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by 외투


뤼노의 '안녕'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에서 깨어도 뜸 들이다가 뤼노의 '안녕'과 '배드 필그림'으로 이어지는 알람 세트를 들어야 일어나곤 했는데..

그것도 오늘 아침이 마지막이다.

정말 뤼노와 헤어진다.



안녕


뤼노는 바르셀로나로 돌아가기 전에 성당을 다시 둘러보겠다고 했다.

가는 동안 별 대화도 없었다.

그냥 갈리시아 지역에 가면 추울 테니 조심하라고 뤼노가 충고한다.

도착해서도 그냥 서로 말없이 멀뚱하게 성당을 바라보다가..

뤼노가 이제 가야겠다고 했다.

미리 뤼노에게 주기로 마음먹었던 십자가 목걸이를 꺼내 주었다.

빰쁠로냐에서 제이미에게 주었던 목걸이.

그때 뤼노가 부러워했었다.

나무를 깎고 다듬은, 목걸이 두 개를 가져왔었는데 남은 하나는 당연히 뤼노의 것이다.

좋아한다.

좋아하니까 나도 좋다.

뤼노도 배낭을 뒤지더니 뭔가를 꺼냈다.

바로 자기가 '사랑해마지 않는' 올리브 나뭇가지를 꺾어 다듬은 십자가.



무슨.. '뤼노, 상한 크로스!' 도 아니고..

그렇게 십자가를 크로스 했다.

짧은 포옹을 나누고..

돌아서려는 뤼노에게


"뤼노.. 아그부하!"


했더니 못 알아듣는다.

헤어질 때 하려고 미리 배워뒀던 프랑스 말인데, 역시나 발음이 시원찮아서..

다시 한번 하니까 알겠다는 듯 웃으며


"안녕 상한~"


어색하게나마 웃으니까 덜 어색했다.

우리는 웃으며 헤어졌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뤼노가 점점 멀어지더니 성당 안으로 사라졌다.





뤼노가 없는, 그야말로 가이드 없는 본격적인 까미노라는 생각에 두렵기도, 설레기도..

돌아보면 조금 아찔하기도 했다.

뤼노가 없었다면 많이 외롭고 힘들었을 것이다.

경비가 많이 절약된 것은 두말할 것도 없고. 그러면서도 누릴 것은 다 누렸다.

어쩌면 뤼노는 내게 이 까미노를 걷는 노하우를 전수하고

'이제 되었다. 그만 하산하거라' 하며 떠난 것 같았다.

딱히 노하우라고 할 것도 없지만.. 그냥 그런 기분이 들었다.


광장에 있는 순례자상을 찍으려고 카메라를 꺼내며 광장을 가로지르는데

어디서 휘파람 소리가 날아와 내 귀에 꽂힌다.

두리번 거렸더니 멀리서 어떤 아저씨가 나를 향해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물론 희롱하는 휘파람은 아니었고

왜 그런가 했더니 몇 발자국 뒤에 모자가 떨어져 있었다.

카메라를 꺼내다가 흘린 것이다.

'그라시아스!'

내가 모자를 찾아 넣는 것을 확인하더니 자기 갈 길을 간다.


뤼노의 거친 물집 투성이 발과 닮았네


이후로도 가끔 휘파람 소리를 들었다.

어디선가 휘파람 소리가 들리면 무언가를 흘리거나 길을 잘못 들었거나 였다.

그렇게 알려주고는 다시 갈길을 가거나 창문을 닫는다.

참 친절한 사람들이다.

길을 물으면 직접 따라오라며 안내를 해주거나 자기도 모르면 다른 사람에게 물어봐준다.

'이건 오버 아냐?' 할 정도로.



레온을 빠져나갔다.

도시를 벗어나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도심을 벗어나 혼자 걸었다.

한참을 부지런히 걷다 보니,

비가 부슬부슬 처량히 내리는데 저만치 샘터에 죠셉과 홀리안과 D가 보였다.

겨우 따라잡았네.

죠셉이 나무에서 땄다며 작은 사과를 내밀었다.


다시 D와 걸었다.

그녀는 레온을 벗어나기 전에 약국에 들러 '베드벅연고'를 샀다고 했다.

내가 사줬어야 했는데..

길가에 알베르게가 나타났다.

D는 이곳에서 머물겠다고 한다.

길가에 있는 숙소였고 또 너무 이른 감이 있었는데..

'내가 너무 폐만 끼쳐서 그런가..'

내게 많은 도움을 준 D.

건강하게, 무사히 여행 잘 마치기를..


D와 헤어져 조금 더 가니 죠셉과 홀리안이 앉아 쉬고 있었다.

그들도 좀 전의 알베르게에서 머물려고 했는데 그만 알베르게가 문을 닫았다는 것이다.

그럼 D도.. 곧 뒤따라 오겠네..

'온따나스에서의 죠셉처럼 작별 인사하고 또 만나겠네..' 큭큭거리며 먼저 출발했다.



한참을 걸었다.

지칠 무렵 나타난 마을에 막 들어서는데,

배낭을 멘 아주머니 한분이 안내책자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레온을 벗어날 때 잠깐 눈인사만 나누고 스쳐 지나갔었는데,

정말 '콤팩트 하다'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배낭과 복장의 아담한 '부인'이다.

'올라' 인사를 했더니 안내책자를 보여주며(봐도 모른다) 그나마 여기가 괜찮은 숙소라

여기서 머물 거라며 내게도 권했다.

다음 마을까지 꽤 먼듯했고 이쯤이면 모두들 쉬어갈 것 같아서 따라 들어갔다.


이 마을은 '산 마르띤 델 까미노'.

생장에서 받은 안내지에는 무니시팔 알베르게 하나만 있다고 되어있었지만

막상 들어가고 보니 사립이다.

마을 초입에 있었는데 언뜻 보면 문을 닫은 것처럼 보여 그냥 지나치기 쉽겠다.

'저녁을 먹고 싶으면 늦어도 7시 전까지는 얘기를 해달라'라고 주인이 말했다고 '부인'이 영어로 통역을 해줬다.

'부인'의 이름은 '안토넬라'

그녀는 벨기에부터 걷기 시작했다고 한다.


1층의 도미토리룸으로 안내되었는데 2층 침대가 많은 넓은 방에 나와 안토넬라 둘 뿐이다.

나는 짐을 정리했고, 안토넬라는 마을을 둘러보겠다며 나갔다.

샤워를 할까 하다가 아직 온수가 안나와 그만두고 자리에 누워 씨에스타를 즐기려고 했는데

웬 남자가 들어오더니 손가락으로 땅과 하늘을 가리키며 뭐라 뭐라 한다.

"어쩌구 아끼, 노, 아끼, 노 저쩌구 아오라, 아오라 아이, 아이"

한참 만에야 2층으로 옮기라는 말인걸 알아들었다.

단 두 명 때문에 이 넓은 도미토리를 난방할 수 없으니 2층으로 옮기라는 말.

'아끼'는 여기, '아오라'는 지금, '아이'는 저기라는 말이었다.

뤼노가 없으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2층으로 올라가니 퀸사이즈 침대가 있는 방과 싱글 침대 두 개가 놓여있는 방을 보여주며 선택하란다.

퀸사이즈 침대를 안토넬라에게 양보하기로 하고 짐을 옮겼다.


짐을 풀고 아래층에 가서 따뜻한 물로 샤워를 했다.

베드벅상처는 더 이상 늘지 않았다.

잠시 후 안토넬라가 들어왔기에 자초지종을 설명해주고 짐을 옮겼다.

그녀는 이 마을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낫씽!'

안토넬라가 아니었으면 이곳을 지나칠뻔했는데,

D나 죠셉과 홀리안이 혹시라도 지나칠까 봐, 마을도 둘러볼 겸 알베르게를 나왔다.



안토넬라의 말대로 마을은 황량하기 이를 데 없었다.

도로를 지나가는 자동차뿐 사람은커녕 쥐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상점도 보이지 않고 빵집도 없고 집집마다 창문도 꼭꼭 닫혀있어 인적이라고는 없다.

그런데.. 좀 더 둘러보니 알베르게가 하나 더 있다! 그것도 무니시팔이!

주위를 돌아보았는데 인기척이 없는 게 문을 닫은 것 같았다.


알베르게로 돌아왔더니 내 방에 한 사람이 들어와 있다.

기모노를 입고서!?

사무엘로부터 들었던 '기모노를 입고 까미노를 걷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다.

'뭐지 이건..?'

날아간 나의 독방은 둘째치고 기모노를 입은 여자랑 한방을 쓰라고?

잠시 뻘쭘하게 서있다가 나보다 더 당황한 기모노가 조용히 방을 나가더니

주인에게 얘기를 해서 안토넬라의 방으로 옮겼다.

기모노는 게다 비슷한 쪼리를 신고 유모차 같은 작은 손수레에 짐을 싣고 까미노를 걷고 있었다.


저녁식사시간에 맞춰 우리 셋은 테이블에 앉았다.

나, 안토넬라, 기모노.

안토넬라는 이탈리아 사람이었지만 사별한 남편의 무덤이 있는 벨기에부터 출발했단다.

좀 더 젊었을 때 남자들 한 53,000명쯤은 울렸을 듯 한 미모.

그런데 손자가 있다며 사진을 꺼내 자랑을 한다.

'손자가 있다면.. 할머니..?!'

전혀 할머니로 보이지 않는다. 아니, 볼 수 없다! 다른 할머니들은 어쩌라고..

조곤조곤 영어로 얘기를 해준다.

순례자 여권을 꺼내 벨기에에서 받은 스탬프를 자랑한다.

벨기에의 스탬프는 그냥 도장이 아니라 장인이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짠 레이스로 스탬프를 만들어 붙여준다고 했는데 정말 예뻤다.

스탬프 때문에 벨기에부터 시작했다고 해도 수긍할 만큼.


기모노의 이름은 사요꼬.

사요꼬는 30대 전후로 보이는 일본인으로

기모노를 입고 까미노를 완주한 최초의 일본 여성이 되고 싶다고 했다.

그냥 걷기도 힘든 판국에 정말 대단하다는 말밖에. 독하다고 해야 하나..

여기서는 일본을 하뽄, 일본인을 하뽀네스라고 했다.

지금은 까미노에서 동양인하면 으레 한국인이겠거니 하지만 예전에는 주로 일본인이었다고 했다.

스페인어 회화사전(만화로 된)을 들여다보며 더듬더듬 현지어로 대화하려는 노력이 부러웠다.

'땡고, 뽀꼬, 땀비엔..' 하면서 일본인 특유의 톡톡 끊어지는 가벼운 목소리로..

다시 열등생이 된 느낌이다.

열등생이 공부도 안 해요.

사요꼬로부터 '이따 봐'를 스페인어로 배웠다. '아스따 루에고'

스페인어를 일본인에게 배우다니 참.

하긴 그전엔 프랑스인 뤼노에게 배웠지.

그 뒤로 '부엔 까미노'와 함께 '아스따 루에고'를 많이 사용했다.

안토넬라로부터는 '차오(잘 가)'라는 말을 배웠는데 유럽에서 많이 통용되는 인사말이라고 했다.


식사를 시작하려는데 막 들어서는 또 한 사람.

프란시스코다.

스페인 청년으로 오늘 레온부터 까미노를 시작했단다.

프란시스코는 메뉴를 주문하지 않았다.

키는 멀대같이 크고 나처럼 비쩍 마른 프란시스코는 베지터리언이라고 했다.

배낭에서 꺼낸 갖가지 견과류를 오도독오도독 깨물어 먹는 게 참 순하고 착하게 생겼다.

말 그대로 식물성 인간이다.

부드럽고, 섬세하고, 연약한 이미지.

그런데 왜 드래곤볼에 나오는 초싸이언 베지타가 떠올랐는지..

'포 에너지..'라고 했는데 '포 에네르기..' 가 더 어울리겠다.


나는 결국 베지타.. 아닌 베지터리언 프란시스코와 룸메이트가 되었다.

배낭도 복장도 막 사입은 듯한 그는 언뜻 봐도 나보다 허약해 보였다.

'IT 컨설턴트'라고 했는데 영어를 잘한다.

전에 레온까지 걸었고 이번에는 산티아고는 물론, 무시아와 피스테라까지 갈 것이란다.

역시 휴가를 이용해서.. 휴가 참 길어서 좋겠다.


오늘은 죠셉이 온따나스에서 그랬던 것처럼,

아침에 작별 인사하고 오후에 다시 해후하는 그런 깜짝 이벤트가,

D와도, 뤼노와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곳이다.

하루 사이에 모두 사라지고, 그 자리에 모두 새로운 사람들로 채워졌다.

생장에서의 첫날이 떠오른다.


가려움이 많이 사라졌다.

베드벅과도 이별한 걸까? 그건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