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 모자 부탁합니다

by 외투


이른 아침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섰다.

아버지는 나보다 먼저 나가셨기에 인사도 못 드렸다. 어차피 마주쳐봤자 좋은 소리가 있을 리 없다. 아마 일부러 자리를 피하신건지도 모르겠다. 뭔가 찜찜하기도 했지만 잘됐다 싶었다.

안 좋은 기분으로 집을 나서면 그 날 하루가 온종일 우중충한데... 하물며 처음 떠나는 해외여행 내내 꼬리를 물고 따라다닐지도 모른다.

엄마는 '몸조심하고..' 하시며 배웅해주셨다. 집을 나오는 내 마음이 기대감과 죄송함이 뒤섞여 썩 편치는 않았다.

몰래 가출하듯 조심스러웠다.



아저씨, 밀어주세요


집을 나와 골목을 벗어나면 오른편에 이발소가 있다. 미용실 말고 이발소.

평소엔 이용하지 않지만 혹시 문을 열었나 기웃해보니 열렸다.

잘 됐다 싶어 들어갔더니 이발사 아저씨는 아침식사 중이었다.

'하고 싶은 5만 가지' 중의 한 가지.

삭발.

왠지 삭발은 미용실보다는 이발소가 더 잘 어울린다.

이른 아침에 문을 여는 미용실도 없을 테고.

삭발을 해보고 싶었지만 집에서 쫓겨날까 봐, 사회생활에 지장 있을까 봐 못했었는데 이럴 때 아니면 언제 해보겠나. 여행 중 머리 관리도 쉽고... 50여 일 후 집에 돌아올 즈음엔 어느 정도 자라 있겠지.

이발소가 문을 열지 않았다면 유럽에 가서 밀어볼까도 고민했었다.

"아저씨, 밀어주세요."

이발사 아저씨는 첫 손님이 '삭발 손님'이라 그런지, 아침식사를 방해해서 그런지, 아니면 원래 그런 건지 표정이 뚱했다.

원래 표정이 그런데다가 아침식사도 마치지 못했는데 첫 손님이 삭발 손님이기까지 해서 더 그랬을는지도.

마음을 다잡기 위해, 새 출발을 기념하기 위해, 독한 마음으로... 따위보다는 그냥 한번 밀어보고 싶었다.

'혹시 탈모된 머리가 더 자라지 않을까' 하는 기대는 조금 있었다.

'삭발' 참 쉽다.

전기면도기로 수염 깍듯 '징-징-' 밀기만 하면 된다.

다 밀고 난 후 거울 속의 나, '인상 참...' 뭐라 말로 표현할 방법이 없다.

입대할 때, 그러니까 방위 소집되었을 때의 '어색해진 짧은 머리' 와는 급이 달랐다.

사람의 인상에서 머리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를 목도하는 순간이었다.

'괜히 밀었나' 하는 후회도 들었지만 어쩌랴, 이미 엎질러진 물.

그래도 안 해보고 미련을 남기기보다는 후회하더라도 해보는 게 나은 거지?

밀기 전에도 그랬지만... 그래도 숱이 적은 것보다 아예 없는 편이 좀 낫지 싶었다.


민머리가 어색해 모자를 뒤집어쓰고 이발소를 나와 공항으로 향하는데 엄마로부터 문자 메쎄지가 온다.

'너를 믿고 기다린다. 모든 잡념일랑 잊고 잘 다녀오렴. 파이팅!'

희망과 용기의 메쎄지.

하지만 찔리는 구석이 많다. 남들 다하는 직장생활을 뭘 그리 엄살을 떨어대며 그만 둘 핑계를 찾아 해외여행 갈 궁리만 한 건 아닌지. 어쩌면 엄마는 일부러 찔리라고 이런 문자를 보내셨는지도 모른다.

늦가을, 휴가철도 아닌데 큰 배낭을 메고 공항으로 향하는 지하철 속 내가 어색했다.


공항에 도착해보니 아직 러시아 항공사 창구는 열려있지 않았다. 12시 40분 비행기이므로 여유가 있었다.

창구가 열려 배낭을 수화물로 부치고 출국장 줄에 섰는데 떨렸다. 입이 말랐다.

여권사진과 다르게 내 머리는 빡빡이었다. 인터넷으로 '삭발'은 해외 출국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막상 닥치니 긴장이 되었다.

'어떤 망할 네티즌이 유포한 허위정보였다면... 여기서 막히면 어떡하지, 그동안 준비한 시간이며 돈이며, 게다가 항공권은 환불도 안되는데.. '

마음 졸이며 심사를 받는데 다행히도 나의 머리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항상 이런 식이다. 막상 닥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미리 걱정하고 사후대책 고민하고.

신발을 벗고 검색대를 통과하고... 조금씩 낯선 것들과 마주치며 그렇게 조금씩 궤도에서 이탈하는 기분이었다.

아니면 본 궤도에 오르는 기분이었나?


모스크바까지 날아갈 보잉 767 비행기는 예상보다 작았다.



조금 낡은 비행기는 개인용 모니터도 없고, 그나마 전면의 공용 모니터도 색이 푸르뎅뎅한 게 맛이 갔다.

'그래도 괜찮아. 비행기가 날기만 잘 하면 되지 뭐.'

안내를 하는 승무원들도 한국 항공사나 광고에서 보아왔던 예쁘고 늘씬한 아가씨가 아니라 아줌마, 그리고 그녀보다 좀 더 여성스러워 보이는 남자다.

'그래도 괜찮아. 승무원이 써브만 잘 하면 되지 뭐.'

아주머니 승무원들에 처음에는 실망했는데 은근하게 편안해졌다. 부담스럽지 않았고 '비행'을 낯설지 않고 좀 더 익숙하게 만들어준다고나 할까, 마음이 놓이는 구석이 있었다.

다행히도 내 자리는 창가다. 가뜩이나 좁은 좌석의 가운뎃 자리는 더 불편했을 테고 무엇보다 창 밖을 맘껏 내다볼 수 있어 좋았다.

한국어가 점점 빠져나가고 그 자리를 러시아아와 영어가 차지하기 시작했다.




귀 모자 부탁합니다


이륙하고 구름을 뚫고 넘어선 후 곧 식사가 나왔다. 처음 먹어보는 기내식.

앞에서부터 배식이 시작되었는데, 어렴풋이 '비프, 치킨 오어 피쉬..' 하는 소리가 들린다.

'어제 삼계탕을 먹었으니.. 피쉬로 하자'.

'피쉬 플리즈 피쉬 플리즈 피쉬 플리즈...'를 속으로 되뇌고 있는데, 스튜어디스 아줌마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식사를 내려놓고 간다.

'뭐지 이거?'

앞에서부터 배식을 하다 보니 뒤쪽으로 가면 자연스레 메뉴의 선택권이 없어지는 것이었다. 그냥 주는 대로 받아먹을 수밖에. 뚜껑을 열어보니 생선!

기내식 사진도 찍고 싶었는데 자주 먹어봤다는 듯이 그냥 먹었다. 음식 앞에서 사진기를 꺼내들기가 쑥스럽다. 조금 짰지만 먹을만했다.


기내식을 깨끗이 비운 다음 '눈 좀 붙여 볼까' 하고 귀마개를 갖다 달라고 시도해보았다.

"이어캡 플리즈"

당연히 못 알아듣는다. 이어폰을 갖다 준다. 손짓으로 귓구멍을 막는 시늉을 했더니 '아!' 하더니 '이어 플러그'는 없단다.

아, 쪽팔려.. '귀 모자 부탁합니다' 라니.


약 9시간의 비행 끝에 비 내리는 모스크바 SVO 공항에 내렸다.

착륙 전 스튜어디스가 한국말로 주의사항을 얘기해주는데 발음이 시원치 않았지만 반가웠다.

공항 주변의 낮은 건물들과 갈색 계열의 집과 붉은 지붕이 비에 젖어 가을로 축축한 이곳이 아주 낯설었다.

인천에서 12시 40분에 출발해서 9시간여를 날아왔지만 이곳은 아직 오후 5시. 해를 따라 서쪽으로 날아왔기 때문이다. 한국시간으로는 11시 20분, 피곤하고 졸립다.


아직은 한국인도 몇몇 눈에 띄었다.

시간을 따라잡으며 멀리 날아왔지만 아직 가느다란 튜브 같은 것으로 한국과 연결되어 있는 기분이었다.


공항은 깨끗하고 한산했다. 파리행 탑승게이트를 확인하고 의자에 앉아 쉬었다. 그리고 모자를 벗으려고 노력했다. 민머리가 어색해서 그런지 무의식적으로 쓰게 되는 모자를 의식적으로 벗었다.

출국장, 입국장을 통과할 때마다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것도 그렇고, '이왕 밀어버린 머리 시원하게 다니자' 하고 민머리에 익숙해지려고 노력했다. 어차피 한국도 아닌데.

가끔 어른들 손을 잡고 지나가는 인형처럼 생긴 아이들이 민머리의 나를 경계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파리행 비행기는 더 작아졌고 이제 한국인은커녕 동양인도 찾아볼 수가 없다. 튜브가 더 가늘어졌다. 그만큼 나는 조금 더 위축되었다. '땡큐'에서 '쓰바씨바'로, 그리고 '메르씨'로 바뀐다.

러시아 시간으로 밤 9시, 한국시간으로 새벽 4시 30분에 식사가 나왔다. 하는 일도 없이 앉아만 있는데 배는 왜 그렇게 고픈지 모르겠다.

모스크바행 비행기에서는 창가 자리라 그리 불편하지 않았는데, 파리행에서는 3 열중 2열, 그러니까 가운데다. 양옆으로 외국인에게 샌드위치가 되었다.

'빨리빨리'는 한국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었나 보다. 좌 아줌마, 우 할아버지였는데 어찌나 식사속도가 빠른지 속도를 맞추다가 체할뻔했다. 그야말로 후다닥 식사를 끝냈다. 아까운 빵 하나를 남겨야 했다.


파리 시간으로 밤 11시, 샤를 드골 공항에 도착.

비행기가 도착하자마자 문도 안 열렸는데 서로 먼저 나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겨 문으로 향한다.

'빨리빨리'는 어딜 가도 마찬가지.

입국심사는 간단했다. 무얼 물어볼까, 물어보면 어떻게 대답을 하나, 예상문제와 답안을 준비했는데 그냥 얼굴 한번 '스윽' 보더니 무심하게 기계처럼 여권에 스탬프를 찍어주었다. 이렇다니까.

파리 도착을 확인하는 스탬프가 '툭'하고 한국과 이어진 튜브를 끊어버렸다.

'홱-' 하고 던져진 내가 파리에 '툭!' 하고 떨어졌다.


공항이 그리 깨끗하지 않아서 그런지, 밤이라 그런지 유럽에 왔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수화물을 찾고 입국장을 빠져나오는데 덩치 큰 흑인 아저씨가 다가와 '택시 써-ㄹ' 했다.

파리가 내게 건넨 첫마디는 '택시 써-ㄹ' 다. 택시 타고 갈 데도 없고 조금 무섭기도 해서 작은 목소리로 '노..' 했다. 파리에게 건넨 나의 첫 대답은 '노' 다.

그래, 나에게 프랑스 파리는 그냥 잠시 지나쳐가는 기착지에 불과했다.


최대한 안전하고 편한 자리를 찾아 한 시간여를 헤맸을까? 그럴만한 곳은 이미 여행자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어떤 여자 여행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혼자 잠만 잘 자고 있었다. 왠지 당당하게, 아무렇지 않게 누워 있는 사람을 보면 그냥 자연스러운 것을... 너무 경계하고 주눅 들어 있으면 더 티 나고 만만해 보일 것 같았다. 간혹 경비원이 돌아다니며 비행기표를 확인하면서 노숙자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너무 겁먹을 필요 없겠다'

대충 자리를 잡고 배낭 위에 다리를 올려놓고 눈을 붙였다. 무사히 파리에 도착했으니 이번 여행의 절반은 성공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