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 드골 공항에서의 노숙은 조금 불편했다. 시차도 있고 잠도 설쳐서 조금 멍~했고 몸도 찌뿌듯했다.
화장실에서 고양이 세수를 하고 외국사람들 구경 좀 하고 있으려니 창구가 열렸다.
'비아리츠'행 티켓팅을 마쳤다. '비아리츠'는 파리에서 비행기로 1시간 조금 넘는 거리에 있다.
배낭을 수화물로 부치는데 규격 때문인지 철재 틀에 넣어보라고 했다. 무게보다는 부피가 더 중요한 것 같았다. 저가항공은 요금이 싼 대신 추가 요금이 발생되면 비용이 껑충 뛴다.
내 배낭은 말 그대로 '배낭여행'배낭이다. 생전 처음 해보는 해외여행인지라 이것저것 쑤셔 담았더니 부피도 무게도 꽤 나갔다.
혹시 몰라서 기내 반입이 가능한 벨트쌕에 카메라 외에도 넣을 수 있는 것들은 다 집어넣고, 두꺼운 옷가지들도 배낭에서 꺼내 입어 최대한 배낭의 부피를 줄였다. 그 많은 옷가지와 물건들이 어디서 나왔는지 놀라웠다.
그리고 더 놀라운 건 그렇게 많이 꺼냈음에도 불구하고 배낭은 여전히 부담스러웠다.
한 겨울 옷차림으로 약간 힘을 주어 배낭을 우겨넣었더니 다행스럽게도 틀에 꼭 맞게 들어갔다.
이른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비행기는 만원이었다. 비행기는 금방 하늘로 날아올랐다. 하늘에서 파리를 내려다보고 싶었지만 창가 자리가 아니라 볼 수 없었다. 파리와는 인연이 없나 보다.
저가항공은 물도 사 먹어야 한다. 티켓팅 후 물을 사 가지고 탈걸, 물 달랬다가 1유로를 빼앗기는 기분으로 지불했다. 공항 매점에서는 1.8L짜리 한통에 1유로도 안 한 것 같은데, 독점이라고 800mm짜리가 1유로다. 아까웠지만 주문했으니 무를 수도 없고... 첫 유로화 사용으로 물먹었다.
비행기는 금방 비아리츠에 도착했다. 공항은 아담했다. 착륙한 지점에서 바로 활주로에 내려 잘 정리된 시외버스터미널 같은 작은 공항 건물로 걸어간다. 가족들이 마중 나오고 연인을 배웅하는 모습들이 평화롭고 안정돼 보인다.
다음 목적지인 '바욘'행 버스시간을 알아보고.. 버스가 드문드문 있었기에 시간이 많이 남아 공항을 빠져나와 주위를 둘러보았다.
비아리츠는 작은 전원마을 같았다. 참새마저 통통한 게 한국산보다 크고 실해 보였다.
가을 하늘에 구름이 낮게 깔려있다. 공기도 신선하고 기온도 선선했다. 시야가 맑았다.
버스를 타고 바욘으로 향했다. 버스는 마을버스처럼 꼬불꼬불 돌고 돌아 30분가량을 달려 바욘에 도착했다.
먼저 '생장'행 기차 시간을 알아보고 표를 샀다. 사람들이 친절했다. 낯설어 머뭇거리니 상냥하게 설명해주고 자리도 양보해주며 배려해주었다.
기차는 1시 이후 출발하므로 3시간의 여유가 남아 느긋하게 바욘의 중심부를 향해 걸었다.
바욘은 생각 외로 컸다. 생장으로 가는 길목의 작은 마을이려니 했는데 성도 있고 커다란 성당도 있다.
큰 강을 가로지르는 '유럽풍'이 아닌 진짜 유럽의 돌다리를 건너고 강가의 집들과 파란 하늘, 낮은 뭉게구름을 만끽하며 내가 유럽에 왔다는 것을 실감했다.
꾀죄죄하고 어둡고 스산했던 파리의 공항과는 너무 달랐다.
풍경과 냄새, 대기의 느낌이 한국과 달랐다. 워낙 공기가 맑고 상쾌하기도 했지만 우리 시골의 맑은 그것과도 분명 달랐다.
아기자기한 상점들. 요란한 간판도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상점들이 깨끗했다.
골목을 나와 첨탑이 보이는 곳으로 가니 성당이 나온다. 처음으로 본 성당이 웅장했고 입구와 벽을 장식한 조각이 섬세했다. 돌의 재질이 우리 것과 달리 조금 무른 것 같아 조각하기에 좋을 듯했다.
사전조사를 철저히 하고 꼼꼼하게 일정을 짜서 여행을 한다는 게, 왠지 너무 틀에 얽매이는 것 같아서... 는 아니고 귀찮아서 그냥 대강의 틀만 잡고 왔기에 아는 게 많지 않다. 이런 도시의 역사나 볼거리들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렇지만, 무지할지언정 여행기나 카페를 통해서 가야 할 길과 기본적인 매너와 상식들은 알고 있었다.
간단한 먹거리를 사들고 먹으면서 바욘 역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골목을 거닐며 구경하는 게 지루하지 않았다.
널어놓은 빨래며 집수리하는 인부들, 지나가는 자동차들... 모든 것이 새로웠다.
바욘역에는 아마도 까미노를 걸을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배낭을 메고 등산화를 신은)이 몇몇 눈에 띄었다.
어쩌면 함께 걷게 될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오래된 바욘 역사와 달리 현대적 디자인의 기차가 시간에 맞춰 도착했다. 좌석이 정해져 있는지는 모르겠고... 승객도 몇 안되어 창가의 순방향 쪽의 자리를 잡았다. 반대편 창가의 승객이 쌘드위치를 꺼내 먹는데 맛있게 보였다. 그러고 보니 아직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했다.
기차는 금방 종점인 생장에 도착했다.
도착은 했지만 막상 기차에서 내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잠시 사람들의 눈치를 보았다.
마찬가지로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하는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쌘드위치’가 앞장을 서서 걸었다. 곧 그를 따라 대여섯의 사람들이 걸었다.
마을로 올라가 도착한 곳은 순례자 사무소. 노부부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까미노에 대한 간단한 설명 후 순례자 여권을 발급해준다.
저울이 있어서 사람들이 각자의 배낭 무게를 달아보았다. 배낭의 무게를 저울로 달아봤더니 내 배낭은 약 12kg. 쌘드위치가 내 배낭을 들어보더니 "크레이지!"를 연발했다. '배낭이 미쳤네, 배낭이 미쳤어..'
설마, 아무리 내 영어실력이 '귀 모자'급이라지만 이렇게 알아들었을 리는 없었고 쌘드위치의 배낭은 8kg 밖에 되지 않았다. 흑인 여성이 11kg, 나머지는 10kg 정도.
내 배낭이 그렇게 무거운 건가? 누군가는 배낭 무게가 삶의 무게라고도 했었는데... 나의 삶은 남보다 조금 더 묵직한가 보다.
가다 보면 알겠지. 내 배낭이 미친 건지 아닌지, 내 삶이 미친 건지 아닌 건지는.
가보는 수밖에.
벽 한쪽면에 각 나라별 까미노 방문자수를 나타내는 그래프가 있었는데 한국인이 프랑스인보다 훨씬 많았다.
어젠가 그젠가에도 한국사람이 두 명 정도 출발했단다.
순례자 여권 발급 및 아침식사가 포함된 숙박비가 10유로.
3유로를 기부하고 조가비를 골랐다. 생각해보면 조가비는 굳이 달고 다니지 않아도 괜찮았을걸.
'나, 순례자'라는 이름표인데 굳이 없어도 '길을 걷는 사람'이란걸 모두가 알 수 있다.
내겐 조가비가 갖는 상징적인 의미보다는 생색내기의 용도가 많은 부분을 차지했었던 것 같았다.
샌드위치는 꼬막만한 아주 작은 조개껍데기를 달고 있다.
내 껀, 조가비도 크레이지.
제이미(미국, 여), 안나(독일, 여), 크리스와 조(호주부부),뤼노(프랑스,남-쌘드위치) 그리고 나, 이렇게 여섯 명이 한기차를 탔었고, 같은 알베르게에 묵게 되었다.
돌로 지어진 알베르게는 단단하고 아늑한 느낌을 주었다. 아늑한 공간에 놓인 깨끗한 4개의 2층 침대, 우리나라에도 여행자를 위한 이런 숙소가 있다면 좋겠다(지금은 이런 게스트하우스가 많다).
주인 할아버지가 화장실, 샤워실을 안내해주고 내일 아침식사시간을 알려주고 돌아갔다.
방에는 우리뿐, 그나마 안나와 뤼노는 다른 방이어서 4명이서 원하는 침대를 골라 잡았다.
같은 숙소를 쓰게 된 이들과 함께 마을을 둘러보고 저녁을 먹기로 했다.
마을이 아기자기한 게 예쁘다. 맑은 개울이 마을 중심을 흐르고 있었고, 오래되었지만 낡았다기보다는 중후한 멋을 풍기는 건물과 집들이 주위 풍경과 잘 어우러져있다. 길과 건물과 자연이 서로 경계가 없는 것 같았다.
식당에 앉아 음식을 먹으며, 술잔을 기울이며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 풍요와 여유가 흘렀다.
영화 '트윈픽스' 에서처럼 평화롭고 아름다운 이 마을도 그 이면엔 추악한 것들을 감추고 있을까?
겉으로 보기에 저래도 저들 나름의 고충과 갈등이 있을 테지, 아마 있을 거야, 있어야만 해! 아니라면...
얼굴도 잘생겼는데 공부도 잘하고 착하기까지 하다면, 게다가 부자라면 너무 불공평하잖아!
생장은 조금 낯설었다.
깨끗한 부자동네에 놀러 온 꼬질꼬질한 가난한 아이처럼.. 부럽다기보다는 어색했다.
샌드위치 뤼노가 식당을 고르는 기준은? 바로 가격이다.
이곳 생장에서는 '가정식 백반집' 정도 되는 작은 식당일 테지만 단정하고 그 뭐랄까.. 고풍스런 멋이 있다.
메뉴를 고르다가 닭고기가 먹고 싶어 '치킨 플리즈..'를 준비했는데 닭요리가 2인분밖에 남지 않아 내 차례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호주 부부 크리스와 조의 별명이 재미있다. 남편 크리스는 코알라, 아내 조는 캥거루다. 아무리 봐도 별명이 바뀐 것 같다. 키가 큰 크리스가 캥거루에 더 어울리고 아담하고 귀여운 조가 코알라와 더 닮았다. 헷갈린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남이냐, 북이냐'를 물었다.
'부엔 까미노'를 외치며 와인잔을 부딪쳤다.
식사를 하며 조금 가까워졌다. 내 이름이 발음하기 어려운가 보다. 자꾸 '생한 생한' 했다.
내일부터는 그냥 걷기만 하면 된다.
게이트를 찾니 환승을 하니 수화물을 찾니.. 하는 번거로움 없이 그냥 각자의 짐을 지고 두발에 의지해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되겠지. 몸은 힘들 테지만 머리와 마음은, 어쩌면 편안할 것이다. 어쩌면.
근데 몸이 피곤하면 머리도 마음도 피곤하던데....
숙소로 돌아와 따뜻한 샤워로 여독을 풀었다.
나도 모르게 집중하고 긴장을 했었는지 피곤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침낭 속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상쾌한 대기 속으로 몸이 조금씩 꺼져 들어갔다.
온몸으로 퍼지는 나른함을 느끼며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