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 11월 11일 11시 11분 11초

by 외투


111111111..........


까미노에서는 자연스레 날짜 감각이 무뎌졌다.

'먹고 걷고 먹고 씻고(가끔 안 씻고) 자고'의 반복이니까.

별생각 없이 평소처럼 침낭을 개고 배낭을 정리하며 길을 나설 채비를 하는데 씨그릿이 오늘은 특별한 날이라며 미소 지었다.

오늘은 11월 11일이다. 그것도 2011년의.


드라마나 영화에서 자기 생일도 잊은 채 일에 몰두해 있으면 연인이나 친구가 이를 알려주고,

그제서야 놀란 표정을 짓는 주인공.

'내게 그런 일이 가능하기는 할까?' 하고 의문을 품곤 했었다.

어쩜 그렇게 부모님의 생신은 잘도 잊으면서 내 생일은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는지.

생일 이래 봐야 어차피 별다를 것도 없을 테지만 그래도 약간의 기대감이 며칠 전부터 마음에 바람을 불어넣는다.

막상 생일날이 되면 별일 없음에 기대만큼의 아쉬움으로 가득해지지만.

비록 생일은 아니었지만 드라마 속의 생일 잊은 주인공 같은, 그런 기분을 조금이나마 맛볼 수 있었다.


생일(빼빼로데이)도 잊은 채 열심히 작업(걷기)에 몰두하고 있으려니 여자친구(씨그릿)에게 받은 생일선물에 얼떨떨해진 것 같은.

날짜에 이끌려 다니는 게 아니라, 내 뒤에 날짜가 따라오는 것 같은.

갑자기 환기가 되어 좀 더 상큼하게 하루를 시작했다.


11년, 111년, 1011년, 1111년에 이어 900년 만에 다시 돌아온 특별한 날.

모든 하루하루가 천년, 5만 년에 한 번 있는 유일한 날이지만

그래도 2011년 11월 11일은 조금 더 특별했다.

외국인들도 그런 날들을 특별하게 여긴다는 게 다행이지 싶었다.


다시 백 년 뒤 2111년 11월 11일,

나는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금세 날짜가 나를 100년이나 앞서가 버린다.



짙은 안개 때문에 대기가 축축했다.



안갯속에 흐릿하게 보이는 교회가 몽환적이었다.

어찌나 짙었는지 안개를 걷어내며 나아가는 느낌이었다.

안개가 걷히고 모든 것이 또렷하게 보인다 한들 그리 다르지 않겠지만,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가 꼭 나의 미래 같이 짙었다.

적나라하게 드러내 놓지 않으니 궁금하기도, 포근하기도 했다.

모든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되면 아마 돌아버릴지도 몰라.



안개의 한가운데, 길가의 벤치에 앉아 간식을 먹으며 쉬었다.

씨그릿과 오바츠가 안개를 헤치고 오는 게 마치 곰 두 마리가 다가오는 것 같았다.

‘올라올라~’ 곧이어 사무엘이 나타난다.

사과와 초콜릿으로 허기지기 전에 에너지를 채웠다.

출발은 항상 여유롭게, 그리고 본격적으로 여유롭게 걷는다.

안갯속 오솔길을 걷는 것, 정말 좋다.



그렇게 버티던 안개도 계속되는 태양의 공격에 서서히 물러나기 시작했다.

‘까스띠야 이 레온(까스띠야와 레온)’ 지역임을 알리는 커다란 지주간판을 지나 작은 마을의 공터 벤치에 배낭을 내려놓고 휴식을 취했다.

2011년 11월 11일 11시 11분 11초 11....

나는 스페인의 까스띠야, 레온 지역에 막 들어와 있었다.


씨그릿, 오바츠부부가 도착해 맞은편 벤치에 앉았다.

고양이 한 마리가 다가왔다.



이어서 사무엘이 도착하고...



조용한 마을의 쉼터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왔다 갔다 하며 삼각형을 그렸다.

씨그릿과 오바츠가 먼저 출발하고 사무엘이 그 뒤를 이어 출발했다.

나도 배낭을 정리하고 출발.



지나가던 스페인팀의 요한과 베아가 벨로라도의 알베르게 한 곳이 열려있다고 알려주었다.

스페인 사람들과 함께 다니면 좋은 점은 그때그때 현지 사정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씨그릿과 오바츠를 따라 밭을 가로질렀다.

멀리서 볼 때는 한없이 부드러워 보였던 길이, 갈아엎은 밭이 울퉁불퉁 단단하게 굳어버려서 아주 불편했다.

멀리서 보면 낭만 전원극, 막상 가서 겪으면.... 거의 잔혹 모험극이었다.


무사히 모험 구간을 빠져나와 도로를 따라 난 길을 걷는데 멀리 사람이 보였고 다가갈수록 동양인으로 보였다.

드디어 한국사람을 만났다. 그것도 둘씩이나.

항상 알베르게의 방명록에는 많은 한글이 있었는데 드디어 한국사람을 만났다.

부산에서 온 그녀들은 친구사이였다.

함께 올 정도면 보통 친한 친구사이가 아닐 텐데.

아~ 나는 인생을 헛살았어.

그런 친구 하나 없다니.

그런 친구는커녕 그나마 친한 친구의 보증을 피해 해외로 도망이나 치고,

나는 도피성 해외여행을 하고 있는 배드 투어리스트다.



그녀들은 이곳에서 머물까 하고 알베르게를 찾고 있었다고 했다.

나는 벨로라도에 알베르게가 열려 있어 그리로 갈 것이라고 했다.



벨로라도... 별로라도


벨로라도에는 마을 초입에 알베르게(수영장이 있는?)가 있었는데 문을 닫은 상태였고

마을 안쪽 골목 사이에 다른 알베르게 하나가 열려 있었다.

여긴가 하고 열린 문으로 들어가 보니 뤼노가 있었다.

독일 부부도 보였고, 죠셉과 스페인팀도 도착해 있었다.

뒤이어 한국의 그녀들도 도착했다.


짐을 풀고2층 침대에 누워 쉬고 있는데

여자 호스피탈레라가 샤워실 앞을 분산스럽게 왔다 갔다 하며 뭐라 뭐라 불평을 늘어놓았다.

한국분 중 한 분이 샤워를 하고 있었는데,

샤워를 오래 한다며 '꼬레아노 어쩌고 저쩌고' 하는 것이었다.

주인 여자는 호소하듯 사람들을 향해 계속해서 떠들었다.

그래도 사람들은 난처한 상황에 동조하지 않고 어정쩡하게 가만있는데,

베아가 몇 마디 거들었다.

그 순간엔 정말 베아가 미웠다.

그나마 조금 정이 들고 있었는데..

나머지 한 친구가 그 호스피탈레라에게 가서 사과 아닌 사과를 해야 했고

나도 진정을 시키려고 내려갔다. 하지만 말도 잘 통하지 않고....

다행히 뤼노가 합세해서 호스피탈레라를 진정시켰다.

내 침대가 바로 샤워실 입구 쪽이라,

그분이 샤워를 오래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호스피탈레라는 마치 ‘네가 한국인이렸다. 어디 샤워를 얼마나 오래 하나 보자’ 하고

작정하듯 벼르고 있다가 조바심을 내며 그런 것 같았다.

호스피탈레라는 한국사람에 대해 좋지 않은 편견을 가지고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아마 스페인 사람 다음으로 많은 한국인들이 까미노를 찾을 텐데,

사람이 많은 만큼 실수도 많을 것이고 또 그중에는 정말 같은 한국사람이 보기에도 민망한 행동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그런 광경을 보기도 했지만,

몇몇 소수의 사람들 때문에 한국인 자체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그리고 그 감정을 해소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쌓아놓은 좋은 이미지를, 안 좋은 이미지 한방에 지우기 힘든 얼룩으로 만들어버린다.


괜히 내가 이곳 벨로라도를 소개해서 기분 좋을 여행에 재를 뿌린 것 같아 미안했다.


벨로라도의 알베르게에는 주방이 없었다.

뤼노가 호스피탈레라에게 허락을 받아 알베르게에 딸린, 영업을 하지 않는 식당을 이용했다.

알베르게 뒷문을 열고 나가면 작은 마당이 있고, 마당 옆으로 식당 출입문이 있었다.

전자레인지에 소파를 데우고 몇 가지 통조림과 빵으로 저녁을 먹었다.

우리의 일용할 밥을 챙겼던 사무엘은 어디로 간 걸까?

이곳에 오지 않았다.


날씨가 쌀쌀해서 스페인팀이 탁자를 실내로 들여다 놓고 헤럴드 할아버지와 얘기를 나누었다.

워낙에 왁자지껄한 스페인 사람들과 비록 연로하셨지만 우렁우렁한 헤럴드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어우러져 조금 시끄러웠다.

한국사람이 그랬다면 호스피탈레라 아줌마는 대번에 노발대발했겠지.

그런 생각에 서운하기도 안타깝기도 했다.


더럽고 아니꼽고 치사하고, 그리고 귀찮아서 샤워는 하지 않았다.

한국에서도 샤워는커녕 매일 머리 감는 것도 귀찮아했었는데 뭐.

벨로라도... 누구 말마따나 별로라도 할 수 없지 뭐.


2011년 11월 11일 밤 11시 11분 11초....

나는 벨로라도의 알베르게에서 샤워를 하지 않은 몸으로 자고 있었다.