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층 침대가 좋아

by 외투


뤼노와 안나가 아침인사로 '아뇽' 한다. 아직 '안녕' 은 어렵다.

그들이 내게 나의 언어로 인사를 하려고 노력하는 걸 당연시 여겼지만 나는 그런 것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유럽이니까, 유럽인인 그들이 나를 배려해주는 걸 당연시했다.

하지만 거긴 스페인이었고 그들은 프랑스인과 폴란드인.

아마 그들이 한국에 왔더라도 '안녕'을 강요했을 걸.


밖엔 비가 내리고 있었다.

호스피탈레로(남자 관리인)는 비가 곧 그칠 거라고 했지만 좀처럼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우비를 꺼내 입고, 배낭 커버를 씌우며 비에 대비했다.

재킷을 걸치고 우산을 꺼냈다.

나는 우산을 쓰고 다녔다. 뤼노가 '우산은 금방 망가진다' 고 염려해주었다.

비옷이 편하긴 한데, 땀이 차고 거추장스러웠으며 하도 비가 오락가락하니 입고 벗기가 번거로웠다. 그래서 우산을 자주 사용했다. 바람이 불거나 하면 아랫도리는 젖을지언정 위는 잘 젖지 않아 상쾌한 데다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는 덤. 우산을 들어야 하니 양손을 모두 사용할 수가 없고 걸리적거리긴 한다.


몸상태가 좋지 않은 제이미는 차를 타고 이동하기로 했다.

비가 내려 조금 축축했지만 숲길에 들어서니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었다.

깨끗한 자연 속에서 맞는 비가 시원하다. 그냥 맞고도 싶었지만 서늘한 가을 날씨에 젖으면 감기에 걸릴까 봐 우산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걸었다.



바르를 나와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했다.

뤼노는 성큼성큼 멀어져 갔고 크리스는 조이를 따라 뒤쳐졌으며 나는 안나와 함께 걸었다.

혼자 걷고 싶은 마음 반, 안나와 함께 걷고 싶은 마음 반.


정확히는 못 알아 들었지만 안나는 간호사 '비슷'한 직업을 갖고 있었다.

3주가량의 휴가를 내서 이곳에 왔단다. 휴가가 3주라니!

까미노에서 만난 대부분의 유럽을 포함한 서양인들은 길게는 한 달 이상의 휴가를 즐긴다고 했다. 그러면 그들은 근처의 이웃나라를 여행하던가 더 먼 나라로 여행을 다닌다고들 했다.

부럽다. 방학도 아니고, 휴가가 한 달 이상이라니. 직장을 그만두어야만 까미노를 걸을 수 있는 우리의 현실이 불쌍하다. 오죽하면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실업자의 길'이라고들 했을까.

'그러게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직장 들어가지..'라고 하면 할 말 없지만.


비도 가늘어졌고, 11월이었지만 춥지 않았다. 재킷도 벗고 우산도 접었다. 그리고 모자도 벗었다.




간간이 나오는 마을마다 집들을 아기자기하게 꾸며 놓았다. 생장에서처럼 어색하지 않고 친근하다.

그렇다고 생장이 싫다는 건 아니고.. 소박하고 정감이 간다.


'스탑' 좋은데....


점심 무렵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식당을 찾으려 두리번거리는데 고기를 싣고 다니며 파는 '정육점 차'에 아주머니들이 모여있었다. 스페인의 작은 마을엔 이렇게 차에 고기나 생선, 또는 빵이나 과일을 싣고 다니며 장사를 하는 차량들이 있다.

"돈데 에스따 바르, 뽀르파보르(바르가 어디 있나요)?"

이제 막 말을 배운 아이들처럼 스페인어를 써먹고 싶어 진다.

고기를 고르시던 아줌마 한분이 차 밖으로 나와 뭐라 뭐라 하시며 손가락으로 일러주셨다.


안나와 나는 스페인식 쌘드위치인 보까디요를 주문했다. 심드렁한 표정의 주인아줌마가 잠시 후 보까디요를 내왔다. 커다란 바게뜨사이에 쵸리소와 하몽을 넣은 보까디요는 처음에는 먹기가 쉽지 않았다. 쵸리소와 하몽은 짰고 빵은 딱딱하고 질겼으며 양도 많았기 때문이다.

안나는 커피에 브랜디를 넣어 마셨다.

나는 아침에 커피를 마셨기에 커피에 취할까 봐 따뜻한 '레체(우유)'를 마셨다.


곧 독일 부부가 들어왔다.

두 분 모두 덩치가 작지 않았는데 소리 없이, 은근히, 꾸준히, 듬직하게 걸었다. 어제 피레네부터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자주 마주쳤는데 그때마다 서로 눈인사만 나누었었다. 이번에도 어색한 눈인사.

보까디요를 반만 먹고 남은 반을 싸 달라고 주인아줌마에게 내밀었더니 은박지를 한 장 주욱 찢어 내민다.



비가 오락가락하더니 하늘에 무지개가 떴다. 너무나 선명했던 무지개, 비가 좋은 이유 중 하나.


쥬비리에 도착했을 때가 4시였다. 론세스바예스부터 여기까지의 거리가 약 22km.

독일 부부는 벌써 알베르게에서 짐을 풀어놓고 식사를 하며 오늘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우리는 5km 떨어진 '라라쏘냐'까지 더 가기로 했다.


쥬비리를 떠나면서 갑자기 안나와의 사이가 어색해졌다.

대화도 줄고.. 거리를 두고.. 불편한 마음으로 그저 걷기만 했다. 왜 그런지 이유도 알 수 없었고 또 물어보기에도 난처한 상황이었다. 혼자만의 시간을 빼앗은 건 아닌지.. 내가 무슨 실수를 한 건지.. 등등의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억지로 말을 붙여보아도 그때뿐, 긴 침묵이 이어졌다. 함께 걷기도 애매하고 혼자 떨어져 걷기도 어정쩡했다.

'빨리 이 어색한 시간이 지나갔으면..'

어느 정도 어려운 점들이 있을 거라고 약간의 각오도 했었지만 이런 문제는 전혀 예상 밖이었다.



지친 몸과 마음으로 해질 무렵 라라쏘냐에 도착했다. 라라쏘냐는 작은 마을이었다.

알베르게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먼저 도착한 뤼노가 반갑게 맞아 주었다.

"아뇽?"

뤼노는 물집이 생겼는지 발을 치료하고 있었다.


론세스바예스에서와 달리 작고 오래된, 조금 퀴퀴한 냄새를 풍기는 알베르게에는 스페인 커플 한쌍과 여자 둘, 뤼노, 안나 그리고 나 이렇게 7명이 전부였다.

현관 앞에는 스페인 커플의 개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뤼노의 침대 2층이 비었길래 짐을 풀었다. 각자 한 개의 침대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낯선 사람의 위층에 자리를 잡기도 그렇고 해서 뤼노 침대의 2층으로 정했다.


뤼노가 저녁을 아직 먹지 않았다며 같이 해 먹자고 했다.

'어찌나 고마운지... '

혼자였으면 정말이지 쓸쓸하고 초라한 식사가 될 뻔했다. 뤼노랑 식재료를 들고 거실 뒷문을 열고 주방으로 내려갔다. 쌀이 우리 쌀 같지 않고 길쭉하다. 물이 손등의 반쯤 가릴정도로, 산에서 밥해먹을 때처럼 물을 맞춰 올렸다. 그리고 배낭에 처박혀 있던.. 것은 아니고 비상용으로 챙겼던 라면 스프를 끓였다. 끓는 물에 스프를 넣자 매운 향이 퍼졌다. 순간 뤼노가 매운 향에 놀랐다. 사나이 울리는 매운맛 좀 보여줄까.

그런데 밥이 문제였다. 쌀이 달라서 그런지 물을 못 맞춰 그런 건지.. 쌀도 달랐고 물도 못 맞춰 그런 건지 설익었다. 물을 좀 더 붓고 뜸을 들여보았지만 그리 나아지지 않았다.


음식을 들고 거실로 돌아오니 스페인 커플이 저녁을 먹고 있었다.

"올라, 깨딸(안녕, 괜찮아)?"

"뷔엔(좋아)"

접시에 밥을 덜었다.

그리고 '김!'

비상용으로 챙겨 온.. 것은 아니고 배낭에 처박혀 있었던, 그것도 A4 사이즈 만한 대(大) 자로 한 달 전 지리산에 갔을 때 넣어둔 것이었다. 배낭 속에 처박혔던 있던 터라 김은 바스러져 있었다. 더운밥 위에 김을 뿌려 한입.

비록 설익었지만 따뜻한 밥과 짭짤한 김으로 뿌듯해진다. '김'은 여행용으로 아주 좋다. 가볍고 부피도 작을뿐더러 맛도 좋으니. 농담 삼아 종이 태운 것이라고 했는데, 뤼노가 먹어봐도 되냐고 물었다.

밥을 떠서 김을 뿌려 먹은 뤼노의 반응은.. 맛있단다. 바다에서 나는 몸에 좋은 식품이라고 설명해줬다. 내가 '밥이 실패'라고 했지만 괜찮다며 잘 먹었다. 뤼노는 자기의 콩 수프를 먹어보라며 내게 덜어주고 밥을 먹었다. 콩 수프는 밍밍했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도 좋고 내가 한 음식을 남이 맛있게 먹어줄 때도 좋다.

뤼노는 집에 돌아가면 좀 비싸겠지만 꼭 김을 사 먹겠다고.

스페인 커플에게도 먹어보라며 권하니 라면스프국물에 빵을 찍어 먹었다.

내 기대와는 달리 그리 매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내게 정어리 통조림을 나눠주었다. 정어리도 밥반찬으로 괜찮았다.

김치가 없어 아쉬웠지만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저녁 식사가 되었다.

그나마 익숙한 음식을 먹고 나니 우울했던 마음이 조금 풀렸다.


안나는.. 저녁이나 먹었는지 모르겠다. 크리스와 조, 그리고 제이미는 다른 곳에서 머무는지 이곳에 오지를 않았다.

씻고 빨래를 해서 침대와 침대 사이에 줄을 걸어 널었다. 줄이 조금 여유가 있어 뤼노의 빨래도 함께 널었다. 히터 때문에 건조했던 실내가 한결 나아진 것 같았다.



2층 침대가 좋아


2층 침대로 올라갔다.

사람들이 2층 침대에 올라가지 않는 이유는 당연히 1층이 편하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걷고 난 뒤 2층을 오르락내리락하는 게 힘들고 귀찮기도 할뿐더러 밤에 화장실이라도 가려면 모두들 자는데 불을 켤 수도 없고 해서 몽롱한 정신으로 더듬더듬 사다리를 찾아 내려오는 게 여간 신경을 써야 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2층은 대부분 자리가 비어있었다.

반면 2층 침대가 좋은 이유는 누우면 어느 정도 혼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오늘처럼 다른 모두가 1층에 있다는 가정하에. 첫날부터 3일째인 이날까지 계속 2층이다. 생장에서는 침대의 1층이 비었음에도 2층에 자리를 잡았지 않았나. 낯선 외국인과 눈을 마주 칠일도 없고 어릴 적부터 2층 침대가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그래서 오늘도 2층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잠시 안나와의 일을 생각해본다.

'내가 너무 친절하게 대했나..', '그래서 부담스러웠나..'.'도대체 왜..'..

'에라 모르겠다!'

천정을 바라보고 있는데 검은 얼룩 같은 게 보였다.

'혹시..' 하는 생각에 일어나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냥 얼룩이었다.

아래층의 뤼노가 고개를 쳐들고 '굿나잇, 상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