뤼노의 아침인사.
"굿 필그림~"
아니라니까....
특급호텔에서 느긋하게 일어나 룸서비스로 아침을 여유 있게 즐기지 못하므로 배드 투어리스트.
먼저 밖으로 나가 날씨부터 확인했다.
보슬비.
큰 비가 아니라 다행이다.
뤼노와 함께 커피, 빵, 비스킷, 과일로 아침을 먹었다.
커피를 넉넉하게 끓여 작은 보온병에 담았다. 나는 보온병도 가지고 다녔다.
우산에 보온병에... 그러니 배낭이 미쳤지.
미친 배낭을 잘 달래서 나왔더니 날도 밝고 비도 그쳤다.
도시는 조용했다.
비 온 뒤의 상쾌한 아침 공기를 가르며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 산책하는 사람들.. 그러고 보니 오늘은 토요일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출근을 하지 않았다.
우리나라도 5일제 근무를 시행하고는 있지만 아직 중소기업이나 영세기업들은 주 6일, 바쁘면 주 8일 근무도 예사다. 내가 다니던 직장도 그랬다. 납기일을 맞출라치면 정말이지 '제기랄, 이건 전쟁이야 전쟁.. '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공장 밖이 지옥이었을지 몰라도 어떡해서든지 밖으로 나갈 궁리만 했었다.
나와보니 지옥은 아니었다.
잠깐이었지만 천국이었다. 실컷 늦잠을 즐기고 근처의 동산으로 산책을 나갔으며 평일 오후의 한가한 극장을 누렸으니까.
조금씩 눈치가 보이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지옥으로 변해갈 즈음 본격적인 천국을 찾아 유럽으로 날아왔다.
하지만 유럽도 결코 기대만큼 천국스럽진 않았다.
경제위기로 문 닫은 가게가 많았고 분위기가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아, 느긋하게 여유를 즐기며 경제위기를 겪느냐, 아니면 하루하루 전쟁을 하며 경제적인 안정을 누릴 것이냐 이것이 문제로다.
느긋하게 여유를 즐기며 경제적으로도 안정을 누리고 싶다.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한 지 4일째, 발이 조금씩 아파왔다.
물집이 생겼다.
도시를 벗어나기 전에 빵과 과일 등 부식을 사서 뤼노와 나누었다.
뤼노가 양해를 구했다. '나 먼저 가'
"오케이, 부엔 까미노-"
"안녕-"
이제는 내 이름은 물론 '안녕'까지 제법 잘 발음했다.
사실 뤼노의 이름은 '뤼노'가 아니다.
자동차 회사 '르노'와 비슷하지만 '르노'는 아니었고 '리노'도 아닌 공기반, 소리반에 콧소리와 안면근육 전체를 동원해서 'ㅎ르 ㅎ나우 ㅎ드흐..' 해야 하는데 이게 미쎤 임파써블이다.
뤼노도 이해했는지 그냥 '뤼노'라고 부르라고 했던 것.
프랑스어는 내게 너무 낯설었다. 누군가에게는 아름다운 언어 일지 몰라도, 내게는 '말을 하다마는 흐지부지한 언어'였다.
포장도로가 사라지고 흙길이 나왔다. 뤼노가 점점 멀어지더니 시야에서 사라졌다.
'다시 볼 수 있을지..'
안나와 제이미, 조와 크리스, 그리고 사무엘도 보이지 않았다.
이 길 어딘가에 있을 테니 둘 중 하나.
다시 만나던가, 못 보던가.
혼자 걷는 게 홀가분하니 좋았다.
내 페이스대로 걸으니 덜 힘들었고 편하게 풍경을 감상하며 나만의 상념에 빠져보기도 했다.
'아.. 돌아가면 뭐해 먹고 살지?'
뻬르돈 언덕이 가까워졌을 무렵 어디선가 "핫산-"이라는 맑고 고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내 이름이 아니지만 나를 부르는 소리가 분명했다.
한국에서도 내 이름이 '상한'이라고 하면 나중에는 '한상'이라고 자주 바뀌어 불렸었는데, 스페인에서도 '한상'이 쉬웠나 보다.
'상한' 이 '한상'이 되고 다시 '한상' 이 '핫산' 이 되었다.
길에서 벗어난 작은 마을에서 어떤 이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라라쏘냐에서 신라면스프에 빵을 찍어 먹었던 스페인 커플이었다.
개와 함께 다니기에 개를 받아주는 알베르게에서 머문다고 했었고, 그래서 라라쏘냐에서는 숙소에 개가 들락거렸었다. 커다란 개가 어찌 그리도 순하던지.
나도 손을 흔들며 "부엔 까미노, 아디오스-!"라고 소리쳤다.
"부엔 까미노- 아뇽-" 이 메아리처럼 돌아왔다.
'안녕'이 변한 '아뇽'이 정겹다.
정, 순박함, 반가움이 듬뿍 담겨 나도 그렇게 동화될 것만 같은 예쁜 목소리다.
혼자 걷다가 누군가 멀리서 알아보고, 나를 불러주니 그 순간만큼은 '핫산'으로 마음이 푸근해진다.
내게는 그 정도의 거리가 좋았다.
더 가까워져서 같이 걷기보다는 적당히 떨어져 부르고 대답하다가 부담 없이 제 갈길 가는 정도.
멀리 뻬르돈 언덕이 보이기 시작했다.
점점 다가가니 정상에 누군가 나를 보며 서있는 게 보였다.
'뤼노가 날 기다리나 보지?' 기대하며 언덕을 올랐다.
간밤의 비로 길이 질어서 지나간 자전거 바퀴 자국이 선명했다. 걷기도 힘든 길을 자전거로 오르려면 얼마나 힘들었까?
언덕 위의 사람은 뤼노가 아니었다.
간단한 먹거리를 파는 노점상 아저씨.
낡은 픽업트럭을 끌고 올라와 간간이 지나가는 순례자를 상대로 장사를 하는 듯했는데 시기가 시기인 만큼 장사가 잘 될 리가 없다.
내게 음료를 권했지만 사양하고.. 순례자상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다.
찍은 사진을 확인해보니 눈을 감았네.
한번 더.
아저씨는 나름 정성을 들여 구도를 잡아가며 찍어주었다.
사진기를 건네받고 주위를 둘러보는데, 아저씨가 손가락으로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여기가 좋다.. 저기는 어떻다..' 하며 열심히 설명해주었다.
잘 알아듣지 못하므로 그냥 '씨씨 - 레알? 부엔, 그라시아스' 추임새를 넣었다.
그는 추워 보였다.
나처럼 정상에 막 오르면 더워서 땀도 나지만, 가만히 서서 지나가는 손님을 기다리는 아저씨에게는 늦가을 언덕 위의 날씨가 쌀쌀맞아 보였다. 발을 조금씩 구르며 추위를 견디고 있었다.
지금 돌아보면, 지나가는 사람도 드물고 날씨도 차가워 장사가 되지 않을게 뻔한데, 무덥고 순례자도 많은 계절이라면 모를까, '무엇이 아저씨를 그 자리에 서있게 만들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한 푼이라도 벌려고? 달리 갈 곳이 없어서? 자리를 비우면 남이 차지할까 봐?..
내가 아저씨를 보았듯, 멀리서부터 언덕을 오르는 나의 모습을 아저씨도 보았을 테지.
내가 '뤼노'를 기대하며 언덕을 올랐듯이, 아저씨도 팔아줄 '손님'을 기대하며 다가오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앞서간 검소한 뤼노는 분명 팔아주지 않았을 테고.... 기껏 한참을 기다려 나타난 내가, 물건을 팔아주기는커녕 사진이나 찍어 달라고 했으니 조금 아쉬웠을 것이다.
아쉬움에 익숙해졌는지 아저씨는 씁쓸히 웃으며 '부엔 까미노'라고 인사를 하고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돌아섰다.
그리고 다시 멀리 언덕 아래를 바라본다.
녹슨 순례자상 끄트머리에서 떨어져 나와 거친 세상을 헤매다가 높고 커다란 언덕 앞에서 눈물 흘리며 아파했을 아저씨는, 무거운 짐을 지고 하루하루를 한 걸음씩 힘겹게 걸어가는 순례자다.
나는 몸도 마음도 가난한 투어리스트.
팔아주지 못해서 마음 한켠이 불편했지만 한편으론 그가 부럽기도 했다.
그의 낡은 트럭이 부러웠고 그의 일터인 이 길, 까미노가 부러웠다.
어디까지나 이제 막 길을 시작하는 여행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말이다.
언덕을 오르던 발걸음보다 내려가는 발걸음이 더 조심스러웠다.
가파르고 미끄러웠다.
언덕을 내려오며 바라본 풍경에서 어째 조금 다른 느낌의 '땅'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색깔도 풍경도.
가을걷이가 끝난 뒤라서 그런가, 빈 들판이었지만 황량하기보다는 포근한 느낌이었다.
언덕을 내려와 길이 이어지고 작은 마을을 지나갔다.
산티아고까지 697km.
'700km 나 남았어?'와 '700km 도 안 남았네..' 가 반반이다.
알베르게에 도착하니 뤼노가 밖에서 사람들과 얘기하며 쉬고 있었다.
뤼노가 '안녕' 하며 반겼다.
아담한 알베르게.
흙투성이 신발은 대야에 담긴 물과 솔로 닦아놓고, 샌들로 갈아 신고 안으로 들어갔다.
대나무 사무엘과 독일 부부도 와있었다.
이날도 내 자리는 뤼노의 2층.
신발을 벗고 보니 양쪽 새끼발가락에 물집이 자리를 잡았다. 나는 간단하게 바늘에 실을 꿰어 처치했는데 뤼노의 발은 심했다. 군데군데 생긴 물집 때문에 주사기까지 사용했다. 내게 여분의 바늘이 있는 걸 보더니 '하나만..' 한다.
치료를 마치고 마을로 나가기 전에 부엌을 뒤졌다.
부엌이 있는 알베르게에는 먼저 간 순례자가 남겨놓은 부식들이 꽤 있었기 때문에 필요한 것만 사면 되기 때문이었다. 찬장에 아로스(쌀)가 있었기에 저녁 메뉴로 쌀밥에 계란 프라이, 참치캔과 햄 등으로 정했다.
오후의 마을은 한산했다.
작은 마을이라 마을 끝까지 다녀오는데 금방이었다.
생필품을 파는 가게 하나가 열려있었는데, 뤼노가 방수 바지의 필요성에 대해 강조해서 하는 수 없이 7.5유로를 주고 싸구려 비닐 바지를 구입했다. 사고 싶지 않았지만 얇은 귀를 가진 나는 '프랑스에서는 상상도 못 할 가격'이라는 뤼노의 말에 사고 말았다. 싼 게 비지떡이라고 스타일이 영- 아니었다. 그냥 비니루 몸빼.
입으면 걷기가 싫어질 것만 같았다.
이날은 그나마 밥 짓기에 성공해서 설익지는 않았다.
'김 먹을까...' 했더니 '굿굿'.
밥 위에 김가루를 뿌려먹으니 맛이 정말 좋았다.
김을 다 먹어치웠다.
저녁을 먹은 후 뤼노와 내일 갈 길에 대한 정보를 보고 있었는데 대나무 사무엘이 벽난로 위에 있던 한글로 된 성경책을 가져오더니 무언가를 알려달라고 했다.
사무엘은 특이한 걸 수집하고 있었고 그것은 '더 이상 포도주가 없나니...'라는 성경구절을 각국의 언어로 번역해 수첩에 적는 것이었다. 그래서 항상 '와인 와인..'거렸던 것이고, 그래서 항상 와인을 달고 다녔던 것이다. 혹은 항상 와인을 달고 다니면서 '와인 와인..' 거리다가 그 문구를 발견했는지도 모르겠다.
'데얼 이즈 노 모어 와인..'
"쳐드레게.. 퉈이산.. 토도주가.. 언나니..."
'뭐라는 거야?'
한국말이 너무 어렵단다.
그냥 소리 나는 대로 받아 적어간다.
혹시나 안나가 오려나, 기대반 염려반으로 기다렸지만 안나는 물론 제이미, 크리스, 조는 오지 않았고 이후로도 다시 그들을 만날 수 없었다.
함께 걷고 싶어도 함께 하지 못하고, 함께 하기 싫어도 함께 걸어야 하는 까미노.
처음엔 싫다가도 차츰 속내를 알아가고 오해도 풀어가며 좋아지기도 하는데 안나와는 아쉬웠지만..
할 수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