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삐 부르고스!

by 외투


하늘 때문에 아침부터 취했다.

알베르게에서 내다본 창문 밖 풍경은,

구름을 쥐면 포도주가 하늘에서 비처럼 내릴듯한 빛깔이었다.

하늘에서 포도주가 내린다면.... 상상만으로도 발갛게 취한다.

며칠 비가 오지 않았기에 비가 와줘도 괜찮겠다고 생각했지만 비는 내리지 않았다.




어제 이곳 아헤스에 도착했을 때, 마을의 무니시팔(공립) 알베르게가 만원이어서 하는 수 없이 사설 알베르게에 묵을 수밖에 없었다. 11월의 '싼티아고 데 까미노'는 사람이 적어 대부분의 알베르게가 한산했지만 아헤스의 무니시팔은 단체관광 손님을 받았다.

알베르게가 길을 걷는 사람만을 위한 숙소는 아니었나 보다.


바르에서 아침을 먹고 나오는데 홀리안과 헤수스가 나타났다.

그러고 보니 어제 숙소에서도 바르에서도 보지도 못했었는데...

둘은 어제 버스로 부르고스에 가서 그곳에서 쇼핑도 하고 잠도 그곳에서 자고 아침 버스를 타고 다시 왔단다.

신발도 커플룩으로 같은 모델을 샀다고, 가볍고 좋다고 자랑질이다.

아헤스에서 부르고스까지는 20km 가 조금 넘으니 버스로는 20~30분이면 충분한 거리.

그런데 왜 그렇게 멀게만 느껴졌는지....

걷기 시작한 지 12일째.

20km 가 넘으면 자연스레 꼬박 하루거리로 아주 멀게만 여겨졌다.

버스만 타면 쉽게 갔다 올 수 있는 거리임에도 버스 셔틀은 생각지도 못했다.

반면 싼티아고까지의 수백km는 짧게만 느껴졌다.


포도줏빛 구름이 UFO 로 변신해 따라왔다


브루고스까지 가는 길 일부는 도로를 따라 걷는 구간이라 많은 사람들이 버스를 이용한다고 해서, 잠깐 뤼노와 고민을 했다. 버스를 탈까 말까. 하지만 결국 걷기로 했다.


프랑스 사람인 뤼노의 인상은, 처음의 '매우 검소한 프랑스인'에서 '짠돌이'로 진작에 바뀌어 있었다.

유럽에서 상대적으로 저렴한 스페인 식당의' 메뉴 델 디아(오늘의 메뉴)'는 뤼노와 함께하는 동안엔 그림의 떡이었다.

그런 뤼노에게 버스라니, 당치 않은 지출이다. 뤼노는 대머리다.

그리고 나도 살짝 대머리.


잠시 걸으니 선사시대 남자가 창을 들고 유적지임을 알리고 있었다. 유적지로 보이는 곳으로부터 스피커를 통해 투어를 알리는 안내방송이 들려왔다. 아침에 보았던 관광버스도 보였고.... 아마 무니시팔의 단체 관광객들이 투어를 즐기고 있는 듯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포도주 구름에 취했는지, UFO에 홀렸는지, 아니면 선사시대로 잠시 빠졌었나....

그만 화살표를 잃어버리고 말았다(사진을 보니 우리가 놓친 노란 화살표가 창을 든 남자 뒤로 보인다).

한참을 서성대고 나서야 겨우 사람을 만나 길을 물을 수 있었다.

걸어온 길을 되돌아가기는 싫어 우리는 작은 동산을 넘어가기로 했다.



아임 프럼 코리아


오르막길로 막 들어서는데 개 한 마리가 따라왔다. 그냥 조금 따라오다 말겠거니 했는데, 마을을 벗어나기까지 계속 따라왔다. 더 따라오면 안 될 것 같아 돌려보내려고 손짓을 해봤지만 못 알아듣는다.

'돌을 던져 쫓아 볼까'

돌을 던지니 달려가 물고 온다.

'훈련은 돼 있네'

더 큰 돌멩이를 주워 던졌더니 다시 달려가 물고 따라왔다.

물고 오는 것까지는 좋은데 우리에게 돌려주지 않고 그 돌을 물고 계속 따라왔다.

'훈련이 덜 돼 있네'





떼어놓으려고 있는 힘껏 멀리 던져보았지만 기어코 돌을 찾아 물고 다시 따라왔다.

'이 녀석이....'

최후의 방법.

"아임 프럼 코리아, 유노우? 아이 윌 이트 유!!!"

뤼노도 거들었다.

“댓츠 라이트. 히 윌 킬 유”

거들려면 스페인어로 거들 것이지, 영어라 그런지 씨알도 안 먹혔다.

중년을 넘긴듯한 개는 멀뚱하게 쳐다보기만 했다.

전화번호가 새겨진 목걸이를 하고 있었기에 다음 마을까지 가서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하고,

작고 가벼운 돌을 던져주었다.

길 잃은 사람이 길 잃은 개와 함께 길을 찾아 걸었다.





녀석은 그리 살갑지도 않아서 꼬리를 치지도 않았고 무심하게,

그리고 살짝 우리 눈치를 보듯 주위를 돌면서 동행을 했다.

마치 우리길에 무임승차한 것처럼.

길을 아는지 모르는지 우리를 앞서가다가 우리를 기다리기도 하고,

뒤쳐져 멀어지다가 따라오기도 하며 같이 걸었다.





동산 위에 올라가니 길이 보였고, 멀리 홀리안과 헤수스가 보였고 마을도 보였다.

그래, 마을까지만 가면 주인을 찾아줄 수 있겠구나.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주민의 도움으로 전화를 걸자 5분도 안되어 개 주인이 찾아왔다.

종종 벌어지는 일인지, 그는 그렇게 반가워하지는 않았고(귀찮은 듯 보였다) 고맙다는 말을 하고는 금방 개를 차에 태우고 떠났다.




개를 키워본 적은 없었다.

개와 함께 걸어보니 홀로 걸을 때와도 다르고, 뤼노와 둘이 걸을 때와는 또 달랐다. 심심하지도 않았고 살짝 재미도 있으며 든든하기까지 했다. 말이 통하지 않았지만(어차피 사람들과도 통하기 어려웠지만), 어쩌면 그래서 더 편했는지도 모르겠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고 갈 길 가다가 가끔 뒤돌아보고, 또 뒤 돌아 보임을 당하고 하면서 너무 가깝지도 않고 멀지도 않은 그런 적당한 거리를 두고서 걷다 보면 뤼노와 단둘이 걷는 것보다 더 편했다.

잠시 동안이나마 함께 걸으며 편안함과 재미가 뒤섞인 행복감을 맛보았다.

따뜻한 개 같은.... 행복함.


녀석도 그렇게 생각했을지는 모르겠다.

이 녀석들이 길을 잃었나 보네. 돌은 던져줄 줄 아는구나. 훈련이 덜 돼 있네. 돌은 왜 달라는 거야, 내건데.

다음 마을까지만 따라가 줄게. 길을 걷는 사람과 어울리는 게 은근 재미있거든.





부르고스는 아주 큰 도시였다.

도시 초입부터 중심지까지 걷는데도 한참 걸렸다.





부르고스 성당이 보이기 시작했다.

알베르게는 바로 성당 근처에 있었다.

우리는 시내를 관통해서 걸어왔지만,

씨그릿과 오바츠는 강을 따라 난 길을 걸었다면서 아주 예뻤다고 했다.

짐을 풀고 부르고스를 둘러보러 나왔다.


정말 어마어마한 규모의 건축물이다.

성당은 원래 입장료를 받는 모양이었지만,

오늘은 일요일이라 7시에 미사가 있으므로 그때는 무료라고 뤼노가 알려주었다.

오래된 건물이 곳곳에 산재한 큰 도시가 낯설면서도 멋스러웠다.




다리 위에서 바라보는 야경도 근사했다.

아마 씨그릿과 오바츠가 따라 걸어왔다는 그 강일 것이다.


미사 시간에 맞춰 성당으로 향했다.

뤼노의 미사는 진지했다. 앉았다 일어나기를 반복하고,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고, 전병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고.... 나는 미사를 핑계로 성당 구경에 여념이 없었다. 그저 관광객들로 붐비는 도시로 여겼는데, 많은 사람들이 진지하게 미사에 참여하는 것을 보니 또 다른 느낌이었다.



유아 마이 개스트


'미사 구경'을 마치고 나오는데 웬일로 뤼노가 '메뉴 델 디아'를 사 먹자고 했다(웬일은, 부르고스의 무니시팔 알베르게에는 주방이 없었다). 골목마다 식당이 즐비했고 밖에 놓인 메뉴판을 보고 적당히 저렴한 식당을 골라 들어갔다. 식당 안쪽에 자리를 잡고 앉는데 뤼노가

"유아 마이 개스트."

" ? "

내가 자기 손님이라니.... 이게 분명 영어시간에 배웠던 표현 같은데....

'뭔 소리지....?' 하고 있는데 웨이트리스가 와서 메뉴판을 펼쳐 보였다. 이렇게 먹는 것도 처음이었지만 스페인어를 모르니 뤼노가 일일이 설명을 해주었고 대신 주문을 했다. 뜨끈한 국물이 먹고 싶던 참에 마늘이 들어간 수프가 있다길래 그걸 전채로 주문하고 메인으로는 닭고기 스테이크를 골랐다. 뤼노는 전채로 아스파라거스 샐러드를 주문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노을 같은 비노 띤또(적포도주).

당시만 해도 아스파라거스가 생소했던 나로서는 '콩나물에 많이 들어있다는 숙취에 좋다는 물질 아닌가?' 했는데(그건 아스파라긴산), 조금 마르고 길쭉한 두릅 비슷하게 생긴 채소가 나왔고 내것은 순댓국, 혹은 곰탕 비스므레하게 생긴 수프가 나왔다.

뤼노가 자기 것과 비교를 했다.

언뜻 보아도 접시에 달랑 아스파라거스 두쪽 담긴 것보다 두툼한 사발 가득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나의 수프가 먹음직했다.

'그게 더 맛있어 보이는데, 음 냄새도 좋아'

구수하고 따뜻한 수프가 정말 좋았다. 한기와 피로가 싹 가셔버렸다. 얼마 만에 먹어보는 국물다운 국물인지.

내가 숟가락으로 떠먹다 남긴 수프를 가리키며 '먹어도 돼?'라고 뤼노가 물어보았다.

그리고는 몇 수저 뜨더니 기어코 수프 사발을 통째로 들이켰다.

'프랑스 스타일인 건가, 이게!?'

누가 보고 이상하게 여길까 봐 주위를 살폈다.

뤼노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나는 조금 창피했다.


뤼노의 이번 까미노는 여자 친구 때문에 시작되었다고 한다. 여자 친구는 결혼을 하자고 했지만 뤼노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고 했다. 일종의 '도피성 까미노'라고 해야 하나. 가끔 내 스마트폰을 빌려가는 것도 여자 친구로부터의 메일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직장을 그만둔지도 1년 여가 지났단다. 백수의 심정은 백수가 잘 안다고, 나도 종종 그렇게 백수로 지내보아서 그동안의 검소함에 대해서도 이해가 되었다.

연배도 비슷하고, 백수에다가 도피성도 비슷했으며, 어른이지만 여전히 흔들린다는 데 위로를 얻었고, 또 속내를 털어주니 뤼노가 좀 더 편해졌다.

생전 처음 해외로 나온 내게 까미노 첫날부터 가이드도 되었다가 길동무도 되었다가 말벗도 되어준 뤼노.

뤼노의 마음이 정해지는 순간, 그의 이번 까미노도 끝이 난다.

뤼노가 없는 까미노는 어떨까.


식사를 마치고 계산을 하려고 지갑을 꺼냈더니 뤼노가 만류하며

"유 아 마이 개스트 투나잇!"

" ! "

나는 그제야 말뜻을 알아들었다.

뤼노가 밥값을 모두 계산하고, 더불어 웨이트리스가 찬절했다며 약간의 팁까지 테이블 위에 얹어 놓았다.

그 순간 뤼노가 정말 멋진 프랑스인으로 보였다.

'짠돌이'와 '멋진 프랑스인' 사이의 거리도 약 20km.
'메뉴 델 디아' 한 번이면 금방이다.



해삐 부르고스!


식당을 나와 성당의 첨탑을 이정표 삼아서 알베르게를 향해 부르고스의 밤거리를 걸었다.





이날 왜 뤼노가 저녁을 샀을까?

마지막으로 함께하는 식사도 아니었고....

미사를 보다가 계시를 받았나....

아니면 내 속마음을 눈치챘을까?

아마 언제 끝날지 모르는 자신의 까미노에서 유럽에 처음 온 동양인 길동무에게 베푼 커다란 호의였겠지.

이날 부르고스에서의 '메뉴 델 디아'는 정말 달디달았다.


스페인의 여느 도시처럼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한데 어우러진 부르고스도 멋지지만,

이 날의 기억은 아침노을과 뤼노의 '메뉴 델 디아',

그리고 잠시나마 같이 걸었던 녀석으로 유독 행복하게 남아있다.

그러고 보니 녀석의 이름도 몰랐었네.

우리만의 이름이라도 지어 불러줄걸.

지금 지어준다면 '해피'.

영어라 못 알아들으려나.

그럼 조금은 스페인스럽게 '해삐'.

그래서

해삐, 부르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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