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두 번, 재회 한 번

by 외투


오늘은 독일 부부 씨그릿,오바츠와 헤어지는 날.

언제나 훈훈함을 몰고 다니는 부부였는데..

한 명 한 명 일일이 안아주며 작별인사를 하는 씨그릿.

오바츠는 그저 웃고만 있다.

씨그릿이 "한-"이라고 나를 불렀다.

씨그릿과 오바츠, 그리고 사무엘은 나를 ‘한’이라고 불렀었다.

나를 안아 준다.

내가 독일에 갈 수 없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후에 독일에 오게 되면 꼭 연락하라고 했다.

나는 혹시라도 한국에 오면 정말 연락할까 봐 차마 ‘한국에 오면 연락하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첫날 피레네를 넘을 때부터 알게 모르게 스쳐 지나가며 얼굴을 익히고, 인사를 나누고, 밥을 해 먹어 가며

어느 정도 친해졌는데.. 그나마 예정된 이별이라 많이 서운하지는 않았다.

조금 서운했다.


그런데 이별은 홀로 찾아오지 않았다.

씨그릿과 오바츠와의 이별이 아쉽지만 훈훈한 이별이었다면

죠셉과의 이별은 너무나 갑작스럽고 안쓰러운 이별이었다.

그는 발목이 안 좋아 여기서 까미노를 끝내야겠다고 했다.

적지 않은 나이에 직장을 잃고 새로운 도전을 다짐하기 위해 뛰어든 까미노인데,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가장의 무거운 책임감이 죠셉의 발목을 짓누르는가.

촉촉하게 젖은 죠셉의 눈을 차마 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인사를 나눌 때 죠셉의 목소리가 살짝 떨리기까지 했다.

서로를 안아주고 반대방향으로 걸었다.

조셉은 배낭을 알베르게에 맡기고 부르고스 성당이나 한번 더 둘러보겠다고 했다.

호두까기 죠셉, 부디 건강하기를..


오늘은 좋아하던 사람들과의 이별이 있었다.

모든 이별이 아쉽지만

한 번은 예정돼있던, 다음을 기약하며 따뜻한 집으로 돌아간다는 기쁨이 더해져 있었다면,

다른 하나는 느닷없이 들이닥쳐 어쩔 줄 몰라해야 하는 슬픔이 더해졌었다.

헤어짐은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새로운 만남을 두려워하는 건지도..

어쨌든, 갈 길은 가야지.

부르고스와도 작별을 고했다.


뒤숭숭한 마음으로 걷는데,

뤼노가 어제 미사에 나왔던 성경 구절에 대해 얘기해주며 무슨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 보라고 했다.

주인이 하인 셋에게 돈을 나눠주고 나중에 그 돈을 어떻게 했는지 물어봤는데,

세 하인중 한 명은 돈을 불리고, 한 명은 그대로였고, 나머지 한 명은 빈털터리가 되었다나..

대강 그런 내용 같았다.

도무지 왜 주인은 하인에게 돈을 나눠주고 나중에 그런 걸 확인했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이해를 떠나서 내가 제대로 알아듣기나 한건 지도 모르겠다.


나는 종교가 없다.

하지만 순례길이라고 성경을 스마트폰에 담아 갔었다.

까미노에서 자기 전에 조금씩이라도 성경을 읽으려고 했었지만,

(까미노를 걷는 동안 성경책을 다 읽어보겠다는 계획이 얼마나 무모한 것이었는지 이제는 안다)

온종일 걷고 나서 침낭 속에 들어가면 성경은 그야말로 수면제가 되고 말았다.

거기다가 포도주라도 몇 잔 마시면 그야말로 초강력 수면제가 되었다.

그리고 몸이 피곤하지 않았다 해도 성경은 너무 거리감 있는 문체로 쓰여있어서

기껏 스마트폰용 성경과 조가비, 그리고 크레덴시알 3종 세트를 이용해 순례자로 위장한 내게는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딴 세상 얘기로 읽혔다.

그래도 처음 며칠간은 읽어보려고 시도는 했었다.

곧 포기했지만.


도시를 벗어나자 이내 고향의 향기(?)가 물씬 풍겨왔다.

뤼노가 골치 아픈 숙제만 던져놓고 앞서갔다.

거름냄새가 더해져 골치가 더 아픈 것 같았다.






길이 예쁘다.

멀리서 볼 때가 더 예쁘다.

그 속에 들어서면 더 멀리 보이는 풍경이 예뻤고... 그렇게 동경은 되풀이된다.

동경 반복, 무한 동경.




아이 헤이트 잉글리시 티쳐


연세가 80이 넘은 헤럴드 할아버지는 '언제 여기까지 걸어왔지?'라는 생각이 들게끔 잘 걸었다.

헤럴드는 예전에 유럽을 여행하던 중 심장쇼크로 쓰러진 후,

의사가 걷기를 권유하면서 까미노를 추천해줘서 그 뒤로 시간을 내어 까미노를 걸었다고 했다.

전에 걸었던 이 지역은 비가 와서 아주 개고생을 했던 기억이 있단다.

그러면서 나더러 좋은 날씨에 걷게 되어 다행이라고.

영어 선생님이었다는 헤럴드는 과연 내 이름을 정확하게 불러주었다.

내 이름을 정확하게 발음해준 몇 안 되는 까미노 동무였다.


헤럴드 할아버지도 그냥 '헤럴드'라고 편하게 부르라고 했다.

겨우 40넘은 게 80넘은 헤럴드와 친구 먹었다.

그는 내 영어가 틀릴 때면 콕콕 집어 뜯어고쳤다.

기온이 10도 이하라는 뜻으로 ‘언더 텐’ 하면

"그것도 알아들을 수는 있지만 '텐 빌로우'가 올바른 표현이야"라는 식으로.

뤼노와는 귀 모자급 영어로 편하게 잘만 얘기했었는데..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매번 지적질이다.

결국 "아이 돈 라이크 잉글리시, 아이 헤이트 잉글리시 티쳐!"라고 했더니 웃는다.

상대의 이름을 편하게 부르는 순간 형식이나 격식의 벽 하나를 깨부순 것처럼 대할 수 있었다.

연장자를 어려워하지 않는 것만큼이나 나이 어린 사람이라고 함부로 할 수 없었다.


빨리 앞서 걸어갈까 하다가 아무래도 헤럴드가 조금 힘들어하는 것 같기도 해서 같이 보조를 맞춰 걸었다.

헤럴드가 온따나스에 아주 좋은 사립 알베르게가 있다고 했는데 안내지를 보니 이 계절에는 문을 닫고 무니시팔만 연다고 나와 있었다.

걸어도 걸어도 마을은 코빼기도 안 비칠 풍경만 계속되어 나도 조금 지치기 시작했을때

헤럴드의 전화벨이 울렸다. 헤수스였다.

걱정이 되었는지 온따나스에 먼저 도착해서 전화한 것이다.

전직 영어선생 헤럴드는 스페인어도 잘했다.

며칠 사이에 헤수스와 폰넘버도 교환하고 서로 통화까지 하는 사이로 만들다니..

잠시 쉴 겸 배낭을 내려놓고 오렌지를 꺼냈다.

헤럴드가 달게 먹었다.

‘잇츠 투 빅’ 내 배낭을 가리키며 헤럴드가 지적했다. 아이 헤이트....


그나저나 이놈의 온따나스는 어디로 숨어버렸는지 보일 때가 되었음에도 보이는 건 들판뿐이다.

그러다가 노홍철 말마따나 '뿅'하고 나타났다.



분지 속에 숨어있어 코앞에 가서야 마을이 모습을 드러냈다.

뤼노가 마을 어귀에서 마중을 나왔는지 슬리퍼 차림으로 반겼다.

마을에 문을 연 알베르게는 두 개.

안내지에는 닫혀있다고 되어있던, 헤럴드가 말한 아주 좋은 알베르게는 바르를 겸하고 있었고,

이어서 바로 옆에 무니시팔이 자리 잡고 있었다.

뤼노가 자기는 무니시팔에 자리를 잡았다고 은근히 그리로 유도한다.

무니시팔 호객꾼도 아니고..

헤럴드와 뤼노 사이에서 잠시 고민하는 척하다가 당연히 무니시팔로 가줬다.

영어선생이 싫어서는 아니었다.

좋은 선택이었다고 뤼노가 말했다. 과연 좋은 선택이었을까?

당연히 헤럴드는 스페인팀과 친구 호세가 있는 사립 알베르게로 들어갔다.


알베르게 2층의 도미토리룸에 들어가니 낯익은 배낭이 한 침대 위에 놓여 있었다.

‘어디서 봤더라.. 많이 보던 건데.. 아! 이것은..’

바로 호두까기 죠셉의 것이었다!

이런 깜짝 이벤트라니..

아침에 이별하고 저녁에 재회했다.

정말 반가웠다.

죠셉은 아침에 헤어진 뒤 병원에 갔었는데, 치료를 받고 차를 타고 왔다고 한다.

아팠다가 치료를 잘 받은 사람들은 끝까지 잘 걸었다. 게다가 더 빨리 걸었다.

베아도 그랬고 죠셉도 그랬다.




저녁을 먹고, 치우고..

보름 만에 집에 연락을 했다.

집 떠난 지 보름 만에 안부를 묻는 나나,

생전 처음 해외여행에 나선 자식에게 연락 한번 안 하는 부모님이나..

전화를 한 것은 아니었고 엄마에게 안부 문자를 보냈었는데 통 답문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동생에게 다시 문자를 보냈다.

'나는 여행 잘하고 있다. 잘 먹고 건강하게.. 부모님은 잘 계시냐? 집에 별일은 없냐?'

문자를 보냈더니 동생 놈의 답문이 너무했다.

'응'

한 글자의 답문.

정말 쿨하다.

야, 글자가 많으면 어디 요금이 더 나오냐?

하지만 한 글자로도 많은 안심이 되었다.

‘응’ 속에는

‘여행 잘 하고 있구나. 잘 먹고 건강하구나. 부모님도 잘 계시고 아무 일 없어. 그러니 여기 걱정은 말고 여행이나 잘 하고 오시지..’

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아닌가?


자기 전에 뤼노가 들려주었던 성경구절을 휴대폰에서 찾아 우리말로 읽어보았다.

혹시나 내가 제대로 알아듣기나 한 건지 확인도 할 겸.

하지만 '귀모자급' 영어로 알아들은 이야기나 우리말로 정확하게 읽으나 무슨 뜻인지 통 모르겠다.

그냥 어제 얻어먹은 ‘메뉴델디아’나 나중에 두배, 세배로 갚아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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