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냥한 꿈에서 깨어나는 일"
'꿈'과 '희망'이라는 말은 동의어처럼 쓰일 때가 많다.
실제적으로는 반대의 작용을 갖는다.
상.냥.한. 꿈.이. 당.신.의. 희.망.을. 뺏.어.간.다.
희망은 당신이 당신의 미래와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이다.
미.래.를. 향.하.는. 마.음.이. 희.망.이.다.
상냥한 꿈은 그러나 이 마음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한다. 미래로 향하지 못하도록 꿈속에 잡아 가둔다.
어떠한 여행자는 오래전에 떠났던 고향마을로 돌아온다. 그가 마을을 방문하니 부족민 모두가 나와서 반갑게 그를 맞이한다. 화톳불이 피워지며, 밤이 깊도록 환영의 시간이 이어진다. 장로님도, 옛날에 좋아하던 이웃의 소녀도, 대장간 아저씨도 그를 향해 미소지으며, 그가 마을을 떠나 홀로 서럽게 고생한 시간들을 위로하고, 또 이렇게 다시 돌아오게 된 것을 가슴깊이 축복한다.
따뜻하고, 정말 따뜻하다. 그 포근한 온기에 감싸여 여행자는 어느새 잠이 든다.
다음 날 그가 일어나서 보게 된 것은, 꺼져있는 불가에 혼자 누워있는 그 자신과, 인기척이 전혀 없는 마을의 모습이다.
그는 이내 이해하게 된다.
돌림병이 돌아, 또는 외적의 습격으로 인해, 마을의 모두가 사라지게 되었지만, 부족의 아이인 여행자가 돌아오게 된 그 날, 모두의 영혼이 잠깐 그 모습을 드러내 여행자의 귀향을 따뜻하게 맞이해주었다는 것을.
세상에 홀로 남게 된 여행자가 오늘의 이 온기를 잊지 않도록, 모두가 어디에서라도 그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도록, 모두의 마음을 그에게 전하고자 했다는 것을.
여행자에게서 흐르는 눈물과 함께 가슴 깊이 차오르는 감사함을 느끼며 이제 그가 마을을 다시 나설 때, 그 뒤편으로 마을사람들의 인영이 희미하게 떠오른다. 부드러운 미소로 고개를 끄덕이며 여행자를 전송한다. 모두가 사랑으로 응원하고 있는 그 길의 어디까지라도 그는 행복할 것이며, 또 힘찰 것이다.
이와 같은 꿈이 있다.
매우 상냥한 꿈이다.
이 꿈을 꾸고 있는 이를 가장 상냥하게 구원하고자 하는 꿈이다.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꿈.꾼. 자.가.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형.태.가. 규.정.된.다.
그리고 이것은 이제 꿈꾼 자의 욕망이 되어 그를 쫓는다.
그는 어디에 가든 따뜻한 부족마을과 같은 공동체를 지향하며 공동체의 구성원 모두가 자기를 최후의 아이처럼 가장 소중하게 사랑해주기를 기대하게 된다. 그러한 현실이 이루어져야만 그는 자신이 비로소 구원받을 수 있다고 여긴다. 자기를 사랑해주는 따뜻한 부족마을을 얻는 것만이 그의 모든 목표가 되며, 그의 가능성은 오직 그 목표에만 수렴된다.
그러니 다른 모든 가능성은 기각되며, 이 목표를 이루고 있지 못한 한 그의 인생은 늘 불만족으로만 가득찬다.
이러한 이는 지금 자유롭게 열린 가능성에 의해 끌리는 것이 아니라, 가장 닫힌 가능성에 의해 쫓기고 있는 것이다.
이 상태를 미래가 닫힌 상태라고 말한다.
미.래.는. 곧. 자.유.의.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그 자유로운 가능성이 또한 희망이다.
모든 희망의 핵심적인 내용을 떠올려보면 분명하다.
"네가 자유롭게 될 것이다."
이것이 언제나 우리의 희망이다.
그러나 상냥한 꿈이 제공하는 '강렬한 자극'에 빠져, 꿈꾼 자는 오히려 부자유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가능성을 닫아 걸고 스스로 감옥 안에 자신을 투옥하게 된 것이다.
자신뿐만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꿈을 사람들에게 강제하기까지 하게 된다. 모두가 자신에게 따뜻한 부족민의 역할을 해줄 것을 기대하며, 또 그렇게 되게끔 획책하고 통제한다.
상냥한 꿈이라는 이름의 감옥에 모든 이를 가두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상냥한' 까닭에, 좋은 것이고, 또 옳은 것처럼 선전된다. 그러나 감옥은 그저 감옥일 뿐이다.
감옥이 봉쇄하고 있는 것은 미래다. 그러니 감옥 안에서 우리는 희망을 잃는다. 아무리 좋아 보이고, 옳아 보여도, 희망이 없다면 우리에게는 다 의미없는 일이다.
미래를 향하는 마음이 희망이라는 말을 다시 떠올려보자.
마음의 중요한 특성은 양방통행이라는 것이다.
'미래를 향하는 마음'이라는 것은 곧 '미래로부터 향해진 마음'이라는 것이기도 하다.
희.망.은. 미.래.로.부.터. 오.는. 것.이.다.
이것이 '꿈'과 '희망'이 다른 근본적인 이유다.
'꿈'은 과거를 향하는 마음이며 과거로부터 온 마음이다. 그렇게 과거의 것에 근거하여 임의적으로 미래의 형태를 결정하고, 또 그것을 당위적으로 욕망하는 것이 '꿈'이다.
그러나 '희망'은 전적으로 미래에만 위탁한다. 미래의 가능성이 지금의 자신을, 그리고 자신의 과거조차도 송두리째 변화시켜줄 것을 신뢰하고 거기에 맡기는 것이다.
차라리 이렇게 비유하면 어떨까.
희.망.은. 미.래.의. 우.리. 자.신.이. 현.재.의. 우.리.에.게. 보.낸. 연.애.편.지.다.
지금의 우리는 미래에 대해 전혀 알 수 없지만, 괜찮다고, 한번 흐름을 따라가보라고, 반드시 더욱 아름답게 피어날 것이라고, 미래의 우리 자신이 보증하며 전하고자 하는 그 메시지와 같다.
이러한 희망을 신뢰하지 못하는 이들이 상냥한 꿈을 만들어내 그 꿈에 빠진다. 자신의 꿈으로 미래를 억지로 만들려고 한다.
때문에 희망은 언제나 꿈꾼 자가 빠져 있는 '상냥한 꿈'을 해체하고자 하는 운동을 보인다.
꿈.꾼. 자.가. 드.러.나.면. 꿈.에.서. 깨.게. 된.다.
이에 따라 희망은 지금 누가 꿈을 꾸고 있는가를 물으며, 오직 꿈꾼 자만을 찾고자 한다.
그렇게 꿈꾼 자가 드러나져서, 구원의 권능을 갖고 있다고 믿어진 꿈이 깨지면 어떠한 일이 생겨나는가?
힘은 지금 나에게 있다.
꿈이 상냥한 것이 아니라, 꿈꾼 자가 상냥했던 것이다.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상냥한 시선으로 자신을 돌아보며 나일 수 있었던 그 힘은 지금 여기에 있으며, 명료한 이 존재로 있다.
이것은 미래의 우리 자신이 현재의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있는 그 힘이며, 이제 현재의 우리가 확인한 그 힘이다.
이렇게 꿈이 아니라 꿈꾼 자를 찾으려 하는 일은, 미래의 우리 자신과 현재의 우리 자신을 일치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나는 상냥한 꿈의 구원을 기다리는 자가 아니라, 지금 바로 현실로 이루어진 상냥한 나다.
미래로부터 향해온 그 희망의 모습처럼, 지금의 나는 동일한 그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에.게.는. 언.제.나. 희.망.이.다.
나를 향하고자 하는 마음이 희망이며, 나로부터 당도한 마음이 희망이다.
우리가 미래에 어떤 모습이 될지는 알 수 없을지라도, 나일 것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더 자유롭게 나여도 될 것이며, 그렇게 나로 무르익어 있을 것이다. 미래로부터 온 연애편지에는 그렇게 쓰여 있다.
나는 영원한 나의 편이라고.
나만 생각한다고.
지금의 당신과 똑같이, 나를 향한 그 마음이 한없이 깊다고.
이렇게 분명한 것인 나만을 향하고, 나에게 다 맡겨, 나로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은 진실로 희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