승'은 콘텐츠를 쥐어짜내기 위해 영혼을 갈아넣는 오늘날의 유튜버들처럼, 자기의 스승됨을 증명하기 위해 최대치의 고객만족을 실현해야 하는 막중한 과업에 시달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


스승이 전적으로 '최고의 앎'이라고 하는 것에 경도된 역할인 이상, 정보의 가치가 급속도로 변화해가는 정보자본의 현대사회에서는 필연적으로 도전받는 역할이자, 그 몰락이 예정된 역할일 수밖에 없던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몰락한 스승이 드러내게 된 모습은 결국 '유치원 보육사'이다.


고객들에게 정보상품을 이유식처럼 잘게 씹어 떠먹여주고, 또 고객들을 친절한 눈웃음으로 상냥하게 길러주는 그 역할이 이제 '진정한 스승'의 역할이 되었다.


이 시대에서 자신이 스승인 척하고 싶어하는 이들은 자발적으로 이 역할에 동조해, 이것이야말로 지배하지 않는 참된 스승의 권위라며, 그러한 자신이 최신의 스승모델을 구현한 인물인 것처럼 행세하려 했다.


또 반대편에서는 스승이 대중에 잠식된 이 포퓰리즘의 사태를 개탄하며, 대중과 영합하지 않고 오히려 대중의 앞에 서서 대중을 이끈 진실한 목자이자 지조있는 선비로 살다간 과거 '시대의 큰어른들'을 추억하곤 했다.


"이 시대의 스승은 누구보다 사람들에게 친절한 서비스맨이 되어야 한다구욧! 이 꼰대님들아!"


"허허, 시대가 바뀌어도 흔들리지 않는 중심이 바로 스승이거늘. 참 아직도 이토록 어리고 미숙하구나. 끌끌."


그리고 이 두 세력의 대립처럼 보이는 '합작'이 스승의 시절을 완전하게 끝장냈다.


스.승.이.라.는. 것.의. 의.미.는. 가.장. 은.폐.되.고. 또. 가.장. 망.각.되.고.야. 만. 것.이.다.


여기에는 스승이 어떻게 기능해야 하는지에 대한 당위적 역할만이 주장될 뿐, 아무도 배우려는 이는 없다. 배우려는 이가 없는데도 스승을 성립시키려는, 자기가 스승이 되는 일에 집착하는 이들만이 있다.


배우려는 이가 있을 때 스승이 생겨난다는 말을 다시 기억해보자.


스승이라는 것은 정말로 무엇인가?


가.장. 배.우.려.는. 자.다.


그 자신이 가장 배우려는 자가 언제나 스승의 의미를 드러내며, 자연스럽게 스승으로서의 역할을 이루게 된다.


그렇다면 그 자신이 가장 배우려는 자는 대체 무엇을 배우려는 것인가?


그 자신이 그 자신의 삶을 배우려 한다.


이처럼 스승이라는 것은 '앎'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삶'과 관련된 것이다.


'더 나은 앎' 또는 '최고의 앎'을 획득하여 다른 이들에게 그 앎의 내용을 전파하는 이가 스승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배워가며 다른 이들과 삶을 함께 나누는 이가 스승이다.


그런데 삶을 배운다는 이 표현 또한 우리에게 오해된 바가 크다.


이것은 어떠한 메뉴얼처럼 '더 나은 삶' 또는 '최고의 삶'의 형태를 모델링해서 배운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것은 말은 '삶'이라고 언술하지만 실은 다 '앎'에 대한 것들이다.


우리가 삶에 관해 배워야 하는 것은 거의 언제나 단 하나뿐이다.


그것은 삶.에. 대.한. 자.신.의. 고.집.을. 꺾.는. 일.이.다.


'삶'이 자기가 아는 '앎'의 내용대로 되어야 한다는 고집을 꺾을 때, 우리는 그만큼 삶을 배우게 된 것이다.


그래서 스승의 원형은 원래 '고집을 꺾는 자'다.


가장 스승을 부정하는 이들은 삶에 대한 자신의 고집을 결코 꺾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러한 이들은 스승이 그 앞에 출현해도 알아보지를 못한다. 오히려 자기가 모든 이의 소망이 그 고집대로 실현되는 상냥한 현실을 만들어주는 진정한 스승이 되겠다며, 실제로 자기의 현실에 출현해 있는 스승을 독재자와 같은 것으로 규정한 뒤 거기에서 벗어나려 하는 일들은 빈번하다.


자기의 욕망어린 고집을 관철하는 일이 자유라고 심대하게 착각되어 있는 상황 속에서는 이처럼 스승은 더욱 나쁜 것으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이들에게 자신의 고집을 꺾으려 하는 것은 자기의 인생을 가로막는 사악한 장애물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니 스승은 이 시대에 더욱 설 자리가 없다.


타인이 고집부리는 일을 상냥하게 지지하는 광대나, 자기가 고집을 부리는 강퍅한 꼰대만이 가득하게 남아, 그들만이 스승으로 행세한다.


이 모든 것은 또한 자기가 스승이어야 한다는 고집이다.


이렇게 이 시대의 모든 것은 자신이 조금 보유한 것 같은 정보자본들을 통해 자기가 스승이어야 한다는 그 고집을 부리고 있기에, 이 시대에는 가장 스승이 없다.


다 스승이려 하니, 어디에도 스승이 없다.


스승은 가장 은폐되고, 가장 망각되었다.


그리고 가장 은폐되고, 가장 망각된 것은 무엇이 되는가?


바.로. 삶.이. 된.다.


정확히는 이것은 '되는' 것이 아니다.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누구도 배우려 하지 않고 모두가 다 자신이 스승이라고 할 때, 그렇게 이 세상에 스승이라는 것이 사라졌을 때, 이제 스승의 의미는 삶으로 다시 돌아간다.


삶에 대해 고집을 부리는 이를, 이제는 삶이 직접 나서 상대하여 그 고집을 꺾는다.


가장 크게 고집을 부리는 것에 대하여, 가장 크게 고집을 꺾는 자, 그것이 바로 삶이다.


원.래.부.터. 우.리. 자.신.의. 삶.이. 스.승.이.었.다.


우리가 삶에 대해 배우고자 할 때, 삶은 하나의 스승역할을 맡아줄 이의 앞으로 우리를 안내하지만, 이것은 삶이 그 대상을 통하여 우리에게 그 스승됨을 드러낸 것과 같다. 그래서 우리는 그에게서 배우고 있던 것이 아니라, 실은 우리 자신의 삶에서 배우고 있던 것이다.


스승의 역할로 잘 쓰이는 이는 이 사실을 이미 잘 안다.


자기가 모종의 위대한 앎을 전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는 자기를 스승으로 보며 찾아온 이의 삶에 의해 잠깐 쓰이는 것일 뿐이다. 그렇게 삶이 자신을 중요하게 쓰고 있다는 사실이 스승역할을 맡게 되는 이에게도 큰 기쁨이 된다. 삶에 의해 쓰이는 동안 그도 삶에 관해 가장 가까이에서 배울 수 있는 까닭이다.


우리는 삶을 배우려고 이 삶을 얻은 것이며, 언제나 삶이 우리의 스승이다.


스승의 시대가 저물어간 것은 태양 대신에 하늘을 밝히려 하는 인조광원들의 고집이 결국 승리했음을 알리는 현실이 아니다.


다시 또 위대한 태양이 떠오를 내일을 암시하기 위함도 아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땅 위에서 펼쳐지고 있었다는 바로 그 사실을 알리고 있을 뿐이다.


우리의 스승인 삶 위에 서서, 우리는 삶에 대한 자기의 고집이 승리했다고 축포를 쏘아올리고 싶어했다.


그러나 인조광원들이 수놓은 찬란함은 태양보다 더 빠르게 저물고, 이내 어두운 밤하늘 아래 우리는 놓일 것이다.


그래도 땅이 우리를 받치고 있다.


스승이라는 말은 이제 예전처럼 높은 위상을 갖지 않는다.


그것은 아래로 갔다.


땅이 되었다.


땅으로 추락한 것이 아니라, 땅으로 우리를 지키고 있다.


우리가 삶이라고 하는 가장 큰 스승의 원상을 만나고 싶어, 스승의 드높은 시대는 저물어갔던 것이다.


자기가 최고의 스승으로 다 알아서 한다는 우리의 고집이 꺾일 때까지, 삶은 우리를 떠받치는 그 아래에서 다 하고 있으며, 그렇게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가장 크게 배우고 싶었던 정직한 이들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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