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국경

by 외투


아침 식탁에는 여러 나라 사람들이 둘러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어디 있다가 나왔는지 어제 보지 못했던 사람들도 있다.

대부분이 첫날이라 똑같이 낯설고 어색해서 많이 불편한 자리는 아니었다.


커피가 국대접에 나온다. 시금치 좀 썰어 넣으면 영락없는 시금치 된장국이다. 그리고 바게뜨, 이건 마치 돌덩이처럼 딱딱해서 입천장이 살짝 까졌다. 하루에 석 잔 이상 마시면 심장이 두근거려 잘 마시지 않던 커피를 딱딱한 빵과 먹다 보니 그만 한 대접을 다 마셔버렸다. 적어도 커피 세잔 이상은 되는 양이었는데.... 다행히 맑은 공기 속에 마셔서 그랬는지 커피에 취하지는 않았다.


크리스 부부와 안나, 제이미는 일부 무거운 짐을 배낭에서 꺼내 모아 차편으로 론세스바예스로 보냈다.

여럿이 나누니 1~2유로 정도 했던 것 같다.

나는.. 나의 12kg짜리'미친 배낭'을 그냥 업고 가기로 했다.




서서히 오르막이 나타나고 뤼노가 큰 키만큼 성큼성큼 앞서가기 시작했다.

뤼노 다음에 나, 그리고 안나는 크리스와, 그 뒤에 제이미와 조가 뒤에서 걸었다.

일행과 함께 걷고 싶은 마음 반 혼자 걷고 싶은 마음 반, 아니 혼자 걷고 싶은 마음이 조금 더 컸다.

언어도 이유 중 하나였지만 성격 탓이다. 여럿이 있을 때 빨리 지친다.





한 프랑스 소녀는 개 두 마리를 데리고 왔다.

검둥이와 흰둥이.

약간 히피(히피가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아마도 이런 느낌일) 같은 프랑스 소녀와 한 명의 집시(집시가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아마도 이런 느낌일) 같은 청년과 함께 그냥 백수로 보이는 '프랑스 오대수'.

'프랑스 오대수'는 한국영화 매니아였고 특히 '올드보이'를 좋아한다고 했는데, 얼핏 오대수 닮은 것 같기도 했다. 이들 셋은 참 자유로워 보였다. 복장이 거지 같기도, 부랑자 같기도 하다.



이 시기의 오리발.. 말고 오리손 알베르게는 문을 닫는다. 하지만 대부분의 순례자들이 그 앞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갔다. 먼저 와있던 뤼노가 손을 내밀며 아몬드 두 알을 건넸다.

"포 에너지.."




바람 국경


오리손을 출발해서 조금 더 올라갔을 때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가 아니라 바람이 몰려와 공격을 개시했다. 산으로 오르면서 하늘이 흐려지고 비바람을 뿌려대기 시작했다. 비는 많지 않았으나 바람이 거셌다.

이런 바람은 생전 처음이다. 내 몸이 가볍기도 했지만 바람에 휘청거려 비틀거리기 일쑤였다.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몸을 기울이고 한걸음 한걸음 힘을 주어가며 피레네를 올랐다.

내 몸에 묻어있던 속세의 찌꺼기를 모두 거두어 갈 태세였다.

무섭기도, 재미있기도, 시원하기도 했다. 안나는 꿋꿋이 잘 걸었다.


강한 비바람에 잠시 쉴 겸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더니 멀리 아래로 제이미가 보였다. 힘겹게 올라오던 제이미가 몇 번 휘청거리더니 넘어졌다. 뉴요커 제이미는 바람에 쓰러졌다. 그만큼 바람이 강했다. 바람이 사람을 쓰러뜨리다니!

안나와 내가 큰소리로 제이미를 불러보았지만 강한 비바람이 우리의 소리마저 날려 버렸다. 다행스럽게도 바람맞았던 제이미가 다시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돌담이 있길래 비바람을 피해 숨어들었다. 적의 공격을 피해 벙커에 숨어든 꼴이다.

바게뜨를 뜯으며 허기도 달랬다. 안나가 파이를 나누어 준다. 전우애가 느껴졌다.

폴란드계 독일 사람인 안나는 언뜻 봐도 강하게 생겼다. 조금 무거워 보이는 몸으로 씩씩하게 잘도 걷는다.

독일병정 안나는 거센 비바람을 뚫고 계속 진격을 했고 방위병인 나는 잠시 작전상 조퇴...


작은 오두막이 있길래 비바람을 피해 들어갔다. 오두막엔 프랑스 오대수와 히피소녀, 그리고 집시 청년이 있었다. 막 불을 피웠는지 벽난로에서 연기가 피어나고 있었다.

집시 청년이 배낭을 열더니 도끼를 꺼낸다!? 배낭 속에 도끼를 넣고 다니다니. 밖으로 나가더니 곧 땔감을 구해왔다. 그리고 오대수와 집시가 담배를 말아대기 시작했다. 나무 연기와 담배연기로 훈제될 것만 같았다.


이들 셋은 오늘 밤을 허름한 이곳에서 보낼 거라고 했다.

비바람을 피할 오두막에 따뜻한 벽난로 그리고 와인과 담배, 오늘은 대충 수습하겠구나.



비바람이 조금 잦아들어 오두막을 나와 얼마쯤 걸었을까, 멀리 안나가 보였다. 안나는 대나무 지팡이를 든 사무엘(스위스)과 걷고 있었다. 독일 말과 스위스 말이 비슷한지 두 사람은 영어가 아닌 언어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무엘은 약간 자라목을 하고 건들건들 걸었는데, 굉장히 빨랐다.

하긴 스위스부터 1,000km 이상을 걸었으니(사무엘도 자기 집에서부터 까미노를 시작했다고) 자신만의 독특한 걷기 스타일을 완성시켰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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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의 속도에 맞추기도 만만치 않았고 풍경이 아름다워 천천히 걷기로 했다.

안나와 사무엘을 먼저 보내고 경치를 감상하며 천천히 걸었다.

상쾌한 공기, 시원한 바람, 나무 냄새, 포근한 낙엽, 호젓한 길, 아름답고 편안한 단풍... 아껴 걸었다.

정말 행복했던 순간 중의 하나였다.


그렇게 조금 더 걸었을 때 크리스와 조이, 그리고 제이미가 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뒤에서 나타나자 깜짝 놀라는 사람들. 모두들 내가 한참 앞서갔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오두막에 머문 동안 나를 앞서간 것이었다.

제이미는 많이 지쳐 보였다. 조가 제이미와 보조를 맞춰 걸었고 크리스는 앞장서 걷다가 가끔 뒤를 돌아보며 잘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했다.


걷다 보니 어느새 스페인이다. 도대체 언제 국경을 넘어왔는지, 국경이 있기나 했던 건지 알 수가 없다. 첫 국경 넘기를 소매치기당한 것 같아 조금은 억울했다.

서울에서 경기도만 넘어가도 '여기서부터 경기도입니다...'류의 이정표를 세워놓는데 이건 나라와 나라 사이에 아무런 경계가 없다. 국경이 있었는데 세찬바람와중에 미처 보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바람이 국경이었을까.

프랑스 대기와 스페인 대기가 서로 맞부딪쳐 바람을 만들고 그걸 국경으로 삼는 것.

장벽이나 철조망, 검문소 없는 그런 국경. 또 다른 곳은 안개가 국경임을 알려주고 또 다른 곳은 비로, 눈으로. 그래서 바람 국경, 안개 국경, 소나기 국경, 무지개 국경, 나비 국경....

그러고 보니 공기가 조금 다른 듯 했다.

프랑스 쪽이 좀 더 가볍고 스페인은 조금 촉촉했다.




날이 저물 무렵 론세스바예스에 도착했다.
꽤 먼길을 걸었던 하루였지만 멋진 풍경과 긴장감으로 힘든지도 모르게 올 수 있었다.

책을 통해 봐왔던 오래된 중세시대의 공동숙소는 사용되지 않았고 현대식으로 숙소로 안내되었다.

침대를 배정받고 저녁식사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뤼노가 자꾸 '밴딩 머신, 밴딩 머신' 한다. 주방도 좋다며 은근히 자판기로 유도하는 눈치다. 바게뜨도 하나 사서 나누고.. 아몬드도 겨우 두 알밖에 안 주고..

검소한 건지 짠돌인 건지 혼란스러웠다.

아닌 게 아니라 주방은 시설이 잘 갖춰져 있었고 갖가지 즉석식품자판기들이 있었다. 하지만 겨우 빵 몇 조각으로 점심을 해결했던 터라 즉석식품을 먹고 싶지는 않았다. 음식다운 음식이 필요했는데, 다행히 나머지 일행이 알베르게에 딸린 식당에서 사 먹자고 해서 그렇게 하기로 결정.


식당은 준비가 되기 전까지 문을 열지 않았다. 대신 또 다른 공간에 '바르' 가 있어서 식권 같은 걸 미리 끊고 바르에 앉아 식당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맥주나 와인을 한잔씩 마셨다. 오픈 준비가 끝나면 유니폼을 입은 멋진 스페인 청년들이 문을 열고 나와서 테이블로 안내한다.

식사는 파스타, 메인 요리인 생선 스테이크, 후식 순으로 이루어졌다. 밥 없이 생선만 먹는 게 허전하기도 하고 새롭기도 했다. 생선과 감자튀김이 맛있다. 와인은 필수.


배도 부르고 와인도 몇 잔을 마셨기에 몸이 늘어진다.

알베르게는 4명이 한 칸의 공간을 사용하게 되어있는데 2개의 2층 침대의 1층은 독일 부부가 차지했고 나는 2층에, 그리고 맞은편 2층에 스페인 청년이 자리를 잡았다. 순박한 표정이 부담 없이 편하게 느껴진다. 침낭 속으로 들어가려는데.. 그가 뭔가를 꺼내 '귀'에 집. 어. 넣는다! 그것은 바로 이어 플러그! 이어캡이 아닌, 이어 플러그!! 내가 관심을 보이자 이어 플러그를 빼더니 '왜?'라고 눈으로 말한다. 그러더니 '아! 이어 플러그~' 라며 역시 웃는 눈으로 말하며 배낭을 뒤지더니 한쌍을 꺼내 준다.

"그라시아스!"

막상 귀마개를 껴보니 왠지 '코가 막히는' 듯한 답답함이 느껴져 끼고 자지는 않았지만, 바람 국경을 넘어 도착한 스페인이 내게 준 선물은 이어 플러그다. 이어 플러그는 이어캡보다 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